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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라는 골칫거리를 어떻게 마주해야할까[옥인동 샤우팅] ‘생존’으로서의 각자도생과 ‘사회운동’으로서의 집단적 저항 사이에서
홍명교 노동조합 활동가 | 승인 2014.10.04 12:37

생전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기계발 서적이나 힐링 카운슬러들의 강연 영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교를 다닐때나 직장을 다닐땐 생각치도 않던 고민들이 들쑥날쑥 튀어나온다. 어떻게 하면 이 곤경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좀처럼 막막한 기분을 해소할 수 없다. 언제나 중요한 건 사상과 실천이라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뿔뿔이 흩어져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생각을 모으고 행동하는 방법을 아예 잊어먹은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재난시대 생존법’, ‘생존 경제’, ‘생존 교과서’, ‘생존 전략’, ‘생존의 한계’, ‘생존지침서 포켓북’ ‘하악하악 이외수의 생존법’, ‘이미 넌 위대한 생존자’, ‘생존의 밥상’, ‘을의 생존법’까지. 여느 때보다도 생존에 대해 다루는 책들은 넘쳐난다.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에서조차 정글 ‘생존’의 달인 김병만이 대세다. 그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만능해결사를 자처하며 바다 속으로 뛰어들거나 나무 위로 기어올라 기어코 생존의 근거를 마련하고 만다. 멤버들은 항상 “족장이라면 할 수 있어”, “역시 괜히 족장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비전 없는 진보세력

그러나 오늘도 악다구니를 하며 숨 가쁘게 살아가는 이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에겐 김병만처럼 믿음직한 ‘족장’도, 난맥상을 극복할 묘책도, 비전도 없다. 노동운동판에서 20여년을 ‘구른’ 존경받는 활동가들도 침묵으로 고개를 내젖기 시작한지 오래다. 소위 ‘진보세력’은 사분오열 갈라지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한때 잘나가던, 대중적인 진보정치인의 표상을 차지했던 이들은 근래 선거에서 모조리 패배했거나, 대중들로부터 천천히 잊혀지고 있거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처세술로 연명하고 있다.

방송국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일하는 한 친구는 고용주가 온갖 노동관계법들을 위반하며 자신을 부려먹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법의 힘보다는 자본의 힘이 세다는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체념하고 있다. 일이 재밌음에도 2년짜리 계약직 인생을 반복해야 하는 지금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면 더 꼬이기 전에 탈출하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정당이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세월호 참사 광화문 농성장에서 열린 어느 기도회에서 한 유족이 했다는 말이 뼈에 사무치게 박힌다. 그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진보진영에게 세월호 투쟁은 내내 무기력했다. 대규모 집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결합했는가를 떠나 두 보수정당 사이의 줄다리기만 쳐다보며 어떤 비전도 제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야권의 유일한 원내교섭단체인 새정치민주연합이 보인 행보 역시 절망적이었다. 일상적으로 안전을 위협 받는 한국사회 근본적 문제를 건드려보겠다는 것보단 자식 잃은 유가족들과 국민들의 피눈물 나는 요구를 무척이나 거추장스러운 민원을 처리하듯이 대했다.

집단적 해결이 사라진 자리에 선 각자도생의 길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삶의 곤경 앞에 ‘집단적인 문제 해결’의 창구로서의 사회운동, 혹은 정치의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각자도생하며 경쟁해서 살아남거나, 종교적인 위안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 때문인지 우리 상처받은 청년들에게 때로는 위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꾸짖기도 하는 빼어난 멘토들의 ‘강연’이 흥행가도를 달리기도 한다.

법륜스님은 요즘 전 세계 100여 개 도시를 순회하며 ‘세계 100회 강연’을 펼치고 있다. 종교를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진 한국인들의 열광적인 관심이 놀라울 정도다. 만약 한국의 사회운동에게 이만한 흡입력이 있었다면 지금보단 훨씬 더 많은 대안을 보여주며 성장하고 있지 않았을까 내심 부러움도 생긴다.

많은 청년들이 그에게 외롭고 우울하며 벅찬 자신의 삶에 대해 토로하고, 해법을 갈구한다. “입사한지 4개월 된 신입직원입니다. 아침에 회사를 가려고 하면 너무 괴롭고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계속 눈물이 나고 집에 올 때도 그냥 자신이 처량하기도 하고 가슴도 답답하고 너무 아프고 그래서 눈물도 나고 그럽니다.” 입사 직후 참혹한 근로 환경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한 젊은 노동자에게 법륜이 주는 해법은 간명하다. 모든 번민은 욕심에서 오는 것이니 욕심을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훌훌 떠나라는 것이다.

