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거세당하는 시대의 ‘불임’에 대해 쓰려다가 손을 내려놨다. 얼마 전 나는 굴지의 보험사로부터 수천만원 짜리 ‘테러’를 당했다. 4년 전 여름 서울 교외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에서 처리된 보험 처리액을 모두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작년에 있었던 대법원의 어떤 판례가 나의 수혜 사례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보험사가 구상권 청구를 한 것이었다. 어떤 경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통장이 압류됐고 몇 푼 없던 전재산이 사라져버렸다. 이리하여 나는, 금융 거래가 불가능해진, 소위 ‘신용 없는 사람’ 쯤이 되었다.

파산

이른 아침 바람이 차가웠다. 어떻게 살 것인가. 시내버스와 김밥집에서 틀어놓은 TV뉴스에선 빚과 파산에 대한 이야기들이 숨겨놓은 일기장처럼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 사람은 응당 자존감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나 역시 멀쩡할 리 없다. 오만가지 생각이 닥쳐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운동을 포기해야할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부터 이 세상의 모든 억압적 풍경까지 세상에 대한 까닭 모를 분노가 불쑥불쑥 솟아오른다. 내 삶을 장악하고 좌지우지하는 세계에 대한 원한과 분노, 냉소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젓고 다녔다.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다시 회귀해 일상을 뒤흔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4년도 더 지난 ‘과거’였다. 인생에게 거대한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통장 따위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고작해야 우리나라에 있는 통장 계좌 2억5천만개 중 2개가 사라졌을 뿐이다. 지난 10일 발표된 한국은행의 「2014년 상반기 은행수신 동향」 자료에 따르면 2014년 6월말 현재 우리나라 기업과 개인이 예금은행에 넣어둔 5억원 초과 거액계좌의 총액은 약 526조8천억원에 이른다. 대다수 사람들의 빚은 늘고 일상은 팍팍해졌지만 부유한 이들이 한푼두푼 모아둔 통장의 총액은 끊임없이 늘고 있다. 대관절 금융 자본의 기세가 이리 삐까뻔쩍할진데 ‘압류’ 따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밥알을 꾸역꾸역 씹으며, 마음속으로 무기한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노동자들의 힘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리모델링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사는 한 지불 능력을 회복하지 못하기도 하겠지만, 저마다의 구체적인 삶들을 우리의 불안을 매개로 장사하는 이들에게 저당 잡힐 순 없지 않은가.

테러

이런 가운데 우리는 원한 가득한 키보드의 언어로 냉소와 혐오로 점철된 세계를 구성한 이들의 테러를 보고 있다. 이를 선도적으로 감행한 어느 열아홉 청년은 스스로 ‘전사’가 되어 파국적인 실천을 감행했다. 한 재벌2세는 대중교통수단으로서의 항공기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자기 소유물이자 노예처럼 다뤄 대중의 공분을 사기도 했고, 지배권력의 숨은 실세로 알려져 있던 한 남자는 마침내 번듯한 얼굴로 세상에 나와 “불장난에 춤춘 사람들 다 밝혀질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스펙타클한 외형을 띄고 업로드 된 뉴스들 행간마다 원한과 분노, 냉소가 뒤죽박죽 섞여져 흘러나왔다.

▲ 10일 오후 8시 20분께 전북 익산시 신동성당에서 열린 신은미·황선 씨의 토크 콘서트에서 고교 3년생 오모(18)군이 인화성 물질이 든 냄비를 가방 안에서 꺼내 불을 붙인 뒤 연단 쪽으로 향하다가 다른 관객에 의해 제지됐다. 이 사고로 매캐한 연기가 나면서 관객 200여명이 긴급 대피했다. (사진=연합뉴스)

짐짓 영웅이 될 심산으로 테러를 자행한 오씨로서는 제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보는 세계는 예전에 우리가 ‘보편’이라 믿고 있던 어떤 사회의 통념 같은 것을 결여하고 있다. ‘견해가 다른 상대와 논쟁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사실 확인을 거쳐야 한다’, ‘입장이 다르다고 하여 물리적인 폭력을 통해 위협을 가해선 안 된다’와 같은 상식 말이다. 이런 것을 결여한 그로써는 어쩌면 제 나름의 ‘정의’를 실현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오씨와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테러를 윤봉길의 의거에 비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의 ‘정의’는 정상적인 사회국가에서 용인하기 어려운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할 때, 파국 자체를 넘어선 오늘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도 해명할 수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알던 상식들로 연결된 ‘그 사회’는 이미 먼지처럼 바스라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행위만큼만 할 수 있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모두들 자유나 도덕 따위를 부르짖지만 실제로 우리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채로 강박 따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뉴스 속 등장인물들은 일관되게 폐쇄적이다. 그들은 실제로는 권력의 실세로 움직이며 모든 것을 제어하지만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고, 대중교통수단과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사적인 소유물처럼 취급하며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들을 깡그리 무시하기도 하며, 자신이 수용한 비뚤어진 프레임에서 어긋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해 “죽여도 좋다"고 생각하는 니힐리스트들이다.

