[미디어스=김민하 칼럼] 해병대 채상병 순직 사건에서 ‘VIP 격노설’은 거의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이를 부정할 수 없게 된 여당은 이제 뻔뻔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격노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에 가까운 이러한 반응은 언뜻 보면 대책없는 우기기처럼 보이지만, 법조인 특유의 대응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채상병 특검 문제에 대한 정권의 태도가 정치적 대응이 아닌 법적 방어의 단계로 이미 진입한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VIP 격노설’은 사건 처리 방향이 극적으로 바뀐 배경에 대통령의 격노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의혹이다. 문제의 사건은 지난해 7월 19일에 발생했다. 해병대는 박정훈 대령에 수사단장을 맡겨 법에 따라 사건을 민간 경찰에 넘기도록 했다. 수사단은 해병대 1사단장인 임성근 소장 등 8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가 있다는 결론을 내려 7월 30일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국방부 장관은 이 결과를 그대로 결재했다. 계획대로라면 다음 날인 31일 언론 브리핑과 경찰 이첩을 진행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31일 국가안보실 회의에서 대통령이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게 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라며 격노를 했다는 거다. 이후 국방부 장관과의 통화가 이뤄졌으며, 직후 브리핑이 취소됐고, 장관 결재가 번복되었으며, 경찰로 넘어간 사건 기록은 국방부로 회수되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이전까지 ‘VIP 격노설’은 박정훈 대령이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들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공수처 수사를 통해 김계환 사령관으로부터 같은 내용을 들은 다른 해병대 관계자의 진술이 확보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김계환 사령관은 회의 및 식사 자리 등에서 이 내용을 계속 언급했다고 한다. 김계환 사령관이 ‘VIP 격노설’을 말하는 걸 들었다는 사람이 더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결정적으로, 김계환 사령관의 휴대전화에서 그가 직접 ‘VIP 격노설’에 대한 얘기를 다른 이에게 전하는 녹음 파일이 복구되었다. 김계환 사령관은 공수처 조사 내내 부정했다고 하지만 최소한 ‘김계환 사령관이 VIP 격노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

한겨레 5월 24일 자 1면 보도
한겨레 5월 24일 자 1면 보도

이제 김계환 사령관의 주장이 사실인지를 검증할 차례다. 여기서는 한겨레의 지난 23일 보도가 중요하다. 한겨레는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 결과를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회의에 참석했던 인사가 ‘대통령이 역정을 냈다’고 회의 뒤 여권 인사에게 말했던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 전까지 ‘VIP 격노설’을 주장한 걸로 알려진 사람은 김계환 사령관 한 명이었는데, 이 외에 다른 사람도 같은 주장을 한 사실이 밝혀진 건데, 이러면 ‘VIP 격노설’은 최소한 2개 경로에 의해 확인된 거라고 볼 수 있다.

사실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확인하기 위해선 김계환 사령관에게 누가 ‘VIP 격노’ 사실을 전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먼저 두 가지 사실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김계환 사령관이 지난해 7월 31일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당일 국가안보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누구인지다. 양쪽 모두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우선 의심 대상인 거다.

한국일보의 24일 보도를 보면 김계환 사령관이 지난해 7월 31일 통화한 대상은 대통령실 유선 전화번호, 국가안보실에 파견돼 있는 김형래 대령, 임기훈 당시 대통령실 국방비서관,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 군사보좌관인 박진희 소장 등이다. MBC의 같은 날 보도를 보면 당일 국가안보실 회의에는 조태용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임기훈 국방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이렇게만 봐도 양쪽 모두에 겹쳐지는 인물이 누구인지 드러난다.

[단독] 윤 대통령-국방장관 통화…"초급 간부 처벌 가혹" (5월 24일 SBS 8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단독] 윤 대통령-국방장관 통화…"초급 간부 처벌 가혹" (5월 24일 SBS 8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이 중에서도 임기훈 당시 비서관은 지난해 8월 국회에 출석해 김계환 사령관과의 통화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통화한 사실이 있는 걸로 확인된 거다. 무엇을 숨기기 위해 사실과 다른 증언을 했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더불어 SBS 보도에 의하면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은 지난해 7월 31일 대통령과 직접 통화를 했는데, 이종섭 전 장관 역시 이 사실을 그동안 부인해왔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김계환 사령관에게 ‘VIP 격노설’을 전했을만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한 손에 꼽을 정도라는 걸 알 수 있다. 공수처 입장에선 ‘VIP 격노설’을 더 파고들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수사의 방향은 대통령실과 이종섭 전 장관을 향할 수밖에 없다.

이쯤되면 대통령이 직접 전향적으로 사실을 밝히고 수사 독립성 보장을 약속하면서 수사 협조 의지를 분명히 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당 인사들은 일제히 ‘격노가 죄냐’는 식의 방어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격노’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격노’와 ‘외압’의 연결고리를 부정하겠다는 전략인데, 법조계 인사에 의하면 일선에서 많이 쓰는 법정 전술(?)이라 한다.

이런 방식의 대응은 이미 대통령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예고한 바 있다. 대통령은 ‘VIP 격노설’의 진위를 묻는 기자 질문에 “왜 이렇게 무리하게 진행을 해서 이런 인명 사고가 나게 하느냐”며 질책했다고 답했는데, 당시는 ‘동문서답’이라는 해석이 많았지만 법정 전술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결국 ‘격노’와 ‘외압’의 관계를 부정한 거라고 볼 수 있다.

[단독] 윤 대통령-국방장관 통화…"초급 간부 처벌 가혹" (5월 24일 SBS 8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단독] 윤 대통령-국방장관 통화…"초급 간부 처벌 가혹" (5월 24일 SBS 8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당시 대통령은 공수처 수사를 지켜보자면서도 이종섭 전 장관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도 했는데, 여당 인사들이 석연찮은 행보를 이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공수처가 앞으로 이종섭 전 장관과 대통령실로 수사 방향을 뻗어나가는 걸 용인하지 않겠다는 취지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도 있는 발언이다. 검사 출신인 유상범 의원은 24일 공수처 수사 상황이 한겨레, MBC 등에 보도된 바를 문제 삼으며 “특정 언론과 결탁한 내부자가 있음이 강하게 의심된다”, “내부자를 색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사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견제하는 게 정권의 주관심사임이 여기서도 확인되는 거다.

대통령이 나라를 제대로 잘 다스리는 데에 관심이 크다면 법적 리스크보다는 통치의 안정성에 무게 중심을 둘 것이다. 그러자면 특검 수용,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절충 시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흔적은 없다. 오히려 법정에서나 통용될 논리로 일관한다. 특검에 대한 거부권 행사 논리도 그렇고 여당의 태도도 그렇고 통치 안정성보다는 법적 리스크 방어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럴수록 특검의 필요성은 더 분명해진다. 특검법 재의결 찬성 의사를 밝힌 여당 의원은 4명으로 늘었다. 정권이 자처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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