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의 기본적인 역할이 이용자와 콘텐츠 제공자 간의 매개에 있다면, 규제완화에 따른 지배적 플랫폼 사업자의 출현이나 과점적 구조의 형성이 과연 콘텐츠 경쟁력 증진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콘텐츠(채널) 사업자와 플랫폼 사업자 간의 불공정 거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방대한 채널을 전송할 수 있는 디지털 환경이 구축되었다고 해도 시청습관에 기인한 번호대역의 제한(소위 황금채널대역)은 여전하다. 우여곡절 끝에 유료방송플랫폼 사업자들이 가구 수신료 수익의 25% 이상을 채널사용사업자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규제가 도입되었지만, 이 역시 채널 영업의 과정에서 비공식 경로로 다시 플랫폼 사업자들에게 환류한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콘텐츠 사업자와 재벌 기업의
어떤 이들은 여전히 “방송 장악”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대통령의 “고집” 때문이라고 한다. 하여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로 다시 ‘원대 복귀’한 정부조직 개편안은 대통령의 결단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정부조직 개편안의 최대 쟁점인 미래창조과학부와 방통위의 역할 구분은 정치적 협의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5년 간 급격히 달라진 국내 미디어 산업 지형이라는 자본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신성장 동력을 육성하여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경제적 선의(?)가 “정치적 쟁점”에 발목이 잡혔다는 박 대통령 대국민 담화의 핵심은 절반만 옳다. 정부 부처 하나의 신설이 마치 신성장동력과 일자리 창출의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기에 그
난감하다는 말을 바로 이럴 때 써야 할 듯하다. 인수위 측에서 내놓은 공식 발표는 “방통위는 현재 수행하는 방송통신 규제 및 진흥 기능 중 진흥기능을 미래창조과학부로 이관하고, 방송통신위원회는 규제 전담 조직으로 대통령 소속 중앙행정기관으로서 위상을 유지한다. 신설하는 미래창조과학부에서 ICT 업무는 차관제를 도입해 관장하도록 할 예정이다”라는 단 두 문장이다. 15일 발표 직후 “ICT대연합”을 비롯한 업계 대표, 조직 개편의 당사자, 그리고 언론들은 미래창조과학부를 중심으로 어떤 부서들이 통폐합될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들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미래창조과학부의 신설”, “규제와 진흥의 분리”, “ICT차관제의 도입” 이 세 가지뿐이다. 워낙에
S# 1 경찰 브리핑 룸인과관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자의 추론이라고 해도 경찰의 브리핑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성폭행범이 평소에 일본 아동 포르노를 즐겨보았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음란물을 보고 모든 이들이 성폭행의 충동을 느끼지는 않겠지만...’이란 추론은 기자로서 해서는 안 될 가치판단이며 명료한 문장도 아니다. 기자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킬 이런 사건에 대한 보도는 주관의 개입보다 사실의 전달과 또 다른 범죄의 예방에 더 큰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포르노와 성폭행 사이의 완전한 인과관계가 없다 해도 포르노를 보는 남성 중에 분명히 “그런 놈”들이 있을지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킬킬대며 음담패설을 떠드는 이들 중에는
2000년 이후 경영학과 관련 업계에서 등장한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라는 용어는 특히 디지털과 네트워크로 대변되는 변화를 겪고 있는 미디어 산업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정보만이 자산이던 때를 지나, 홍수처럼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소비자들의 주목(또는 관심)을 어떻게 확보하는가가 이윤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주목경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주목의 지표인 시청률은 통계상의 신뢰도에도 불구하고 표본조사라는 한계로 정확한 매체력 측정의 수단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접속과 몰입도의 계량이 가능한 디지털과 네트워크 시청환경은 미디어 기업에게 시청률과는 전혀 다른 주목의 자본화를 유혹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N-스크린이란 이용자와 미디어 기업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투쟁”이란 말은 노동자들의 집회나 시위만을 떠올리게 하지만, 자본 역시 그러한 투쟁을 벌인다. 우리가 ‘투쟁하는 자본’을 쉽게 떠올리기 힘든 까닭은 노동의 투쟁이 노조와 같은 인격체가 벌이는 공개적이고 물리적인 싸움이라는 외양을 갖는 반면, 자본의 투쟁은 그런 인격체가 아닌 법과 제도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설령 인격체의 외양을 갖더라도 자신이 아닌 “공권력”이라는 대리인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뜨(R. Barthes)가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ex-nomination) 담론이라는 부르주아 신화(myth)의 특징을 짚어낸 것도 바로 이런 자본의 투쟁 형태 때문일 것이다.자본의 이름을 감춘 시행령 개정안오는 5월 4일 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상정될 예정인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하 개정안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나의 행위(doing)는 어떤 결과(deed)를 낳고, 그 결과는 타인의 행위를 위한 조건이 된다. 행위가 낳은 결과와 그 결과를 조건으로 다시 행위가 이어지는 이 복잡하도 도도한 행위의 사회적 흐름이 한 사회를 유지시키고 발전시킨다. 그러나 행위결과가 행위자로부터 분리될 때, 곧 누군가에 의해 행위결과가 독점적으로 통제되고, 그 통제권으로 인해 또 다른 타인의 행위가 제약 받을 때 계급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행위의 사회적 흐름이 파편화되려면 숱한 투쟁이 있어야 하며, 그 투쟁이 행위와 행위결과의 영속적 분리를 가져오는 사회를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라 부른다.미디어 또한 사회의 한 부분이기에 제작이라는 생산행위와 그 결과물인 콘텐츠가 영속적으로 분리되는 이 과정을 바로 미디어
