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음

1. ‘나아지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

종종 잊곤 하지만, 인류문명이 세운 체제의 탐욕으로 인해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이상기후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SF영화 속 상상과 유비는 이미 상상 가능한 것들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대중들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다룬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다른 어떤 이야기들보다도 스펙타클하고, 묵시론적이다. 이는 문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드러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 혹은 자본주의 체제는 너무나 어리석어서 지구는 그리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도. 그래서 자본주의라는 고장 난 폭주기관차는 어서 멈춰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백년 혹은 천년 쯤 후의 일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일희일비하는 감정의 파고에서 자유로워져 차분하게 살고 싶은 열망이 있다면 그 편이 속편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차분한 조언이 참으로 낭만적이고 도피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때 우린 존재하지 않거나, 지금보다 훨씬 ‘나아지는 것’이 불가능해진 세상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사진=영화 <인터스텔라> 공식 홈페이지)

2. 쿠퍼의 번뇌, 놀란의 딜레마

<인터스텔라>는 말 그대로 별과 별 사이의 관계, 모험에 대한 영화다. 불가피한, 과학에 기반하지만 운명적인 모험 말이다. 인류문명은 20세기의 탐욕과 ‘실수’로 인해 그리 머지않아 살기 불가능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어버렸다. 이는 쿠퍼의 ‘모험’이 반드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근거가 된다.

<다크나이트> 시리즈에서 이른바 20세기 자본주의 도시문명의 탐욕과 범죄들에 맞선 영웅서사, 악에 대한 분열적이며 비논리적인 해설을 보여준 바 있는(<‘다크나이트 라이즈’ 앞에서 방황하는 비평 : 악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계의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셉션>에서는 다층적인 내면의 세계를 비주얼화하더니 이번에는 우주를 향해 그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인간의 고통스러운 번뇌이고, 영웅적 자아의 딜레마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가 지닌 거대한 스케일과 비주얼은 관객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이미 SNS 상에선 관객들의 호평이 줄을 잇고 있다. 간혹 이야기의 매듭이 어색하다는 식의 아쉬움도 보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봤음을 고백하고 있다.

나 역시 오랜만에 흡입력 있는 SF영화를 봤다고 생각했다. 역시 헐리우드가 아니면 이런 규모있고, 매끄러운 SF영화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좋든 싫든 크리스토퍼 놀란이 탁월한 재능의 논쟁적인 감독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 (사진=영화 <인터스텔라> 공식 홈페이지)

3. 직조된 권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영화가 소재로 삼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따위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감독의 동생이자 훌륭한 각본가 조너선 놀란은 <인터스텔라>의 각본을 쓰기 위해 켈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4년 간 공부하기도 했고, 세계적으로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킵 손의 자문은 영화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것 자체로 제 나름의 교양 공부를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터스텔라>는 특수효과팀과 킵 손의 공동 연구로 블랙홀을 시각화하는데 성공했고 이는 논문으로도 발표될 것이라 한다.

얼마전 상하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우주를 통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물론,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한 영화이다. 모든 영화는 인간에 대한 것 아니던가. 그러나 사람들은 놀랍도록, 영화 속 인물들의 딜레마나 논쟁적인 선택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영화의 소재가 된 무수한 소재들에 대해 갑론을박 할 뿐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놀란이 바랬던 것처럼 아빠와 딸의 사랑에 대해 다룬 것이라 느끼기도 할 것이고, (놀란은 이 영화를 촬영하던 당시 ‘플로라의 편지’라는 가제를 썼다. 플로라는 그의 딸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 혹은 디스토피아 시대의 희망에 대한 영화라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진짜 “종말”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인 주체의 딜레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분히 마법적으로 해소된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미래의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다. 쿠퍼의 말처럼 ‘우리’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 진짜 ‘우리’ 자신일지언정 ‘5차원’의 세계를 제공한 것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이다. 지구상이었다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이를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적 수법이 ‘5차원’이라고 설정된 우주였기에,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이론물리학 상의 갖가지 교양들로 직조된 권위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5차원 공간에 함께 침투한 쿠퍼와 로봇 타스가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었는데 타스는 계속해서 이것이 미래의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라고 말했고, 쿠퍼는 이것이 ‘우리 자신’이 한 것이라 말했다. 우주의 ‘신’은 먼 미래의 누군가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 걸까? 우주 어딘가에 있을 문명적 존재를 찾아나가는 다른 SF영화들이 그랬듯 <인터스텔라> 역시 우주 자체의 영속성, 무한함을 바탕으로 신적인 신비성을 존재적 기반으로 삼는다.

