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나도 한때 지독하리만치 그들을 혐오했지. 맨 처음 대학에 들어가 이라크전쟁 파병반대 시위나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 투쟁 등 이런저런 토픽을 갖고 활동하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빌어먹을, 저 사람들이 우리에게 똥을 줬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11년 전 대학사회는 지금보다는 조금 나았을는지 몰라도 이미 ‘위기론’이 나온지 10년 쯤 지난 후였다. 논쟁이 사라져갔고, 하나둘씩 학생운동 조직들이 너른 정치의 들판으로 가자며 깃발을 내리기 시작했으며, 여전히도 ‘고루하게’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을 읽고 있는 학생운동 활동가, 혹은 그들의 친구들을 향해 조롱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련도 망하고 사회주의도 다 망했는데 멍청하게 저게 뭐하는 짓이야? 특히, 노무현을 지지하는, 자칭 쿨하고 리버럴한 아이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나는 점점 거꾸로 갔다. 이를테면 열여덟의 나는 노사모 창립행사가 있던 2000년 6월 대전 즈음에서 고 노무현과 악수를 했었는데 몇 년 후 대학에 가서는 학살전쟁 파병하는 노무현 정권, 비정규직 양산하는 파견법 개악 추진하고 노동조합 파괴하는 노무현 정권 퇴진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때쯤이었다. “너도 386처럼 정치하려고 그러지?” 우리는 적어도 수백 번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어딜 가나, 내가 봐도 진짜 쫌 재수 없는, 386세대 명사들이 설쳐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저는 학생 때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섰고요. 한때 경도된 사상을 갖고 있긴 했지만 지금은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음… 어… 동북아 금융허브시대에 발맞추어….”

혹은 우리는 이런 이야기도 무수히 많이 들었다.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꾼다니? 지금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 포스터모던시대라고!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꾼다니까!” 교수들도, 친구들도, 동아리 선배도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우리는 점점 취직하기 어려워지고 가난해졌고 우리 주위엔 여전히 386세대의 유령들이 떠돌아다녔다. 어딜 가나 반정치, 비정치적 이데올로그들의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어딜 가나 ‘정치엘리트를 꿈꾸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학생운동의 반등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말들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발자국만 더 거리로, 공장으로 나아가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두 눈 밟히고 아무리 생각해도 캄캄한 우리 미래의 막막함 때문이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데 어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IMF 외환위기 이후 도래한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권의 20년은 우리 모두의 삶을 후퇴시키고 있다.

사람들이 현실 사회주의는 몰락했고 사회변혁운동의 프로젝트는 실패했다며 냉소를 소곤거릴 때에도, 그 실패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마가렛 대처의 말처럼 “다른 세계는 불가능하다”라거나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선언으로 대체할 순 없었다.

▲ <시사인> 누리집에서 갈무리.

얼마 전 <시사인>의 이종태 기자는 “그대를 이제는 내가 보낸다”라는, 다소 거창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작별인사를 보낸 바 있다. 이 인사는 “한때 어쭙잖은 ‘빨갱이’”였던 그가 낭만적이고 순진하게 여겼던 노동자계급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80년대의 386세대는, 혹은 그 자신은 노동자계급에 대해 대단히 기괴한 환상을 품었던 ‘상처받은’ 낭만주의자들에 다름 아니다. 자기연민이 강하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의적인 낭만화가 낳은 것이었을 게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식의 자기고백에 대해 무수히 들은 바 있다. 보수정당 정치인이 된 386세대 정치인들이나 대기업 관리자, 변호사나 지식인들로부터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헌데 그의 이런 몽매한 ‘낭만’은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현실 사회주의가 겪은 갖가지 오류의 역사에 대한 냉소와 결합되어 갑작스레 어떤 냉소의 지점으로 점프한다.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에 대한 비아냥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낭만을 품고 냉소로 나아간 과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가 겪었던 것처럼 모두가 이상향이 실패하고 좌절하며 냉소하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운동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방향타를 잃어버렸다. 고작해야 자본이나 절대권력이라는 거악에 대한 반정립적 태도나 조롱만 난무할 뿐이다. 이는 노동조합운동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민주노조운동이 어떠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기억, 혹은 앞으로 노동조합운동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허겁지겁 주어진 문제들을 하나하나 겨우겨우 해치우기에도 버거울 뿐이다.