가끔 무심코 내뱉는 단어와 말들은 사유의 게으름을 일깨워 준다. 얼마 전 지인들에게 에 대한 얘기를 건네다 돌아온 한 마디가 있었다. “어디에서 하는 건데?”, “방송사가 아니고...” 그랬다. 이나 모두 늘 앞에는 MBC와 KBS라는 단어가 붙었던 복합명사였다. 그러나 는 앞에 무엇을 붙여야 할까? 갑자기 “해직 언론인들이 만든 방송”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뱉은 말이 생경해졌다. “해고 노동자”라는 말은 그렇게 많이 써왔는데, 왜 난 유독 언론계에서 해고된 이들에겐 이 명칭을 쓰지 않았을까? 해고와 해직의 차이는 무엇이며, 언론 노동자가 아닌 언론인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나? 순간 “해직 언론인들이 만든 주류 미디어가 다루지 못한 뉴스”라는
형식 논리학까지 따지지는 않더라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주어와 술어의 전도이다. 언젠가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물신성을 언급하며 이들은 “자본은 어떻게 생산하는가”를 물을 뿐, “자본이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묻지 않았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생산양식의 역사에서 자본이란 노동이라는 인간의 활동이 어떠한 관계를 취하는가에 따라 만들어지는 대상(Object)이다. 그럼에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이 대상이 어떻게 노동을 만들어 내는가라는 전도된 물음으로 시작한다.이런 문제틀은 ‘정통 마르스크주의’를 자처하는 진보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유하고 있기에, 이들 역시 “자본이 어떻게 노동을 착취하는가”를 얼마나 정교하고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회사
어찌되었건, 한 차례 ‘파문’은 끝이 났다. “잔혹대본”이라는 후속타로 높아진 클릭 수만은 어떻게든 이어가려는 낚시 기사들이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만 말이다. 한예슬 파문(?)처럼 관계자나 관심자 모두 한 마디 씩은 던진 일이 한바탕 휩쓸고 가면 그 뒷정리를 맡는 이들은 별로 없다. 하기야 당사자가 촬영장 복귀라는 투항선언을 한 마당에 막판 변죽을 울려서야 무슨 소용이겠나. 그럼에도 냉정한 분석은 이렇게 파문이 진정되어 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감정 섞인 비난조의 형용사들, “한예슬” 만이 주어가 되는 숱한 문장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예언 따윈 잠시 제쳐두고 조금은 추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자. 그리고 다시 한예슬 파문이라는 구체로 돌아가자. 이게 그나마 분석이란 모양새를 갖추는 방법일 듯
“자연재해=인재”라는 담론햇빛을 마지막으로 본 때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장마에 이어 멈출 줄 모르는 폭우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폭우가 시작되던 첫날부터 강남역, 대치동, 사당, 신림역, 광화문 등 도심 곳곳에서 침수사태가 일어나더니 급기야 우면산 일대의 산사태라는 대형 참사로까지 이어졌다. 중앙재난본부에 따르면 지난주부터 내린 폭우로 7월 30일 오후 5시까지 전국에서 62명이 사망했고 9명이 실종되었다고 하니 지금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해도 뒤늦을 지경이다. 비의 양으로 보나 피해 상황으로 보나, 이번 재난은 단순한 일회성 사고(accident)가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지역 공동체의 위기/위험상황이라 할 수 있다.이런 위기 상황에서 그 원인을 단지 기상이변의 문제가 아닌 ‘인재(人災)’에
“나는 프로다”모두가 다 아는 “프로”라는 말이 있다. 프로야구, 프로축구에 붙는 접두사가 아니라 전문직 종사자들을 일컫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을 준인 말이다. 전문직의 범위는 사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개 이 직종의 종사자들은 특정한 과정을 거쳐 공적 자격(license)을 부여받은 이들이며, 어려운 과정을 거친 만큼 일정 수준의 독립성과 자율성에 기초하여 업무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평가받는다. 흔히 전문직으로 변호사, 회계사, 의사 등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들에겐 부여받은 자율성만큼 직업윤리 또한 엄격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가 지워진다.국가고시를 통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자나 PD와 같은 방송 종사자들 역시 한국사회에서는 전문직에 포함된다. 특히 지상파 방
