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은 나를 뿌리치고 나에게 마구 덤벼들고 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악한 결심을 품고 사나운 힘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는 밉다. 흰 고래가 그 사악한 자의 사신(使臣)이든, 그 장본인이든 어쨌든 나는 그 놈을 죽여 없애서 원한을 풀 작정이다.” - 허먼 멜빌 <모비딕>

삼성 홍보팀은 펄펄 살아있다고 우기고 있지만 정확히 이건희 회장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증명된 바는 없다. 종종 나오는 언론 보도도 삼성에서 뿌리는 보도자료에 근거에 받아쓴 것일 뿐이다. 어찌됐든 그는 한국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자본가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새해 첫 일간지 1면 광고마다 가득한 삼성 마크, ‘삼성이 하면 업계 표준이 된다’는 말은 이런 막대한 영향력을 증명한다. 그는 다른 혐의들은 요리조리 잘 피해나가고도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을 통한 경영 세습 공작의 혐의는 벗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기소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을 선고 받았다.

짜고 치는 고스톱

굴욕적이게도 이 판결은 빠른 시일 안에 특별사면 처분을 받게 된다. 며칠 전 <한겨레>는 2009년 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 대한 단독적인 특별사면을 감행한 법무부 사면심사위원회 회의록 일부를 단독으로 보도했다. 당시 끝까지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하지 않던 법무부의 행태에 맞선 정보공개청구의 결과다.

회의 내용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따로 없을 정도로 가관이다. <한겨레>의 정보공개청구로 드러난 이 회의록은 당시 사면심사위에 참여한 검찰과 변호사 등 법조계 인사들이 사면의 합당성을 심사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음을 드러낸다.

▲한겨레 2015년 1월 7일자 8면

200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법무부에 모인 아홉 명의 사면심사위원들은 죄다 ‘삼성맨’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이귀남은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자본의 온갖 부당거래와 탈세를 폭로하면서 거명한 대표적인 삼성 장학생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이날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례 없는 1인 특별사면을 논의했고 5일 뒤인 29일 이명박 대통령은 이건희 1인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이는 SK 최태원 회장과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맞이한 오늘의 거울쌍이다. 둘은 삼성이 하면 업계 표준이 된다는 정설을 믿고 따르다 드물게 봉변을 당했다.

“유전감형, 무전만기”

법무부는 최근 SK그룹 최태원 회장 가석방을 위해 애쓰고 있다. 2년 전 그는 수백억 원의 계열사 돈을 빼돌려 펀드에 투자한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아직 형기의 절반도 채우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마이너스 통장이 늘어나고 실질임금이 줄어드는 와중에도 그는 공공의 것인 회사를 제 것 마냥 주무르며 배임과 횡령을 저질렀다. 4년도 지나치게 짧다고 느껴질 정도다. 건설자본에 의해 먹힌 내 가게, 내 생존권 지키고 싶다고 하소연하며 철탑에 올라간 철거민에게도 4년, 5년 꽉 채워 석방하는 법무부 아닌가. “유전감형, 무전만기”(부자는 쉽게 가석방되고, 가난뱅이는 형기를 꽉 채워야 석방된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정치권의 재벌 석방캠페인을 신랄하게 비판한 박찬종 변호사의 촌철살인 코멘트가 틀리지 않다.

최태원 회장은 횡령과 배임으로 감옥에 갇힌 와중에도 노동자들을 처참하게 밟아왔다. 그는 SK브로드밴드 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초고속 인터넷 SK브로드밴드 상품을 설치하고 또 판매해온 노동자들을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노예처럼 부렸다. 대한항공 조현아씨의 파렴치와도 그리 다르지 않다. 회사 돈을 횡령하고 감옥에 간 후에도 비정규직 양산, 노동착취의 주범이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잘못됐다고 말해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짓이다.

