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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 동안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가 허용된다면…[옥인동 샤우팅]우리, 치안-스테이트가 낳은 괴물들에 대해
홍명교 노동조합 활동가 | 승인 2014.09.29 08:18

그리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저예산영화 <더 퍼지>는 오늘날 경찰국가화의 이면에 숨은 ‘제도화된’ 아노미(anomie)를 보여주는 한편의 우화다.

2022년 3월 미국. 실업율은 1% 이하로 떨어지고 범죄 역시 줄었으며 폭력사건 역시 현저하게 줄었다.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 미합중국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이후의 일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1년에 단 하룻밤 12시간 동안은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가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이름하여 ‘제거의 날’인 그날의 밤이 오면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무기를 소지하고 평소 혐오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텔레비전 속 전문가들은 인간은 본래 폭력적이며 그러한 본능은 결코 숨길 수 없기에 계속해서 이러한 욕구를 터뜨려주는 것이 매우 효율적이라고 떠들어댄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런 이벤트는 사회안전망이 미비한 가난한 시민들의 숫자를 줄이기 때문에 나머지 364일 동안만큼은 사적인 치안망을 구축한 시민권자들의 사회가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 영화 <더 퍼지>의 한 장면. (사진=다음 영화 정보)

샌딘(에단 호크 분) 가족은 이 기괴한 이벤트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저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에 순응하며 어떤 반감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게다가 샌딘은 고급주택가에 사는 중산층들이 갖고 있는 불안을 활용해 값비싼 ‘보안시스템’을 판매하는 잘나가는 영업사원이기도 하다. 고급저택에 사는 이웃들에게 새 보안시스템을 팔아 생긴 풍족한 재력으로 100%에 가까운 보안시스템을 갖춘 저택에 살고 있으니 걱정할 일도 없는 게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어딘가 일이 잘못됐다. 제거의 밤,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가난한 흑인을 어리고 순진한 아들이 도와주면서부터다. 그를 쫓던 부유한 고교생들이 광기어린 눈빛으로 자신들의 놀이감을 내놓으라고 ‘정중하게’ 협박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것이다.

밤 사이 공격은 잔혹하게 지속된다. 처음에는 낯선 흑인이 찾아와 평화를 깨뜨렸고, 다음에는 잔혹무도한 고등학생들이, 그리곤 평소 잘 나가는 샌딘을 질시하던 이웃들이 찾아온 것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가난한 자, 사회적으로 열등한 자에 대한 혐오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쓸모없는 사람들은 죽어버려도 그만이거니와, 오히려 그편이 사회 전체의 평화와 공격적 욕망을 푸는데 용이해보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치안과 정부의 역할은 이날 밤만큼은 ‘제도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부유하고 공격적인 이들을 위한 무정부상태가 열리는 것이다. 공격적인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며 문을 꽁꽁 잠궈두는 이들조차 이 시스템의 조용한 조력자에 불과하다. 침묵하고 순응함으로써 시스템이 지속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기의 발호

지난 주말 몇몇의 사람들이 해방정국 시기 발호해 무수한 노동자, 청년, 지식인 등에게 일상적인 테러를 일삼았던 ‘서북청년단’을 재결성하겠다며 나타나서는 도심에 걸린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노란리본을 모두 떼어버리겠다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들은 실제로 서울광장의 노란 리본을 ‘제거’하려는 퍼포먼스를 취하기도 했다.

한편 ‘일베’의 일부 유저들은 어느 때보다 가시화된 형태로 그들이 상정한 ‘빨갱이’라는 대상에 대해 주로 일베 사이트,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해 공격을 가하고 있다. 얼마전엔 광화문에 출몰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퍼포먼스를 상연하기도 했다.

이런 행위들은 몇 가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일단 상식을 넘어선 행동들을 세상 밖에서 ‘미디어를 통해’ 드러내면서 극우파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더불어 극단적 입장을 보다 선호하는 미디어의 덕을 톡톡히 보며 과잉대표되며, 이내는 대중들로 하여금 사태 자체에 대한 관심을 종식시키도록 만든다. 발생하는 상황 자체가 역겹고 기괴하기에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또 이들은 선도적으로 나선 자신들처럼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한다. 미디어를 통해 이 요청을 접한 소심했던 극우주의자들은 용기를 얻을 것이다.

   
▲ 서북청년단. (사진=오마이뉴스)

최근 우리 사회는 이런 광기어린 발호에 대해 무기력했다. 일부 진보적인 네티즌들은 이런 폭력적 극우파들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바로 출동해 대거리를 하기도 하고, SNS 상에서 인간말종이라는 등 욕설을 퍼붓기도 하지만, 이런 산발적이며 즉자적인 대처가 그리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상황을 더 증폭시킴으로써 판을 키우는 모양새다.

