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10․29 결정을 보며, 해고 위협에 시달리는 이 나라에 사는 모든 노동자는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아마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며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언론법에 관한 헌재 결정의 말만 바꾸면, 해고의 절차가 아무리 위법이라 해도 해고는 효력이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우리 아이가 이렇게 물을까 겁난다."아빠, 우리 반 반장 선거에서 대리투표가 있었는데, 그래도 뽑힌 반장은 반장이야?""아니야, 세상에 그런게 어딨니?"라는 내 대답에 아이가 "에이, 헌법재판소가 언론법에 대해 그랬다는데"라고 말하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말이다.해고 위협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헌재 결정을 본다면?헌법재판관들에게 묻고 싶다. 국회법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법인가? 헌법과 무관
다시, 헌법재판소이다. 최근 몇 년간의 어떤 사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모든 것은 헌법재판관 9명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리게 됐다. 서로 끝까지 대립하여 단 한 순간도 만나지 않을 2개의 사회적 입장이 헌재 재판관 9명의 인식과 판단에 완전히 포박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 현 체제에서, 헌재는 누가 뭐래도 완성자이자 가장 확실한 종결자로 존재한다. 원론적으론 완전히 그렇고, 현실적으로도 대부분 그랬다. 상상 가능한 수준에서 이제 미디어법의 운명은 '언론법 권한쟁의'에 대한 헌재의 유무효 판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유효와 무효 사이의 중간적 결정은 없고, 헌재는 만장일치가 아니더라도 타협적 결론을 생산하지 않는 회로이다. 언론법이라고 하는 소우주 곳곳에 퍼져있던, 사회 제 세
기자가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권력자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드물다. 좋은 기자도 그만큼 희귀하다. 언론사에 들어가면, 첫 6개월을 ‘수습 기자’로 지낸다. 경찰서 3~4곳을 맡아 기자 훈련을 시작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후반의 신참 기자는 경찰서장과 ‘대당’한다. 수습 기자의 첫 임무는 서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일이라는 우스개가 이 바닥에 있다. 서장을 당당히 대할 수 있어야 ‘출입처’인 경찰서를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기자들에겐 있다.‘원론적으로’ 경찰 취재 경험은 좋은 기자의 자양분이 된다. 힘 있는 자는 경찰서에 가지 않는다. 힘없는 자들이 피해자 또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앞에 줄지어 선다. 10여 년 전 겨울, 수습 기자가 되어 처음 경찰서 형
당신이 우연히 참사 현장을 목격한다면 사람을 구하겠는가,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겠는가? 초보 기자 시절, 선배로부터 한 번쯤 들어보는 물음이다. 전형적인 딜레마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인들은 아주 깔끔하게 ‘선택’하는 것을 배우고, 이를 내면화한다. “인명 구조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취재·보도는 당신 말고 할 사람이 없다.” (지금도 똑같은 말을 주워섬기는 것은 시대착오다. 참사현장에는 이미 수많은 ‘폰카’가 있을 테니까.)모든 물음에는 가치가 전제돼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온전히 신뢰하면 안 되는 몇 가지 이유 가운데는 ‘가치중립적인 물음은 없다’는 것도 포함된다.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가 ‘문제 설정’을 강조한 것도, 거칠게 풀이하면, 물음 안에 이미 답이 구조화돼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붉은악마와 노사모 출연이 다른 한국 사회의 모습을 예고하는 호들갑의 징후였다면, 2000년 중반에 찾아온 몇 개의 사건들은 그 예고가 마냥 낭만적인 것만은 아닐 것임을 입증하는 경고였다. 2000년대 중반 연달아 일어난 사건들은 향후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적 문법으로 작동할 지를 미리 알려준 굵직한 것들의 연속이었다. 근대의 패러다임인 '민족'이 여전히 포스트 모던의 미학인 영화를 지배함을 일깨워 준 '디워(D-WAR)' 논쟁이 그랬고, 자본과 그 밖의 취약한 것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폭로한 삼성 X파일 사건도 중요한 한 가지였다. 그리고 황우석 사태가 있었다. 황우석 사태, 그것은 날조 된 신화였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어느 순간부터 과학이 아니었다. 그의 연구는 ‘난치병의
