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은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흥행기록을 갈아치웠을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기록이다. 독점적인 배급 시장이 위협하는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 모순 역시 짚고 넘어갈 문제다. 그러나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관객들은 일방적으로 이 영화를 선택했다. 많은 논평이 나왔고 대체로 ‘리더십 부재의 시대’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말이 가장 많았다. 이순신과 같은 카리스마있고 헌신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영화 <명량> 예고편 갈무리.

반면 <한겨레> 이재훈 기자는 <명량>이 졸작에 불과하다는 진중권의 입장에 힘을 실어줬다. 이 영화의 주된 관객인 40대의 자유주의적 개인들에겐 <명량> 속에서 위기를 대신 해결해주는 ‘영웅’ 이순신이 갈망하던 대상이었으니 이리 환호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이는 표면적으로 <명량>에 대한 주된 논평들에 비해 급진적인 견해다. 그러나 관객 대중이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감정이입하지 않고 ‘갈망의 대상’으로서만 바라본다고 가정하는 것 역시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다. 오히려 우린 철저하게 이순신의 시야에서 영화를 본 것일지도 모른다. 처절하고 잔혹한 경쟁사회에 살면서 ‘12척만 갖고서’ 몰려오는 300척과 맞서 싸우는 ‘을’의 처지에 공감하지 않을 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이리저리 따져봐도 <명량>이 대흥행을 기록한 사건에 대해 말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영화의 바깥으로 나와 ‘이순신에 열광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순신이 나오는 영화’의 의미는 더 깊게 다가올 수 있다. <칼의 노래>의 저자인 소설가 김훈은 “12척으로 이기겠다며 설치지들 말라”며 촌철살인의 감상평을 남긴 바 있다. 남은 배가 12척밖에 없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현대의 영웅이니, 오늘날 명량전투의 사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23전 23승의 비밀

진짜 문제적인 것은 이순신이 23번 전투해 23번 모두 이겼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쯤 되면 초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광화문광장에 삐죽 솟은 못생긴 동상도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도 23전 23승의 비밀을 알아낸 건 아닌데, 답은 의외로 단순한 사실에 있다. 이순신은 결코 ‘지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그가 왜 몇 번이고 반복된 선조 임금의 전투명령을 고집스럽게 거부했는가에 대해 떠올려봐야 한다. 질 게 빤한 싸움은 안 하겠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태도였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 거대자본이라는 어마무시한 적과 나날이 깨지고 있는 우리는 <손자병법>의 기본도 지키지 못한다. 오히려 오늘날 사회운동은 무의식적으로 ‘지는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를 살펴보면 노동자운동은 무수히 지면서 성장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제한적인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일의 승리’라는 장구한 비전을 간직했기에 성립 가능한 믿음이었다. 윤상원 열사가 오월광주의 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하겠다 다짐할 때의 ‘비전’ 말이다. 약속된 미래가 없다면 보다 전략적이어야 한다.

▲ 영화 <신의 한수> 예고편 갈무리.

‘신의 한 수’는 없다

바둑에서 판도를 뒤집는 묘수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말한다. 정치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요컨대 박지원이나 서청원처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눈치가 빠른 정치꾼들은 ‘신의 한수를 뒀다’는 식의 찬사를 받곤 한다. 상황 자체를 뒤집는 묘수로 정치적 위기를 탈출하고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만드는 묘기를 부리곤 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몇 년간 소위 진보좌파진영은 주체적 조건으로나 객관적인 정세 조건으로나 녹록치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여러 노동조합이나 진보정당이 처한 상황이나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운동의 현실만 보더라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안에서는 내부 분열로 주체들이 갈라지고, 밖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심각한 사건조차 제대로 책임지고 돌파하지 못하는 실력 부재를 드러내고 있는 총체적 위기다. 절박하리만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제는 바둑이나 진보정치, 노동자운동에서 ‘신의 한 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탁월한 묘수조차도 그 수에 이르기 전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나오는 것이다. 꼼수와 묘수는 다르다. 꼼수는 상대가 안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묘수는 피할 수 없다. 그건 정치나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사회운동은 너무 자주 ‘신의 한 수’라는 신화를 신뢰해왔다. 아마도 촛불정세라는 ‘대박’이 터지곤 했던 그 즈음부터였을 게다. 노동조합 등으로 조직된 대중을 기대하기보다 무차별적이며 기적적으로 모이는 ‘개인들’을 찬양했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운동의 모습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에게도 정치적 경험이 쌓이면서 ‘촛불’에 대한 기대는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패배의 기억을 안고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신의 한 수 따위가 있을리 없다.

영화 <신의 한수>의 오프닝 시퀀스에 나오는 바둑판은 가짜다. 나무로 만든 바둑판 위에 바둑알들이 놓여있고 배우들은 긴장한 듯 바둑 두는 흉내를 내며 하나하나 돌을 놓는다. 그러나 그 판은 실제로는 ‘바둑’이 아니다. 아마도 이 장면을 촬영할 때 시간에 쫓겼는지 전문가의 자문을 받을 시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소품 스태프들이 허겁지겁 그림 그리듯 바둑알들을 깔았을 게 분명하다. 수백 개의 바둑알이 얼기설기 이곳저곳에 놓여있을 뿐이다.

가짜 바둑판을 엎어버리자

▲ 홍명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오늘 우리의 현실은 참혹하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조롱하는 극우파 집회에서 “빨갱이들”, “지옥에나 떨어져라” 따위의 광적 조롱들이 쏟아지고, 지배권력은 노동자들을 좀 더 착취하기 위해 모든 제도와 안전장치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나 삶으로 돌아오면 쌓인 빚과 밀린 알바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 소박한 저항과 뼈저린 패배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거리. 이런 악조건에서 어딘가 잘못된 것 같지만 선뜻 행동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을 두고 마냥 비겁하다고만 말할 순 없을 게다. 선거를 통한 변화의 시도(‘정권교체’, 혹은 진보정당의 의회진출)도, 대중투쟁(2009년 광우병 촛불시위)도 가담해봤지만 모조리 ‘실패’로 각인되지 않았는가. 우리에겐 다른 기억이 필요하다.

사회운동이 ‘제공’하는 스토리는 매력을 잃어버렸다. 우리 모두 가짜 바둑을 둔 지 오래인지도 모르겠다. 판을 엎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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