뷸렌트 디켄(Bülent Diken)에 따르면 니힐리즘은 “세계가 목표, 통합성 혹은 의미를 상실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는 것”에 그 원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폐쇄적인 파괴자들 역시 자신의 이념이 세계 속에 존재하지 않거나 실현되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세계 자체를 거부하는 존재일 수 있다. 텅 비어버린 사회, 그래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허무

디켄은 니힐리즘 혹은 니힐리스트들을 세 가지 형태로 나눈다. 부정적 니힐리즘으로서 ‘원한 품은 노예’, 수동적 니힐리즘으로서의 ‘냉소하는 잉여’, 급진적 니힐리즘으로서 ‘분노하는 테러리스트’가 그것이다. 다소 논란을 일으킬 수 있음을 감안하고 이야기하자면 이런 니힐리즘적 주체들은 외양만 다를 뿐 소위 ‘깨어있는 시민’, ‘진보 운동’에도 상당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주자 출신 첫 국회의원 이자스민의 긍정적인 면모까지 혐오하는 진보-니힐리스트들의 사이버 실천, 아고라에 올라오는 허무맹랑한 음모론들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테러라는 끔찍한 행위까지는 저지르지 않았지만 우리는 종종 원한을 품은 노예이기도 하고 때때로 분노하는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쩔 땐 냉소하는 잉여의 얼굴로 나타나 몰락하는 사회의 모든 것에 대해 비관하고 냉소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를 파괴하는 뉴스들에 대해 도덕적 힐난을 보내기를 아끼지 않는다. 인터넷 뉴스 댓글 창에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격분들이 우박처럼 쏟아진다. 그 안에는 물론 권력자들 멋대로 작동되는 사회를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타당한 분노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외침들은 앙상한 비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외침들은 파괴적인 운동을 배양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그리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니힐리스트를 양산하는 파국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백신으로 바이러스를 치료한 후 더 강한 바이러스가 나타나듯 내성만 키우기 십상이다. 문제는 그들이 왜 그렇게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개인의 파산 이후 나는 애써 거시적으로 생각해보려 노력하고 있다. (분명 쉽지 않다.) 나 개인의 문제로만 여기다보면 사소하게 시작해서 찌질하게 끝나는 일상의 모든 것은 허무해져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의 우리가 파국적인 금융위기에 직면했던 2012년의 그리스라면 어땠어야 했을까? 혹은 모든 것이 후퇴하기 시작한 97년 IMF 외환위기가 다시 돌아온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민주정부’는 재벌들의 파산은 보상해주고 노동자들에겐 해고가 자유롭고 불안정한 일자리도 마음껏 양산되는 헬게이트를 열어주었다. 권력자들은 대다수 국민의 삶을 추락으로 내몰면서 각종 경제지표는 올려놓는 성과 아닌 ‘성과’를 이뤄냈다. 우리는 미약했고, 파국에 맞선 용기있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모든 것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모순은 희망”

아주 천천히 숨을 죄어오며 찾아온 이번 위기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주목하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있는 절대적이고도 지배적인 가치들에 대해 의구심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그럼으로 인해 그것들을 다시 배열하고 구성해내지 않으면 ‘희망’이란 결코 요원한 것이지 않을까?

서동진이 <변증법의 낮잠>에서 인용한 브레히트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겐 그것들을 지금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즉, “모순은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변화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되돌아오는 것, 모든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것을 가능케 했던 무엇”이다. 서동진은 이를 자본주의의 적대라 칭하며 동시에 정치가 자리해야 할 장소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전락한 정치를 되살려 냄으로써” 서로를 배척하는 시선들로 나누어진, 세계를 보는 관점을 ‘발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이렇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보험사의 ‘공격’에 의해 파산 당했지만, 실은 나는 그들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정신적으로 심대한 잘못, 테러나 다름없는 공격을 저질렀음이 명백하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빚을 갚고 압류 상태를 풀 능력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역행해 테러에 대한 빚을 갚아주어야 할 권리가 있다. 가난한 채무자들이 넘치는 나라, 한쪽에선 523조원을 쌓아두고 다른 한 쪽에선 개인소득 1천만원인 사람이 절반에 달하는 나라에서 우리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지금 파국 앞의 허무에 빠지지 않고 파산된 자들로서의 복수, 세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발명해야 하는 이유다. 이건 황산테러 가해자 오씨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파국’이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넋 놓고 허무에 이용당해선 안 된다.

cf.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이건범,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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