어제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불만(?)을 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안중근 의사를 둘러싼 세간의 논쟁을 둘러보다보면 1909년 이후 한국 근현대사 100년이 얼마나 숨가쁘게 흘러왔는지를 알 수 있는 듯해 서글프기까지 하다.테러리즘 논쟁 논쟁 하나는 이른바 ‘테러리스트’ 논쟁이다. 이것은 안중근에게만 관련된 것은 아닌데, 뉴라이트 논자들이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테러리스트’로 격하시킨다는 불만과 이에 대한 비판이 팽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 논쟁의 지형이 살짝 의아하다. 양쪽 모두 공히 “테러리스트는 나쁜 것이다.”는 전제 조건 하에 논의를 진행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판단을 공유하면서 뉴라이트는 독립투사의 아우
KBS노조가 발표한 KBS 사장의 ‘5대 조건 5대 불가’를 보는 순간, 가장 궁금한 건 그런 후보가 누가 있나 하는 거였다. KBS노조가 그런 후보를 마음 속에 품고 있는지 궁금했고, 딱히 노조가 아니더라도 그런 후보의 출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KBS노조는 말할 것도 없이 KBS 구성원의 대표성을 갖는 이해집단이다. 사장 후보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할 일은 아니다.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으면 그에 걸맞는 후보를 거론할 수 있고 응당 거론하는 것이 마땅하다. ‘KBS 사장을 직선제로 선출하자’(PD저널.10월20일)는 듣보잡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게임의 법칙이 이미 정해진 상황에서 게임의 룰을 뒤집는 이야기를 한 거니 KBS 이해당사자들한테는 얼마나 생뚱맞았을
필자에게 지난 12년은 거의 텅 빈 시간이다. 99년 가을이 올 무렵 중국으로 건너갔고, 지난해 봄이 오기 전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요상하게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마치 마술처럼 지난 10년여를 도려낸 듯하다. 그때도 경제위기가 오고, 정권이 바뀌고 했는데 당시와 여야와 바뀌었다지만 큰 차이가 없다. 또 어릴 적부터 해태를 응원하던 나는 9차례에 걸쳐 배가 터지게 해태의 우승을 즐겼는데, 돌아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태의 후신인 ‘기아 타이거즈’가 우승을 했다. 그때의 포만감 때문인지 기아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7차전 9회말 끝내기 홈런은 만끽하기에 너무나 즐거운 꺼리였다. 당시 첫 직장인 ‘미디어오늘’에 들어가니 선배들은 나한테 프레스센터의 자료실에 가서 ‘국
스티브 비코라는 생소한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의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이 연출하고 덴젤 워싱턴과 케빈 클라인이 출연한 (1987)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저 악명 높은 인종차별국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해방운동에 대해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대부분 철모를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아파르트헤이트’와 ‘넬슨 만델라’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1993년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고 이듬해 치러진 남아공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 역사상 흑인으로는 처음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수백 년을 이어온 길고 지루한 백인 지배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니 남아공의 흑인해방운동 하면 누구나 만델라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다. 지금
행정안전부가 공무원노조의 민중의례를 금지했다. 아니 금지에서 더 나아가 실제 민중의례를 한 이들에게 징계를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통합공무원 노조는 지난 23일 충북 옥천에서 핵심간부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간부토론회 행사에서 민중의례를 진행했다고 한다. 행안부는 이에 대해 ‘참석자들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재미있는 건 행안부가 징계의 근거로 내놓은 게 ‘공무원의 품위유지 의무’라는 거다. 한 마디로 군색하다. 어지간히 궁하긴 궁했나 보다. 숱한 인사청문회에서 고위 공무원 후보자들의 위장전입, 탈세, 부동산 투기, 병역면제 등이 도마 위에 오를 때 정부에서 누구도 그들의 품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작년 국정감사장에서 욕설을 내뱉은 한 장관이 공무원의 품위유지
또 다시 미니 총선 운운하는 선거가 몇 군데서 벌어지고 있다. 별 관심도 없는 선거 이야기를 왜 하느냐 질책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거철만 되면 반복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신성한 주권행사니 뭐니 하는 캠페인을 보고, 다들 자신이 잘났다고 떠드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국민을 거저 투표하는 기계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뭐란 말인가? 민주주의는 인민의 정치인가민주주의(Democracy)는 모두 다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동했다. Democracy는 고대 그리스어 Demokratia에서 연원했으며, Demokratia는 Demos(인민/평민)와 Kratia(통치/ 지배)의 합성어이다. 말 그대로 옮기면, 인민의 통치 또는 평민의 지배를 의미한다.