철학자 강신주는 조금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그는 종종 꾸짖는 말투로 상담자에게 ‘당당하게 주체로 서라’고 말한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는 “상담의 목적은 상대방을 나와 같은 주체로 세우는 것”이라며 사람들을 주체로 세우고 싶다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그러나 이는 법륜스님의 방식과 그리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한국사회에 비판적인 것도, 당당하게 훌훌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며 개인적 해법을 제시하는 것도 비슷하다.

노동권이 추락한 사회의 멘토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쿨하다. 우리 모두가 일을 하는 그 순간부터 마주하는 곤경에 대해, 더 바라는 것이 쓸데없는 욕심이니 포기하고 순응하거나 ‘탈주’하라는 것. 최근의 자기계발적 ‘인문학’의 흥행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모순들에 맞서 집단적인 해결의 의지를 상실하고 포기해버린지 오래다. 요컨대 ‘생존’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 되었다.

   
▲ 영화 <카트> 예고편 중.

노동과 삶에 대한 ‘공격’

오는 11월 13일 개봉하는 영화 <카트>는 지난 2007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형할인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소재로 다룬 노동영화다. 법정최저임금이 곧 한달 월급인 밑바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드라마틱하게 다루고 있다. 진실되고 빼어난 능력을 지닌 변호사나 정치인이 해결사가 되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힘 없는 자들이 집단적으로 뭉쳐 문제와 맞서 싸운다는 것이 여느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들과도 다르다. 쿨하게 직장을 때려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사람답게 살고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도 없었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집단적으로 뭉쳐 저항하고 자신들에게 계속 ‘노예’처럼 살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맞서 싸운다. 만약 이들 중 한 명이 유명한 멘토를 찾아 자신의 고뇌를 털어놨다면 어떤 답을 들었을까? 항상 그랬듯 개인적 차원의 탈출구를 제시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세에서 기세등등하게 우위를 확보한 새누리당. 자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사천리로 ‘민생법안’을 처리하겠다고 나섰다. 10월 2일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 등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내용을 뜯어보니 삶과 노동에 대한 무참한 ‘공격’이다. 휴일근로에 대한 가산임금을 축소하고, 법정 근로시간은 52시간(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에서 60시간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서비스,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 자동차 부품공장 노동자 등 최근 잇따르는 노동자들의 쟁의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의 개혁을 위협하고 있다는 재계 관계자의 칭얼거림이 끔찍이도 기만적인 이유다. 실질 임금은 추락하고 있는데 자본가들의 이윤은 계속해서 상승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런 칭얼거림이야말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잔혹한 공격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이미 교활한 방식으로 ‘계급투쟁’을 하고 있고, 일하는 사람들은 속수무책 당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운동, 흩어진 개인들이 전선 형성할 수 있는 ‘비전’ 제시할 때

어느 때보다 집단적인 저항으로서의 사회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 어쩌면 ‘생존’이라는 문제에 대한 집착 혹은 갈망은 우리가 마주한 문제가 ‘대중운동’을 통해 극복되는 경향이 쇠퇴하는 것과 비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처한 절박한 모순이 사회운동과 정치를 통해 극복되지 못한다면 각자도생하거나 탈출하는 것 말고 방법이 있겠는가.

“그런 정당 여기 있어요. 당신이 와서 가입하며 힘을 보태면 되지 왜 없다고 합니까?” 누군가는 이런 투정을 부릴지 모르는 일이다. 언론도 욕하고 몰라주는 사람들도 밉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문제를 사회적 모순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에게 서너개로 흩어진 진보정당들 중 어느 하나를 분명하게 고르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리 가망 있는 비전도 없는데 뭘 믿고 베팅해야 한단 말인가. 왜 그들에게 조차 그런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지, 사회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저항들을 담을 그릇은 왜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해 고민할 때다.

   
▲ 홍명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2014년 가을에서 2015년으로 넘어가는 이 시간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처럼 느껴진다. 민주노조운동에겐 ‘노동’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항을 규합해야 하는 숙제가 놓여있고, 진보정당에겐 다시금 힘 있게 재편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기회의 시간이, 나아가 전체 사회운동에게는 세월호 참사 이후 ‘내릴 수 없는 배’에 탄 한국사회를 향해 무기력하지 않게 대안을 제시해야하는 과제가 남겨져 있다.

그것이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생존’이라는 골치 아픈 질문이 사라지도록 하는 길이다. 그리고 정치가 복원되고 사회운동이 성장하는 딱 그만큼 우리들 각자의 삶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카운슬러 강신주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 그와 같은 상담하는 철학자가 필요없는,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주체적 문제를 마주하고 저항하는, 새로운 국면이 말이다.

홍명교 노동조합 활동가  myungkyo.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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