오늘날 많은 정규직 노동조합이 민주노조다운 모습을 잃어버렸다. 이종태가 열거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례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있고, 때로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좌절들 속에서도 섣불리 한 세대가 모든 것을 겪고 난 후 초역사적인 태도로 선언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이 그런 시대를 살았건 그렇지 않았건 대체 알게 뭐란 말인가. 다음 세대에게는 또 그 다음의 몫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이 품었던 낭만과 판타지 한 줌 없이 한파 속에서 ‘버티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버티는 삶’이다. 나는 그것이 아주 소중하고, 우스꽝스럽게 취급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이 보낸 시대 전체에 대한 주인의식도 강하고 그것에 대해 아주 쉽게 취급해버리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나는 그것이 지독한 자기연민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눈곱만큼의 측은한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태도는 오늘날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손쉽게 요리당하는 맛깔 좋은 재료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를테면 하태경이나 김영환 같은 극우주의자들은 저 김일성주의자들이 “얼마나 꼴통들인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증언하는 ‘시대의 증인’처럼 등장했다. 유시민이나 김대호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참으로 영리한, “운동권(빨갱이, 혹은 좌파)이 얼마나 합리적이지 못한가”를 증명할 수 있는 말발 좋은 지식인들이다. 그들이 정치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사막 같은 세상에서 얼마나 파시즘적 주장을 하는지, 혹은 진보주의자의 외양을 띄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동조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력은 추락하고 있다. 우리 시대 노동자들의 삶 역시 끝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잘 버텨나가려면 우리는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이나 민주노조운동의 부활, 여전히 ‘대안은 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의 존립과 구체적인 전술에 대해 더 자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만연한 비아냥거림, 조롱, 냉소 같은 발화의 형식들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곤 한다.

현실운동의 오류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고 현실에서의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현상적으로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관심하지만,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하고 함께 싸우는 사례들,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던 반면교사의 사례들 역시 무수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문제는 우리들의 나약한 ‘도덕’이 아니라, 여느 대중들이 그랬듯 공히 공유하게 된 모종의 보신주의, 각자도생으로 내모는 냉혹한 일터의 조건이 만들어낸 대중이데올로기의 우경화이기 때문이다.

이종태가 여전히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 ‘도덕주의적’으로 평가하는 한, 그의 한숨과 냉소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노동자계급을 대상으로서 낭만화하고 사랑하라고 한 적 없지 않은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고작해야 시시껄렁하게 숨 쉬며 사는, 우리 모두와 별로 다르지 않은, 우리 사회의 대중이데올로기에서 딱 반발자국만 앞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대중이데올로기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은, 그러나 가끔 파업 집회 정도는 나갈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란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생활인인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분석하고 어떻게 파열구를 만드느냐가 세상이 좀 더 나아졌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이 고민해야할 문제 아닌가.

대중이데올로기는 항상 변화하고 노동자계급의 통념 역시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이종태의 냉소 역시 역사적이다. 화자는 역사적인데 대상에 대해 초역사적으로 응시하는 것은 그다지 타당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아주 빤한 이야기로 돌아가게 되는데, 여전히도 중요한 것은 ‘실천’이라는 사실이다. 정규직들이 이기적이라는 이야기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희망 갖고 싸우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대상이 아닌가? 오히려 그 반대다. 혹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마주쳐 연대하는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낯간지럽기만 한 소린가? 또는, 그렇지 못한 현실 속에서 보다 과학적이고 세밀하게 취재하고 연구해서 새로운 방법론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르게 실험하고 새롭게 도전하는 길은 언제나 열려있고 그건 다음 세대의 몫이다.

▲ 홍명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어떤 많은 경력의 활동가들은 종종 집회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역사란 ‘기어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권태를 느낄 수밖에 없다. 첫째는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수사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고, 둘째는 역사라는 대타자에 대한 진화론적 확신은 너무 자주 우리에게 배반감을 안겨줬었기 때문이다. 역사란 끝 모르고 영원히 후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대타자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여기의 우리가 다시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길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시대 아닌가.

요즘 종종 백년 전 발간됐다는 어느 책의 짧은 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되새길수록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세계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찾아야 한다면? ‘복된 시대’의 지도를 회복해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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