*김동원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1팀장이 언론노조 KBS본부 노보 39호(6월 2일자 발행)에 기고한 글을 필자와 KBS본부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방송제작현장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처음으로 인터뷰를 다니던 몇 년 전, 가장 낯설었던 것 중 하나는 ‘전문용어’, 그러니까 일본식 속어들이었다. ‘혼방’, ‘데모찌’, ‘아시’, ‘나라비 쇼’, ‘아사모사’ 등등. 지금이야 많이 기억도 나지 않지만 녹취를 정리하며 몇몇 용어들은 건설현장에서 쓰는 말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어뿐 아니라 건설 수주에서 흔히 쓰이는 ‘턴키(turnkey)’가 그렇듯 말이다. 제작 현장에 있지 않은 연구자로서 갖는 선입견일 수도 있으나 한국 방송 산업의 노동시장과 제작방식은 건설현장의 그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인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MBC가 6월 2일 개봉 예정이던 다큐멘터리 에 대해 지난 25일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단지 두 차례만 상영되었을 뿐인데 이 영화의 여파는 상당했다. 근래 들어 이렇게 주목을 받은 다큐멘터리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김재환PD에 대한 인터뷰와 해당 방송사들의 반박을 담은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지상파 방송사들과 영화 제작진 간의 공방은 방송사가 과연 불법적인 협찬을 직접 지시했는지, 조작에 가까운 연출을 묵인했는지 등에 맞춰졌다.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의 배경에도 맛집 프로그램에 뒷돈이 오가고 조작이 행해졌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영화의 개봉을 통해 왜곡될 수 있다는 MBC의 ‘우려’가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공공기관이나 일반기업 모두 해마다 이맘 때 즈음이면 지난해의 성과를 결산·평가하고 올 한해의 전망을 내놓는 보고서들을 공개한다. 그러나 정확한 예측은 제쳐놓고라도 어느 정도의 전망조차 확신할 수 없기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삼성경제연구소와 같은 국내 유수의 ‘지식/정보권력’ 집단처럼 10여 가지 예측을 내놓고 이듬해 그 중 몇 개가 적중했는지 스스로 평가할 자신도 없다. 특히나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와 같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목표들이 난무하는 계획들을 제출하는 기관을 마주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향후 2기 방통위의 행보는 지난 1기의 ‘업적(?)’과 최근의 이슈들을 생각할 때 두 가지 방향에서 짚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지난 3년 동안 방통위가 그토록 바랬으나 아직 이루지
지조없는 공공성과 위기의 시대엄밀히 말하자면 내 전공은 미디어 정책이 아니다. ‘공공미디어연구소’라는 미디어 관련 정책 분석과 대안을 연구하는 곳에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전문 분야는 아니다. 때론 나조차 주위에서 전공을 물어 올 때 선뜻 한두 개의 명사로 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일종의 ‘잡탕식’ 공부만을 해온 듯하다. 그러나 때론 이런 비전문성이 학계와 업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개념과 용어들을 전혀 엉뚱한(?) 관점에서 보게 해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가장 많이 쓰이고, 또 그만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동일한 이름의 한 개념이 이렇게도 쓰이고 저렇게도 쓰인다는 건, 용어가 지조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실체가 모호한 그 용법 때문이기도 하다. KBS 수신료 인상안을
“당신들이 왜 노동자인가?”한 10년 전으로 기억된다. 마산 MBC에서 일하던 작가, 리포터, MC, DJ들이 ‘노동자’인가 아닌가를 놓고 행정심판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사측에게 고용계약서를 쓰고, 낮은 고료를 인상해 달라는 것 등이었다. 이를 위해 노조가 만들어졌고 사측과 교섭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이런 것이었다. “너희들이 왜 노동자냐?” 몇 년 후 한 지상파 방송국에서 파견근무하던 조연출 한 명이 밤샘 작업 중 과로사로 세상을 달리했고, 2008년에는 작가생활을 시작한 지 7개월 된 막내작가가 방송국 사옥 옥상에서 목숨을 던졌다. 언듯 생각난 일들이다. 아마도 더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또 기억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친척들에게, 처음 보는
“나는 정치에서 자유롭지 않다.”한 기자가 있었다. 1936년 취재차 갔던 스페인에서 그는 펜과 수첩 대신 낡은 소총과 허름한 군복을 입고 의용대에 입대한다. 단지 파시즘에 대항하는 전쟁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내전이 종식될 무렵 그는 모든 자유주의자들과 혁명세력들이 막아내려 했던 프랑코의 파시즘보다 더 무서운 적이 바로 곁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전선의 참호에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을 프랑코의 사주를 받아 전쟁을 패배로 이끈 “
월차나 연차를 붙였다면 일주일은 족히 쉬었을 추석 연휴가 U-17 여자 월드컵 우승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사실 어지간한 골수 “축빠”가 아니면 지난 번 4강에 오른 20세 이하 여자축구나 이번 17세 이하 여자축구 대표팀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리 만무하다. 박지성이나 이청용, 그리고 남자 국가대표팀에 쏟아지는 관심에 비하면 이들이야말로 “인기종목 내 비인기 부문”이라고 해야 하나? 17세 이하 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는 선수자원은 고교등록 선수 345명뿐이었고, 국내 여자축구팀은 초등학교에서 실업팀까지 합쳐도 65개에 그친다고 한다. 남자 축구나 야구처럼 오랜 기대의 역사를 가진 종목들보다 여자축구와 같이 혹시나 하는 기대의 승전보가 날아오면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기사들이 있다. 지난 시간 무관심에 대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