정치인들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최태원 회장의 가석방을 촉구하고 있는 가운데, 서울 종로1가에 있는 SK빌딩 4층은 수백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함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들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이자 최 회장 부인인 노소영씨가 운영하는 미술관에 진입해 몇 시간동안 농성하며 다단계 하도급 구조 근절과 고용안정, 처우개선 등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이 농성을 풀자마자 경찰은 이들을 대거 연행했고, 이 중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최태원 회장 가석방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윤리 없는 ‘윤리경영’

한편 지금은 구속되어있는 대한항공의 전 부사장 조현아씨는 이건희 회장의 특별사면 과정 법조계가 수족처럼 움직였던 것을 따라했다. 그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검찰 최고위직 출신의 인사들이 검찰에 “구속은 과하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하며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국내 굴지의 로펌 고문변호사나 대기업 사외이사 등으로 있는 이 법조계 영감들은 서울서부지검과 대검찰청 등에 전화를 걸어 “그런 식으로 너무 몰아치면 검찰에 역풍이 분다”며 후배들을 훈계했다고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 2013년 12월 27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 입국장을 나서는 모습. 오른쪽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조현아 전 부사장은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사과'했지만, 이내 그것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이중적인 태도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었다.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재벌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면되어왔던 사회에서 이런 꼴을 당하니 말이다.

SK 최태원 회장은 이건희의 ‘노동자 죽이기’ 행태를 따라했고, 한진 조현아 전 부사장은 노동자와 법을 농락하는 법을 따라했다. SK는 윤리경영과 ‘이해관계자의 행복’(SUPEX) 따위를 주창했지만 이해관계자인 노동자들을 열악한 노동조건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시켰다. 윤리 없는 ‘윤리경영’, 자본만을 위한 ‘행복’이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 대한항공은 “임직원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회사의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겠다”고 공언해왔지만 직원의 존엄성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경영을 해왔음이 온 세상에 드러났다.

장그래 죽이는 ‘장그래법’

이미 모두 알게 되었다시피 이 나라의 법은 부자들을 위한 것이지 평범하게 일하고 근근히 먹고 사는 우리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고용노동부는 ‘장그래’를 위한 법이라며 35세 이상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내놓았지만 이는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이 될 공산이 크다.

정부가 바라는 대로 탄력근로가 확대되면 기업은 오히려 연장노동수당 지급을 회피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성수기와 비수기, 물량의 많고 적음이 존재하는 많은 업종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떨어뜨리고 고용불안을 심화시킬 뿐이다. 파견의 대상과 업종을 확대하는 것 역시 비정규직을 늘리고 불안정 노동을 심화시킨다. 파견업체들의 중간착취를 심화시키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 없는 윤리경영, 행복 없는 행복경영이 만연한 가운데 장그래 죽이는 장그래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법무부와 정치인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우리 사회 최대 규모의 사기, 배임 등 범죄행각을 벌인 자본가들을 사면시키거나 가석방, 무죄 방면시켜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짓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자 했던 그들의 진의를 알 수 있다. 바로 우리들의 삶, 우리들의 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재벌들을 석방시키고 법이나 사회적 통념 따위를 조롱해왔던 진짜 의도 말이다.

한편 업계의 ‘표준’을 세운 삼성은 불법적인 경영 세습을 통해 이른바 ‘이재용 시대’를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건희 회장 아들 이재용 부회장은 ‘비정규직 양산과 해고가 자유로운 나라’라는 중대한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오늘도 ‘스마트하게’ 뛰고 있다. 그가 휘두르는 망나니의 칼날이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등으로 노동자들을 팔아넘기는 오늘, 삼성전자서비스 진주센터와 마산센터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오랜 일터, 폐업된 센터 앞에서 생존의 위협을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스마트 경영’이라는 거짓을 통해 발화된 진실이었던 것이다.

좀처럼 이런 전복된 언어의 세계를 극복하긴 어려워 보인다. 단결과 연대라는, 너무나도 타당해서 종종 감흥을 잃기도 하는 고여 있는 언어체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반대자의 위치에서 버릇처럼 쏟아내는 언어를 넘어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스피박은 ‘서발턴’(언로를 잃은 피억압대중)은 말할 수 없다며 책임의 윤리를 요청했고, 랑시에르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 혹은 공유를 통해 ‘몫 없는 자들’의 정치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에게로 돌아가 자본주의 분석의 근본을 회복하고 대안 사회의 이념을 구축하고 정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민주노총의 첫 직선제 지도부는 ‘단 한번의 승리’가 절실하다고 부르짖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위치에서 감행할 수 있는, 우리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실천들을 찾고 전복된 세계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을 꾸준히 모아나가는 것이다. 진취적이고 순발력 있는 대응, 긍정적인 성격이란 의미가 있다는 청양의 해에는 그런 노력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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