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여자친구가 그랬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세상에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수 있지? 아 진짜… 이 나라 뜨고 싶다…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진짜…

SNS상에는 익산에서 황산테러를 벌인 오군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인터넷에 올린 글(‘출소했다. Terrorists’; 지난 2월 5일 일베에 올렸으나 삭제됨.)이나 <‘일베 오뎅’에 펑펑 눈물 쏟은 세월호 희생자 오빠>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오고 있었다. 상상초월. 할 말이 없었다. 열아홉 오군은 별 다른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되레 자신을 ‘오열사’라고 칭해주고 후원금까지 모아 격려해준 극우주의자들의 편지를 계면쩍게 공개하며 인정욕구를 드러냈다.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생각하지말자. 그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아.” 그러나 안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다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일베와 인터넷만 엉망일까? 폭격이 지나간 도시처럼 폐허가 된 풍경이 곳곳에 널려있다. 취업률에 따라 점수를 매기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전공과 학과는 서슴지 않고 삭제해버리는 대학, 공정보도의 기본을 망각하고 사회공공성에 기여하는 의제설정 역할을 망각한 언론, 국립영화학교의 졸업영화제까지 심의하겠다는 영화진흥위원회, 왕년에 빛나는 시절을 구가했지만 이제는 정치적인 영화들에 대해 온갖 개입에서 자유롭지 않은 영화제들, 약육강식의 정글이 된 중학교 교실, 선박회사, 종교, 심지어는 노동조합과 시민단체까지…. 냉소와 회의를 느끼고 “이민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얼마 전 한 방송국 기자와 식사를 했다. 실은 맛있는 고기를 배불리 얻어먹었다. 당연히도 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그 방송국에서 심적으로 얼마나 괴로운지, 괴이해진 시스템이 지금껏 그곳에서 긍지를 갖고 일하던 많은 구성원들의 자존감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그 방송국에서 노동조합 활동이 다시 활성화되고 그 기자처럼 문제의식을 느끼는 젊은 구성원들이 자주 만나기라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위로와 용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잘 되지 않는다니. 그저, 가장 끔찍한 곳에서도 얻을 수 있는 배움이 있지 않겠느냐, 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버티고 버티면서 때를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아마 고기값만 축내고, 별 도움은 안됐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사회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진단과 분석을 내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니 나의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다”며 부정할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는 “저 썩은 보수주의자들, 권력자들 때문”이라며 실컷 욕지거리를 내뱉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이래저래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 모든 게 끝났어. 아무 소용도 없다”며 회의하고 대체 그런 정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냉소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갖가지 현상들에 대한 대다수의 반응들이 이 스펙트럼을 벗어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 일베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조롱한 사진을 올린 가해자의 어머니는 최근 절절한 사과를 통해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절망의 시대, 희망과 대안이 잘 보이지 않는 시대에 우리들의 ‘아비투스’도 변하고 있다. 아비투스란 사회적 위치나 정치적인 분위기, 교육 환경, 계급적인 위상에 따라 후천적으로 길러진 삶의 양태, 세계를 대하는 태도, 성향 따위를 일컫는다. 사회적인 관계들을 파괴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단지 어떤 악마적 인물이 등장으로 봐선 안 된다. 이 사회의 구조와 여러 모순들이 어떤 사람이 그런 태도를 갖게끔 했다고 이해하고, 그가 지나쳐온 모순과 구조적 폭력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정신적인 상처, 절망과 냉소주의 따위도 극복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호흡은 우리의 미디어 환경이나 관계맺음의 방식들과는 그다지 걸맞지 않다. 우리는 아주 빠르게 오르내리는 뉴스 속에 정신을 차릴 수 없고, 행간마다 온갖 권력관계가 개입되어 있다. 한국일보 회장 측과 친하다는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가 결국 고꾸라져도 이완구의 망측한 멘탈보다 더 촘촘한 구조가 이완구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끊임없는 경쟁과 배제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우리의 사소한 마주침들은 좀처럼 우애롭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파국에 처한 삶의 자화상을 응시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진지한 질문을 던진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웅진지식하우스)는 이처럼 난맥상, 함정에 빠진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버티며 살아갈 것인지’ 묻는다. 결론적으로 그는 ‘두더지가 되자’고 말하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읽지 않아도 가슴에 박히는 슬로건이었다. 우리가 두더지가 되어 땅 속에서 하나둘씩 모여 우리 자신을 지키며 작은 모임들을 만들고, 길고 멀리 내다보며 삶을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우리에게 다시 ‘우리의 시간’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땅 위에서 다시 만나자는 그런 얘기인 것 같다.

보태자면 ‘어떤 두더지’가 되느냐, 두더지가 되어 어떻게 싸울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일 게다. 나는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땅을 파고 또 파는 두더지, 그래서 땅 위로 올라올 때도 일사분란하고 조직적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돕는 두더지, 다른 세계가 가능하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분석하고 상상할 수 있는 두더지, 그리고 더 자주 용기 내어 땅 위를 응시하고 오늘의 위치에 대해 잘 간파할 수 있는 두더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은 두더지가 되고 마는 것보다 두더지도 되지 못해 땅 위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두더지가 된다면 그런 땅 밖으로 쉴 틈 없이 몰래 나오며, 더 많은 두더지들 모아내는 두더지가 되어야 타이밍이 와도 제대로 붙어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남아있는 소수 두더지들이 아무리 옳은 말을 외친다고 한들 땅 위의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남기지 못한다면, 두더지가 되어 버티는 삶은 무용할는지도 모른다. 사회가 고꾸라지고 몰락하고 있다면, 어딘가 심각한 균열의 지점, 반대로 새로운 정치와 관계맺음의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단지 무시해버리거나 욕지거리를 내뱉는 대신, 두더지의 마음으로 질기고 치밀하게 소리 없이 절망하고 있는 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버텨보자,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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