▲ (사진=영화 <인터스텔라> 공식 홈페이지)

4. 버릴 것인가, 떠날 것인가

나는 <칠드런 오브 멘>이나 <클라우드 아틀라스>처럼 동시대의 우리에게 어떤 꿈틀거리는 긴장감을 주는 거대서사를 지닌 SF영화들을 좋아하지만, 어떤 SF영화들은 종종 위험하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여느 영적 존재가 그러했듯, <인터스텔라> 역시 양자택일의 문제를 던진다. 쿠퍼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절망적인 지구에 남을 것인지, 혹은 우주로의 모험을 떠날 것인지 선택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것은 이 영화가 세계, 혹은 관객을 향해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이기도 하다. 놀란 혹은 쿠퍼가 생각하기에 ‘모험하는 존재’였던 인류는 이제 떠날 것인가, 혹은 이곳에서 버티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인가. 항상 우주로 가고 싶었던 쿠퍼는 당연히 모험을 택한다.

그러나 이는 문제적이다. 버릴 것인가, 혹은 떠날 것인가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던져졌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마지막 순간, 어떤 절망과 분노 속에서 ‘지금-여기’에서 다른 대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머피는 다분히 운명적으로 답을 찾아버린다. 실은 이 땅에 남겨지게 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컸던 모든 인류에게 남겨진 진정한 숙제는 영화 속에서는 제대로 시도되지 않는다. 존재론적으로 던져진 질문은 그저 운명적으로 선택되었을 뿐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한 혐의가 강해지는 이유다.

길고 스펙타클한 영화는 끝났고, 웜홀이나 블랙홀 따위의 흥미로운 이야기꺼리와 어떤 따뜻한 신비로움이 우리의 오감을 잠시 배회한다. 그리고 모험을 떠난 이들에게 던졌던 ‘질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요즘 나는 대체로 거대서사의 해피엔딩을 지지해왔지만 이런 방식의 해피엔딩은 우리가 안고 있던 절망감을 잠시 잊게 해주는 대신 딜레마적인 현실의 질문까지 망각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 (사진=영화 <인터스텔라> 공식 홈페이지)

5. 신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여전히도 우리는 다른 미래를 택할 자유와 권리를 갖고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물론 상황은 여의치 않다. 다시 우리에게 그 질문이 던져진다면, 무엇이 답이어야 할까? 영화가 주는 훌륭한 체험, 뛰어난 비주얼적 구현, 이야기로서의 흥미진진함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영화관에서 빠져나온 뒤의 우리에게는 여전히 던져져야 하는 질문이다. 영리하게도 놀란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훌륭하게 컨트롤했고 최종적인 순간에서는 ‘5차원’이라는 신이 나타나 인류를 구원해주었다.

쿠퍼는 모든 문제의 답은 모험, 그리고 ‘사랑’이라는, 꽤나 훌륭하고, 그리 부정하기 쉽지 않은 모호한 답안을 제출했다. 인류구원의 모험을 하고 싶다는 개인의 욕망에서 출발해 거대서사를 넘어선 우주까지 나아갔고 우주의 영험한 힘에 의해 구원받고 ‘부활’(영화 속 모험의 이름은 ‘나사로 프로젝트’) 후에는 이내 다시 아버지와 딸의 사랑이 답이었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신앙의 장으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놀란 식의 성경읽기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형식의 ‘신전’에는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지구에 남아 자식들을 보살피고 지구 안의 대안을 마련해나가는 ‘미래’ 역시 사랑의 또 다른 답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구태여 이런 질문을 던질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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