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플래쉬>는 흡입력이 강한 영화다. 액션영화가 아님에도 대단히 파괴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고, 예술이란 무엇이어야 하며, 그 성취를 이루려는 과정에 대해 논쟁적인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재즈 드럼의 빠르고 리드미컬한 템포, 앤드류를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채찍질하는 스승 역을 맡은 J.K.시몬스의 신들린듯한 연기는 영화의 힘을 배가한다.

<위플래쉬>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이 뜨겁다. 김혜리는 이 영화가 얼마나 뛰어난 만듦새를 지닌 영화인가에 대해 분석하면서도 스승인 테렌스 플렛처라는 인물의 교수법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플렛처의 대항 논리는 일종의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서 궁색하며, “편향적”이다. 나아가 그가 던지는 질문은, 이 영화가 과연 “앤드류가 마침내 플렛처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특정한 예술관으로 무장한 이 ‘멘토’의 세계로 투항하는 이야기인가”이다.

▲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사진=포털사이트 다음 영화정보)

이에 대한 듀나의 판단은 ‘오독’이라는 것인데, 그는 <위플래쉬>가 한국에서 유달리 성공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감독의 본래 의도는 “폭력적이고 위험한 선생과 그에 못지않게 위험한 정신상태의 학생이 벌이는 대결”을 다루려는 것이었지만 한국의 많은 관객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제자의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스승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로 ‘오독’했기에 유난히 열광하고 있다는 것. 그는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한국 관객들의 오독’의 문제, 이를테면 대중 이데올로기와 관객의 수용에 대해 더 주목한다. 이는 분명 중요한 주제이다. 그저 박진감 넘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하기에는 영화가 이데올로기에 미치는 은밀한 영향이 심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황진미는 한국 관객들의 열광이 ‘오독’이라고 보지 않는 비판적 입장이다. 이 영화가 “플렛처의 극단적인 교육법을 보여주며 반문하는 교육영화”라고 규정하면서도 마지막에 앤드류가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고 폭발적 실력을 보일 때 보이는 “플렛처의 미소는 ‘내 교육론이 틀리지 않았어’라는 말을 들려주는 듯하다”는 것. 앤드류의 복수가 오히려 플렛처의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교수법을 정당화시킨다고 비판한다. “두 사람의 팽팽한 대결을 환상적인 연주장면으로 마무리 지으며, 이러한 천재 조련술을 긍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반예술적이고 반교육적이며 반윤리적인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진미가 보기에 국내 관객들의 열광과 영화의 흥행은 “미친 교육과 청년실업의 시대를 역상으로 비추는 거울”이다.

이들과는 다른 견해도 있다. 블로거 BeGray는 “<위플래쉬>가 경쟁과 같은 모티프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복무한다는 주장들은 지나치게 안이하게 도출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영화가 “사회적 승인과는 구별되는 '예술의 객관적 계기'가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며, 앤드류는 “사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주관적 노력을 쏟아붇는”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주체가 아니라고 논박한다. 요컨대 앤드류의 성취는 “플렛처에게 맞추었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플렛처 자신이 지향하는 객관적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인정을 받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성공했느냐 아니냐의 양자적 관계가 아니라 객관적 성취로서의 ‘제3항’을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사진=포털사이트 다음 영화정보)

음악비평가 최유준 역시 BeGray처럼 앤드류의 성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인데, 마지막 공연 씬 도입부에서 앤드류가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은 플렛처의 “교활한 복수극”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 “걱정스런 눈빛으로 관객석에서 달려온 아버지를 마주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미적 충동의 계기를 얻”었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다. 앤드류의 독기어린 결의는 ‘더 이상 플렛처에게 조종당하지 않겠다. 나는 플렛처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내 가족에게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이 무대에 섰을 뿐이다’에 가까우며, 그가 무대를 통제하고 주도하기 시작하는 순간, “음악적 권력의 통쾌한 전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앤드류는 “마지막 연주 후에도 플렛처를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그와 같은 유형의 스승이 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해석에 기초한다면 앤드류는 결국 스스로 행사하는 미적 자율성을 전취하고, 정치적 주체로 우뚝 서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최유준의 해석은 이 영화가 실제로 대중 이데올로기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집중하기보다 ‘이렇게 봐야 한다’는 지표를 제시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예술이 취급되는 방식이 역사에 따라 변모해왔기에, 오늘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갖고 있는 예술에 대한 관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 그에 따르면 “탈락자들을 나락에 떨어뜨리는 무한경쟁만이 최선의 예술적 가치를 산출할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은 “자본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신화적 믿음일 뿐”이기에 ‘초절기교’에 대한 자본주의적 판타지에 기만을 극복해야만 한다. 요컨대 ‘앤드류적인 것’을 얻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동시대와 예술의 역사에 대해 남다른 시야를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플렛처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적 판타지에 기만당할 수밖에 없다.

▲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사진=포털사이트 다음 영화정보)

우려들처럼 이 영화는 피가학적이고 신자유주의 자기계발이데올로기를 강화할 여지가 있는 ‘위험한 영화’일 수 있다. 실제로 <위플래쉬>가 왜 유독 한국에서 특별한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문할 때 그런 의구심의 여지가 아예 없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이런 오독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 남다른 독해를 기다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한 시대를 놀라게 한, 이른바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이루는 예술작품, 초절기교는 “비범한 ‘갈증’이 비범한 ‘연습’을 통해 해소될 때” 탄생하기도 한다. (물론 플렛처가 오류를 범하는 것과 달리 반드시 그렇진 않다) 이는 비단 예술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어려움, 이를테면 극심한 경제 위기 속에서도 대중이데올로기가 조우하지 못하는 난맥상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발휘될 수 있는, 급진적이고도 대중적인 ‘초절기교’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 시대의 초절기교는 어떤 모습이며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에는 여전히 쟁점이 있고, 적어도 플렛처와 같은 무한경쟁 약육강식 게임은 아닐 것이다. “‘앤드류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플렛처적인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최유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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