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채해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의 시발점으로 지목되는 'VIP(윤석열 대통령) 격노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외에도 'VIP 격노설'을 들었다는 군·여권 관계자 증언이 나왔다.

대통령실 사건 개입 정황이 추가로 드러나고, '채해병 특검법' 재표결의 시간이 다가오자 보수진영에서 '대통령이 격노하면 안 되냐', '군이 안전지상주의에 빠지면 국방의 미래가 흔들린다'는 논점 이탈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채해병 사망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사건 수사의 본질을 호도하는 주장이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지난 21일 오전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외압 의혹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정부과천청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로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지난 21일 오전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외압 의혹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정부과천청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로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VIP 격노설'은 지난해 7월 31일 윤석열 대통령이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등 8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사건을 경찰로 이첩한다'는 해병대 수사 결과를 보고받고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냐"고 화를 냈다는 내용이다. 이날 국방부는 해병대에 수사 결과 이첩을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예정됐던 해병대의 언론브리핑과 국회 보고는 취소됐고, 수사기록 회수와 재검토가 이뤄졌다.

박정훈 전 단장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으로부터 'VIP 격노설'을 들었다고 했다. 김계환 사령관은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부인해왔는데, 박정훈 전 단장 외에 김계환 사령관으로부터 'VIP 격노설'을 들었다는 또 다른 군 관계자 진술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23일 JTBC 등의 보도에 따르면, 공수처는 해병대 고위 간부로부터 "VIP가 격노했다는 말, 나도 김계환 사령관으로부터 들었다"는 진술과 관련 물증(녹취파일)까지 확보했다. 물증은 김계환 사령관 휴대전화에서 나왔다. 'VIP가 격노했다는 말을 김계환 사령관에게 전한 인물로 지목되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임기훈 전 대통령실 국방비서관 등에 대한 수사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23일 한겨레는 "지난해 7월 31일 아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로부터 '채 상병 사건 보고를 받고 윤 대통령이 역정을 내셨다'는 취지의 말을 지난해 8월 들었다"는 한 여권 인사 발언을 보도했다. 한겨레는 "회의 참석자가 이 발언을 전한 시기는 'VIP 격노설'이 언론에 보도되기 한참 전이었다"며 "참석자의 이런 증언은 'VIP 격노설'을 사실로 확정하는 '스모킹 건'으로 해석된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실 개입 정황은 또 있다. 앞서 공수처 수사를 통해 사건 당시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과 이시원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이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통화내역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24일 조선일보에는 수사외압 의혹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지우고,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 결과가 '국방의 미래를 흔든다'고 지적하는 칼럼이 실렸다. 'VIP 격노설' 등대통령실 개입 의혹이 증폭된 다음 날 실린 칼럼이다.

조선일보 5월 24일 칼럼 갈무리
조선일보 5월 24일 칼럼 갈무리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조선일보 칼럼 <'채 상병 사건'과 국방의 미래>에서 "해병대 수사단이 경찰의 수사 참고 용도로 작성한 조사 보고서를 국방부가 처리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오판과 실수가 결국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는 정치적 참사로 키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영우 이사장은 이명박 정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냈다. 당시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관(현 국가안보실 1차장)과 이명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강경보수'로 분류된다.  

천영우 이사장은 "채 상병 사건의 진상 규명과 사법적 정의 실현이 목적이라면 경찰과 공수처의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특검으로 직행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 같은 주장은 전례와 법리에 비춰 사실과 다르다는 게 다수 언론을 통해 팩트체크됐다.(관련기사▶거짓말과 오류로 점철된 거부권 행사) 

천영우 이사장은 "만약 장병들의 안전에 필수적인 구명조끼조차 입히지 않은 채 급류에서 수색 작전을 벌였다면 이러한 무모한 작전에 채임이 있는 지휘관을 엄중 문책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민간 기업이 이런 식으로 안전을 무시하고 위험한 작업에 직원이나 계약자를 몰아넣었다가 인명 사고가 났다면 그 기업의 책임자는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른 형사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그런데 군에서 일어나는 유사 사고에 대해서도 똑같은 기준으로 지휘관에게 과실치사 또는 직무유기 등 혐의로 형사 책임을 묻는다면 정의는 실현될지 모르나 군의 운용과 국방의 미래에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천영우 이사장은 '안전지상주의'가 군의 목표가 되면 군 간부의 자질이 급격히 저하되고, 군은 전쟁을 할 수 없는 나약한 군대로 전락하게 된다고 했다. 천영우 이사장은 "안전사고나 군기사고의 3분의 1 정도에 대해 지휘 책임이나 형사 책임까지 묻는다면 사단장이 되기 전에 감옥에 가거나 해임을 당하지 않은 장군이 몇 명이나 남아있을까"라며 "결국 지휘관으로서 자질이 없어도 휘하 부대의 안전사고나 군기 사고로 한 번도 문책 당한 적 없는 장교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했다. "이런 일로 사단장까지 처벌하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냐"는 'VIP 격노설'과 판박이다. 

또 천영우 이사장은 "군 내의 안전사고를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정치화하는 것은 군이 유독 인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조직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확산시키고 군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의 불안을 조장한다"고 했다. 그는 민간기업 산재 사망률과 군 사망자를 비교하면, 민간기업에 근무하는 것이 군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면서 "민간 기업에서 일어나는 사망 사고는 보도조차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한 반면, 군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여론의 과잉 조명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 5월 23일 방송 유튜브 썸네일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 5월 23일 방송 유튜브 썸네일

TV조선 앵커 출신인 신동욱 국민의힘 국회의원 당선자는 23일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대통령이 격노하면 안 되냐"고 말했다. 신 당선자는 "('VIP격노설'은)대통령이 무슨 말씀을 하시면 화를 잘 내신다라는 이른바 불통설에 기반한 얘기라고 생각한다"며 "보고가 들어왔을 때 대통령이 '그것은 그렇지 않지,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는 따져볼 문제다. 대통령이 국가를 운영하면서 본인의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는 것을 두고 모두 다 격노설이라고 포장해 무슨 심각한 직권남용을 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했다. 

경향신문 김진우 정치에디터는 24일 칼럼 <윤 대통령, 잘못 드러누웠다>에서 "윤 대통령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매 국면에서 도돌이표처럼 돌아올 것이다. 당장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김 여사 의혹은 특검법을 필두로 제2, 제3의 모습으로 계속 나타날 것"이라며 "'자기 여자 보호하는 건 상남자의 도리'(홍준표 대구시장)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VIP 격노설’ 추가 증언을 확보했다는 소식에 '대통령이 격노하면 안 되느냐'(신동욱 국민의힘 당선인) 같은 대응은 역효과만 낼 뿐"이라고 했다. 

같은 날 한겨레 강희철 논설위원은 칼럼 <좋은 대통령, 나쁜 대통령>에서 "애초에 ‘격노설’이 없었다면, 그래서 수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특검이 거론됐을까. 걸핏하면 법치를 말하는 대통령이 ‘아무도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고래의 법언을 졸지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며 "트루먼의 명패는 알아도 닉슨의 전철은 모르는 모양이다. 8년 전 역사를 다시 불러낼지 모를 위험한 불씨가 기어코 던져졌다"고 썼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