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토마토가 5년차를 넘어 아직 순항 중이다. 내근 직원 3명으로 시작했던 사업 규모는 현재 채용을 진행 중인 디자이너 한 명까지 채용한다면 모두 17명으로 늘어난다. 인력 채용과 관련해 가장 많이 고민했던 시점은 8명까지였다. 세 명에서 네 명, 다섯 명, 여섯 명, 일곱 명, 여덟 명으로 몸집을 불릴 때마다 함께 늘어날 고정비용을 심각하게 고민했다.인력 규모 조정과 계획이 사업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 지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터고 아웃소싱이나 프리랜서를 활용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는 조언도 많았다. 그래야 매출 증감에 따라 탄력적이면서도 빠르게 고정비용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옛 어른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제 먹을 건 갖고 태어나는 거
2008년 봄 촛불시위가 시작될 무렵으로 기억된다. 청계천 광장에서 시작해 세종로로 흘러 넘친 촛불 행진은 주요 일간지와 여당 내에서 “대의 정치가 사라지고 국회가 없어질 수도 있다”거나 “정치 집회로 변질되어 모든 정책에 이명박 아웃(out)을 외치다 언제라도 반미로 옮겨갈 수 있는” 상황으로 인지되었다.1) 한 마디로 요약하면 “대의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거리의 정치”에 대한 불안에 다름 아니었다.2) 하지만 촛불 ‘문화제’가 정치 집회로 옮겨가면 안된다는 ‘과도한 정치의식’에 대한 이들의 경고는 불과 두 달 전 이들이 말했던 또 다른 정치를 떠올리게 했다. 이전 해 63.0%라는 대선 사상 최저 투표율과 46%라는 최악의 총선 투표율을 두고 대부분의 언론들은 ‘정치 혐오증’, ‘정치적 무관심’, ‘정쟁
“왜 사회적 기업 대표들은 하나같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얘기할까요?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는 이유는 무얼까요?”서울에 있는 사회적 기업 탐방에 동행 취재 다녀온 기자가 물었다. 아니, 그걸 그 사람들에게 물어야지, 왜 내게 묻느냐고 호통(?)을 쳤다. 물론, 그 기자가 왜 그런 질문을 내게 던졌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 때문일 게다. 그 기자는 내가 아닌 자신에게 물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왜 월간 토마토에서 취재기자로, 이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우리가 사회적 기업?우리 김선정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진 건, 함께 동행한 사회적 경제 지원기관 (사)풀뿌리사람들 강영희 사무국장 발언도 한 몫 한 모양이다. ‘월간
‘마감’으로 먹고 사는 글쟁이가 마감날짜를 지키지 못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마감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송구스럽다. 불성실한 필진을 버리지 않고, 전화를 걸어 원고를 청탁한 담당 기자와 미디어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변명을 하자면, 많이 힘들었다. 재정 압박에서 기인한 혼란을 수습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다른 일에 틈을 주는 것이 녹록치 않았다. 이 와중에 주체의 피로도는 극에 달해 어려움을 가중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의 도움과, 늘 그랬듯, 내부 구성원의 헌신으로 재정 압박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체의 피로도는 해소할 길이 없어 몇몇과 작별을 고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벌어졌다.이런 혼란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때문에 항구적인 안정화가 절실하다. 이런 게
그래 맞다, 사람이다학창시절에 그런 분류법이 있었더랬다.생물과 무생물. 이 기준을 가지고 세상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신났다. 저건 생물, 저건 무생물.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늘 통쾌하다.그렇게 생물과 무생물을 나누는 놀이는 학창시절로 끝이었다. 세상을 알아가면서 무생물 범주에 넣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간’도 그중 하나다. 월간 토마토가 인수한 북카페 이데는 단순한 ‘공간’ 그 이상이었다. 어떤 것에 작용하는 변수가 이리도 다양하다는 생각을 정녕 못했다. 북카페 이데가 월간 토마토에 미친 영향 또한 그러했다. 월간 토마토 창간 목적이 단순하게 잡지 한 권을 매달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며 모두 재미있고
매월 88페이지 남짓한 잡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사업 준비 과정에서 예상했던 유료구독자 증가치는 초반 반짝한 이후 정체였다. 구성원 인건비를 최소화하며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지만 매월 잡지 제작 고정비를 감당하는 것도 만만찮았다. 그렇게 8개월 가량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대전 중구 대흥동에 있는 북 카페를 취재했다. 소설가 김운하 씨가 오픈한 가게였다.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에게 건물 2층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워둔 지 오래여서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만나야 할 인연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토마토 제작비 확보도 수월치 않은 상황에서 40평 규모의 사무실을 얻는다는 게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욕심났다. 북 카페 ‘이데
53권 째 월간 토마토가 세상에 나왔다. 일백도 채우지 못했지만 창간 즈음을 생각해보면 엄청나다. 간혹 지금껏 나온 토마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호를 묻는다. 매호 그지없이 소중하지만 ‘창간호’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머리와 가슴으로 인식하던 ‘꿈’이 구체적인 실체로 눈앞에 놓여 있던 그 순간을 어찌 잊겠는가?창간 준비호에서 드러난 문제도 거의 개선해 나름 잡지다운 꼴을 갖췄다. 종이도 가격이 좀 나가는 것을 골라 사진 표현과 텍스트 모두 안정적인 발색을 보였다. 그런 고급지는 창간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말이다.‘키스, 잡지 표지 콘셉트로’창간호 표지는 지금도 머릿속에 또렷이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 해변에서 남성과 여성이 ‘키스’하는 모습이었다. 며칠에 걸친 논의 끝에 월간 토마토 첫 표지
‘공간’은 참 묘하다. 화수분이다. 전설처럼 저절로 귀한 것이 쏟아지지 않지만 공간을 만들면 무엇이든 나온다. 그 공간이 에너지를 주는 것인지 아니면 압박으로 작용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2006년 추석 즈음이었다. 후배 어머니가 내준 6평짜리 2층 건물에 본격적으로 토마토 공간을 만들었다. 2층 방에 있던 장롱 한 짝을 부숴 책상을 만들었다. 벽에 잇대어 둘러놓고 시장에 가서 천을 끊어다 씌었더니 제법 그럴듯하다. 세 사람이 앉으니 딱 맞았다. 정감어린 나무 여닫이문을 열면 이웃집 마당과 다른 집 옥상이 보였다. 손바닥만 한 창문을 열면 보문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시원했다.그렇게 만든 공간에 컴퓨터와 프린터를 갖추니 당장이라도 훌륭한 잡지를 마구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서른 살 갓 넘었을 때, 여전히 난 시골 글쟁이였다. 사람냄새 가득한 그곳이 결코 싫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영글 때까지 시골에서 나고 자란 터라 고향처럼 푸근했다.만 5년을 채운 후, 시골 주간신문사 기자생활을 그만둔 것은 순전히 ‘행복’ 때문이었다.지극히 주관적이며 그 측정값에 평균을 내는 것은 할 짓이 아닌, 오히려 스코어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 합리적일지 모를 ‘행복’에 대한 생각 말이다. 시골 글쟁이 생활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조금 부족했다. 결핍이 계속 삶을 지루하게 했다. 그 결핍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당시 막 등장한 포털 사이트 지식검색창에 ‘재미있게 사는 법’이라는 주제어를 입력하고 검색하는 빈도수가 조금씩 잦아졌다. 지금은 어떤 결과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