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트>의 종반부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더 마트'의 노동자들의 투쟁이 갖은 탄압과 회유, 생계고로 위기에 쳐하자 분에 못 이긴 ‘노조위원장' 김강우가 홀로 본사 빌딩 앞에 가서 선전물을 나누어주는 장면입니다. 이때 본사 인사팀 혹은 상황실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출근하는 본사 사무직 직원들을 향해 갖은 거짓말을 내뱉습니다.

“저 사람 거짓말쟁이예요. 아줌마들 구워 삶아서 노조위원장 된 사람이예요.”,
“이 사람말만 믿다가 아주머니들 집안 다 파탄났어요 지금!”

어디선가 보던 풍경입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도 보았고, 오늘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 일상의 어떤 순간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입니다. 물론 이런 장면은 뉴스에 나오지 않지만요. 또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웹툰 <송곳> 지난 호(시즌3 14화)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소개된 바 있습니다.

사측의 갖은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쟁의권이 없는 상태에서 뭐든 행동을 해야 했던 이수인 등 노동조합은 준법투쟁을 결의하고 8시간 근무가 끝나기 무섭게 퇴근하는 ‘칼퇴근’ 투쟁을 시도합니다. 이에 사측 인사담당자와 경비들이 막아선 거죠. 8시간 일하면 퇴근하는 게 당연하지 않았던 사업장에서 이루어진 불법적이고 비상식적인 처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조합이 없거나 노조 힘이 약한 직장에선 비일비재한 일이죠. 당연히도 노동자들은 퇴근을 시도합니다.

“아저씨 나 알죠? 척만 해요. 척만.” 가장 좋은 대처죠. 그들 중에는 그것이 옳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 ‘사람’인 사람 말이죠. 그런데 영 인간이 아닌,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도 있습니다. 한 여성 조합원이 길을 비키라며 조금 밀자 그는 일부러, 과잉된 제스쳐로 넘어지더니 뭔가 번쩍,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스스로 머리를 벽에 박습니다.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겠죠. 안 그래도 이수인은 다음화인 15화에서 매우 당황한, 스스로 자해하면서 까지 노동자들을 협박하고 탄압하는 저 ‘부장’이라는 사람이 대체 왜 저렇게 까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도무지 그는 노조가 성장하든 말든 자기 자리에 대한 위협은 받지 않을텐데 말이죠. 왜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냐는 것이죠. 우리도 항상 그게 궁금했습니다.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혹은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유독 미치광이처럼 탄압하는 몇몇 관리자들이 대체 왜 저렇게 까지 하는지.

지난 1월 14일(수) 오전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빌딩 안에선 그룹사장단 회의가 열리고, 밖에선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기자회견과 삼성테크윈 노동자들의 상경 투쟁이 있던 날이었죠. 여지없이 삼성은 덩치가 좋은 경비들과 그들을 위에서 지휘하는 상황실 직원들을 배치해놨었죠.

한창 염호석 열사 투쟁으로 노숙농성 중이었던 작년 6월 11일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그들입니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집회나 기자회견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는 행동을 하루 종일 반복합니다.

그날은 진주센터와 마산센터의 위장폐업으로 수십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린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기자회견을 진행했었습니다. 지난해 해운대센터 등 3개 센터에 자행됐다가 단협 체결과 함께 해결된 위장폐업 문제가 한 차원 높고, 치밀한 차원에서 개시된 것입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삼성테크윈지회 노동자 100여명의 매각 철회 집회가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보도를 통해 자신들이 수십년간 다니던 회사가 매각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삼성테크윈 노동자들이 갖게된 회사, 삼성에 대한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진행되던 중 누군가 주위를 맴돌며 몰래 영상 촬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습니다. 이들은 소형 핸디캠을 쥐고 집회 장소 외곽 모퉁이에 조용히 서서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경찰도 아니었고, 당사자들도, 지나가던 시민도 아니었습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사측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서 온 누구이며, 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느냐고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묵묵부답 대답하지 않다가, 계속해서 묻는 저에게 자기가 누구인가는 물론이고 왜 노동자들의 집회하는 모습을 도촬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며 줄행랑쳤습니다. 이 사람을 A라고 칩시다. ‘스마트’한 A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의 곁에는 다른 한 명의 도촬맨 B가 있었습니다.