언론 역시 판을 키워주는데 한 몫하고 있다. “파시즘이 오고 있다”(허핑턴포스트)며 섣불리 호들갑을 떨거나 감정 가득 실은 힐난들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논란은 증폭되고 있다. 저들이 원하는 바대로 말이다. 과연 행동적 극우파에 대한 정처 잃은 분노들이 상황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을지 의구심을 던져봐야 한다.

물론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한다고 해서 저들이 광기를 멈출 리가 만무하다. 크고 작은 분란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망하고 답답할 때 우리는 다시 좀 더 멀리 떨어져서 우리가 미로의 어디쯤에 떨어져 헤매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어떤 국제적 졸부는 서른다섯에도 여전히 가난하다면 그 사람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자신있게 헛소릴 하기도 했다. 약자에 대한 힐난과 결기어린 조소가 느껴진다. 실은 이런 자수성가한 조롱이 우리에게 낯선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 대통령에게서, 무수한 보수 정치인들에게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모욕 당해왔다. 그리고 이런 모욕과 조롱은 어느새 우리 사회를 감싸고 지배하고 있다.

우리들의 학창시절을 지배하는 왕따 문화나 폭력적인 군대 문화는 약하고 ‘모난 돌’에 대한 집단적이며 반지성적인 혐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런면에서 왕따와 군대문화를 이어 ‘일베’ 혹은 서북청년단의 발호, 그리고 역으로 강화되는 치안국가의 거대한 겉모습은 곧 우리가 마주할 ‘제도화된 아노미’의 단초들이다.

미지의 공포

어두운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당신이 골목 어귀를 돌아설 때, 누군가 검은 그림자가 2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쫓아오고 있다. 그는 비틀거리고 있고, 남자이며, 너덜거리는 옷을 입고 있다. 이따금 가로등 아래를 스쳐 노란빛이 그를 비출 때면 그의 덥수룩한 수염과 험상궂은 얼굴도 드러난다. 그는 이 시대의 이방인, 몫 없는 자, 잠재적 ‘주폭’, 외부자, 일용직 노동자, 영원한 타자이다. 아마도 당신의 발걸음은 빨라질 것이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흉악하고 끔찍한 범죄자이기보다는 하루의 고된 노동에 지치고 삶과 일에 대한 어떤 희망도 품기 어려운 조건에서 살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우린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차라리 미디어가 그가 어떤 존재일 것인지에 대해 너무 자주 전해주기 때문에 그런 공포의 경고라도 믿지 않을 수 없다. 이방인에 대한 미지의 공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Who Sings the Nation-State?>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치안-스테이트(policing-state)란 치안국가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것이 유발하는 사회적 상황, 대중 심리적 상태를 뜻한다고 지칭한 바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체제 이래 치안-스테이트(policing state)가 강화되고 있다. 집과 일터를 잃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사회의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용역깡패에 의해 공장에서 내쫓기거나, 집에서 쫓겨나야 한다. 집은 철거될 것이고, 일터는 모조리 하청 고용으로 전환될 것이다

   
▲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 주해연 옮김/ 산책자 펴냄/ 2008년 7월

이렇게 몫 없는 자들이 치안-스테이트 바깥으로 쫓겨나고 있는 동시에, 다른 한 편에서는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치안-스테이트의 ‘합의’를 구성한다. 너무나도 불안해진 이 사회의 ‘안보’를 위해서는 인권을 침해하거나 자유를 억압하더라도 공권력을 투입한다거나 치안에 대한 강조를 통해 질서를 확보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를테면 2009년 1월의 용산에서 우리는 국가권력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집을 빼앗긴 자들’의 시민권을 강탈하는지 또렷한 영상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이는 그해 여름 평택에서 반복되었다. 일거에 일터를 잃은 700여명의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특공대 진압작전을 통해 ‘치안’과 ‘질서’의 폭거가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새 ‘상식’이 된 이 치안-스테이트는 1980년대 영국에서 마가렛 대처의 신자유주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가 밖이나 교외의 빈민촌에서 온 밑바닥 사람들을 노동과 사회로부터 끌어냄으로써 전면적인 퇴행, 후퇴하는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내부의 적, 공공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권위주의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영국 광산 파업이 패배한 이후 쫓겨난 노동자들이 어떻게 해서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추방 당하는지 드러나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에서는 국가 바깥의 ‘외부자’들을 경계하고 일종의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함으로써 치안-스테이트가 만들어진다. 빨갱이의 위협이라든지, 무슬림들의 테러 위협 같은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일종의 반공전선, 혹은 애국적 공조가 이루어진다.