오른쪽 모자 쓴 사람이 도촬맨 B입니다. (B의 왼쪽은 서초동에 가면 자주 만날 수 있는 덩치 좋은 C입니다.) 그는 주머니에 또 다른 캠코더를 쥐고 있다가 “아저씨 거기서 뭐 하시는거예요?”라고 묻는 저를 보고 이내 캠코더를 집어넣고, 주위를 서성였습니다. 이쯤하면 눈치 채고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습니다. 5분 사이 다시 나타난 그는 프로답지 못하게도 빤히 보이는 기둥 뒤에 서서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하다 싶더군요. 언뜻 봐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남짓의 제 또래 남자였습니다. 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요? 물론, 먹고 살라고 하는거겠죠? 거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도촬을 구경하기만 할 순 없었습니다. 점잖게 그의 카메라를 잡고 도촬 중단을 요구하며 데이터 포맷을 요구했습니다.

시끌벅쩍해지고 분란이 생기져 저 멀리서 지켜보던 서초경찰서 정보관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사태의 원인제공자인 도촬맨 B에게 데이터를 포맷하고 그냥 가시라고 얘기했고, 내내 버티던 B는 캠코더를 포맷했습니다. 자기 카메라 작동법도 잘 몰라서 직접 해드렸죠. B는 흥분했는지 씩씩 거리며 ‘지인’ D와 함께 유유히, 삼성본관 옆 카페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카페 앞에는 매우 낯익은 남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집회가 열리면 항상 주위를 배회하며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 감시 등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삼성쪽 사람들” 혹은 더 구체적으로 “상황실 직원들”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명료하게 드러난 이들 넷을 E, F, G, H라고 치겠습니다. 서열순으로 H가 가장 높습니다.

B와 D는 이 남자들과 긴밀한 관계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합류한 방향이나, 그들에게 말을 시키는 모습 등을 보면 그러합니다. 일단 E가 B와 D에게 다가가 말을 겁니다. 그러자 G가 먼저 옷을 잡아당기며 눈치를 주고, F가 제쪽을 가리키면서 말리죠. 이런 가운데 H는 계속 묵묵히, 침착하게, 전체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프로답다고 할 수 있겠죠?

그는 뭐가 그렇게 죄송한지 ‘허리 굽혀’ D, E, F에게 인사합니다. 도촬맨이었던 그는 정작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조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 분들에게는 뭔가 잘못한 일을 한 모양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로서 참 안쓰러웠습니다. 제가 대신해서라도 이렇게 따지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입니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E, F, G, H가 쫌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B가 저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삿대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한다 싶었습니다. 잘못한 점을 지적하고 시정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엉뚱한 대상에게 격노하는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때 E부터 H까지 모두가 저를 쳐다봅니다. 그들은 저를 알겠죠. 우리는 지난 2013년 겨울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의 비정규직 에어컨기사 고 최종범 님이 노조탄압에 항거하며 돌아가셨을때도, 지난해 여름 고 염호석 님이 돌아가셔서 그의 동료 1천여명이 40여일간 노숙농성을 할 때에도 이 주위를 서성이며 우리를 지켜봤으니까요.

얼마 전 삼성이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사찰해온 사실이 드러난 바 있습니다. 물론 방송3사를 포함해 보수언론들은 이를 보도하지도 않았죠. 삼성은 ‘삼성물산’의 해당 관리자들 안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인냥 꼬리 자르기로 어물쩍 넘어 갔고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이 방안에는 삼성에스원 직원도 있었고, 심지어 금속노조 삼성테크윈지회 임원들의 명단을 공유하고 이들이 어디로 이동해서 무엇을 하려 하는지에 대한 상황도 공유되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행위들이 이뤄지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던 저로써는 그리 놀랍게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21세기가 된 지 1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삼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가지 방식으로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노조 탄압과 감시, 사찰 등의 일을 해오고 있으니까요.

▲경향신문 2014년 3월 14일자 1면 머리기사

하지만 이런 일에 익숙해져서도, 비판하기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다짐합니다. 알다시피 언론들은 ‘삼성’에 대한 비판 기사를 쓸 때 유독 높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그만큼 빡빡하기도 하고 무서운 상대니까 그렇겠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현아를 비판하는 일은 무척 쉬워도 삼성 이재용의 더 큰 불법과 탄압, ‘세련된 갑질’을 비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높은 기준들로는 잘못된 삼성의 방향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언론들이 계속 모른 척하고 무시하더라도 더 크게, 더 빈번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쳐야 합니다.

지난 3월 7일 삼성그룹 서초사옥 앞에는 2천7백여 명의 삼성 노동자들이 모였습니다. ‘삼성’이라서 믿고 젊은 날의 노동을 바쳤던 노동자들이 배신과 착취에 분노해 진실을 위한 투쟁에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주말 28~29일. 1박2일 노숙투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삼성 공화국이나 다름 없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적에 맞선 싸움에 당당하게 나선 다윗들의 투쟁에 연대를 호소합니다. 그래야 저 악랄함과 몰상식의 공고한 성벽도 조금씩 허물어지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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