한국에서는 이런 치안-스테이트의 통치가 두 가지 양상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기괴한 변태 싸이코 독재자로서의 ‘김정일’의 얼굴로 표상된 북한이라는 영원한 타자가 에얼리언처럼 ‘국가’를 위협하고 있고, 동시에 내부에는 종북세력과 주폭, 홈리스, 전과자들, 이주노동자, 공산주의자들, 민노총, 전철연 같은 “질서파괴세력들”이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치안-스테이트의 퇴행적 근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치안-스테이트가 낳은 괴물들

우리가 발 딛고 숨 쉬는 땅이 치안-스테이트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자신도 괴물이 되어갔다. 사태를 음모론적으로만 보거나, 대통령 개인의 덕성에 대한 문제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상황을 극복할 지혜와 실천을 모으는 것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을 경쟁으로 내몰고 삶을 옥죄고 괴롭히는 지배자들 대신, 자신보다 더 약한 자들을 향해 비난과 공격의 칼날을 세우기 시작했을까.

그들이 원하는 효과를 내도록 끌려 다녀선 안 된다. 전선을 지배자들 쪽으로 옮겨야 한다. 대체 왜, 무엇을 위해, 누가 우리 모두를 배제에 대한 공포와 포섭에 대한 판타지로 내모는지 모두가 되묻기 시작했을 때, 광기는 멈추지 않을까?

<더 퍼지>의 샌든씨 가족들은 실수할 뻔 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침착하게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세상이 그리 하도록 내몬다고 해도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야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길을 잘못된 세상이 원하는 방식대로 ‘적대자들’을 향해 칼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 자체를 멈추고 전선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광기를 배양하는 숙주가 치안-스테이트의 촘촘한 경찰버스 뒤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했듯 “치안은 정치를 부정한다”면 이의 훌륭한 사례들은 이 시대에 넘치고 흐른다. 정치는 점점 더 혐오의 대상, 소수의 엘리트 정치인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으로 전락하고, 치안은 모두가 공분을 다해 수호해야 할 것으로 부상한다. 골목마다 CCTV가 늘어나고 치안과 질서유지를 강조하는 국가권력의 선전문구는 늘어가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안정적으로 일하거나 주거할 수 있는 권리는 사라지고 있고, 불안은 증폭되고 있다. 지배권력이 말하는 ‘안전’이 몫 없는 자들인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우리는 이미 야경국가를 살고 있다. 국가권력은 공공의 삶의 조건이나 환경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경찰력을 강화하고 체제에 대한 불안과 위협을 조기 차단하고 제거할 수 있는 ‘야경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지고 있다. 하기에 치안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안전보다는 경제위기나 정당정치의 몰락으로 위협받고 있는 지배체제 자체의 ‘보안’을 위해서만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몇 년 전 여의도 한복판 새누리당사 앞에선 ‘묻지마 범죄’로 명명된 해질녘의 칼부림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불과 십수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수백명의 경찰기동대는 눈앞에서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농성을 지속하고 있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틀어막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어서 달려가 저 칼부림 난동을 해결하라고 소리쳤지만 스스로 어찌할 줄 몰라 방황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피를 흘리고 있는 시민에게 달려가 옷을 찢어 지혈하는 응급조치를 한 것은 어느 해고노동자였다. 오늘날 ‘경찰’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진정한 공동선이 어느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드러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 홍명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강화되는 치안-스테이트에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무기력하게 모든 걸 관조하고 있어야 하는가? 때로는 그런 것도 제법 가치 있는 행동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과도 거리를 둔 채 응시하기에 우린 너무 깊숙이 사회의 부품으로 박혀 있다.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척 살 수 있는 인간이란 저 깊은 산 속의 도사나 아무런 통신 시설도 구비되지 않은 무인도의 낭인이 아니고서야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모종의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어떤 맹목적인 지침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치안-스테이트에 맞서 몫 없는 자들의 공동선을 찾고 새로운 전망 속에서 묵묵히 대항전을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는 정치적 상상력과 가난한-노동하는-시민들의 계급적인 단결이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우리는 깊은 밤 어두운 길을 함께 걷는 친구가 되어 테러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치안-스테이트를 무력하게 해야만 한다.

홍명교 노동조합 활동가  myungkyo.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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