Ⅰ후배 A의 마지막 근무 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지금 책상정리중이란다.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이 근무처를 옮겨 1년 남짓 된 어느 날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하기야 계약조건도 없는 자리였으니 해지라는 표현도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아침회의석상에서 거취가 논의되어 그날로 해고 비슷한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어차피 진이 빠질대로 빠진 상태라 더 이상 그 조직에 눈꼽 만큼의 애정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왔다고 했다. 마지막 날을 보낸 소감을 물었더니 그냥 덤덤하단다. 직원들끼리 송별식도 없는 후배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거였다.“밥이나 먹을까”“그럴까…….”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되짚어 보았다. 그때 직장을 옮기지 말았어야 했나? 이런 질문은
"불법체류자, 외노자들 때문에 서민들이 직간접적으로 피해 받고 생계를 위협받습니다. 3D 기피? 불체자들 때문에 임금하락이 일어나서 기피하는 겁니다. 불법체류자를 동조하는 짓은 한국 수백만 서민을 못살게 구는 겁니다. 불체자는 외국에 대부분 송금하고 일끝나면 외국으로 가면 그만이지만 이 땅의 서민은 어떻게 살까요? 그들의 범죄들은 또한 흉악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독거노인, 불쌍한 아이들, 학대받는 동물들, 한국에 진짜 보호해야 될 존재들은 따로 있습니다. 여론을 보세요. 전국민이 불체자와 그 동조단체들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동의하시나요?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당장 내일이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쫓겨날지도 모를 한 사람을 위해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졌고, 위의 글은 그 카페에 '추방마땅'이란 아이디로 어
봄이 오면 농민들은 깊은 시름에 잠긴다. 올해는 무엇을 심어야 낭패를 보지 않을까 싶어서 이다. 하지만 해답이 없다. 값싼 수입 농산물에 밀려 무엇을 심어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도 쌀은 정부수매가 있어 견딜만했는데 그것마저 없어져 쌀농사도 마음 놓고 지을 수 없다. 올해도 쌀값 폭락으로 돈 가뭄에 시달린 농심은 시꺼멓게 타들어간다. 그러나 농민이 주인인 농협은 딴 세상마냥 돈 벼락을 맞았는지 흥청망청이다. 국회의 농협 국정감사장에서 나온 소식을 들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농협 간부들이 골프를 즐긴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골프천국일줄 몰랐다. 농협이 보유한 골프 회원권이 물경 121구좌 821억5,700만원어치란다. 중앙회가 404억4,900만원, 20개 지역조합이 117억7,500만원, 자회사가 299억
개인적으로 온라인에서 온갖 논쟁을 보거나 참여해온지 벌써 10여년이 다 되어간다. PC 통신 시절까지 합치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최근 『괴짜경제학』으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Steven Levitt)과 뉴욕타임즈 출신의 저널리스트 스티븐 더브너(Stephan J. Dubner)의 신간 SuperFreakonomics가 출간되면서, 바야흐로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년의 경험을 걸고 말하는데, 이보다 큰 규모의 키보드 대전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분야의 학자들, 그 분야의 ‘빅 네임’들은 서로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걸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유행 인물의 요인과 속성을 다루려는 문화연구의 관점이라면 모를까, 정색하고 '허경영 현상은 무엇이냐?'는 일고찰적 질문을 던지는 것은 굉장히 멋쩍은 일이다. 허경영이 무엇이긴 무엇이겠나.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가. 기인, 대통령 후보 혹은 허본좌 뭐라고 부르건 허경영은 그냥 우스개일 뿐이다. 허경영은 오랜만에 출현한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우스개이다. 그러니까 '남을 웃기려고 익살을 부리면서 하는 말이나 짓'을 하는 이다. 우연찮게 하수상한 시대를 만나, 인터넷이라는 환경적 혜택으로 소비가 극대화된 우스개이다. 물론, 그 소비가 온-오프라인을 넘어서 유통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고 기막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우스개이기 때문에 가능한 발생 그리고 확장이었을 뿐이었다. 우스개는 그런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해도 ‘공무도하가’는 중장년층 정도 된 이의 머릿속에 언제나 맴도는 글이다. ‘저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물에 쓸려 돌아가시니/가신님을 어이할꼬’(정병욱 역) 기자에서 출발해 이제는 무엇을 이야기해도 소설이 될 내공을 가진 김훈의 신작에는 어디에도 ‘공무도하가’가 없지만 제목이 ‘공무도하’다. 뒷날개의 글처럼 그는 ‘나의 글은 (강을 건넌 백수광부와 달리)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했다. 소설의 날줄은 창하와 해망이라는 두 공간이다. 창하는 주인공인 노목희의 고향으로 변절자로 찍혀 그곳을 떠난 장철수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장철수와 미술교사를 했던 노목희는 그곳에서 한
SK는 깊은 한 숨을 들이마셨고, 기아는 작은 한 숨을 내쉬었다. 당장에 1승이 절박하던 SK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타선의 침체를 걱정하던 기아는 희망을 발견한 경기였다. 경기 결과는 11 : 6 스코어가 말해주듯, SK의 완승이었다. 한 때, 스코어는 8점차까지 벌어졌다. 경기가 일방적으로 흐른 것은 간단하다. SK가 기아의 '선발 게임'을 무너뜨렸기 때문이었다. 손을 자주 불던 구톰슨은 손이 곱아서 였는지 시즌만큼 '컷 패스트 볼'과 '변화구 제구력' 모두에서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도 저도 결정구를 던지지 못하는 선발 투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야구의 이치이다.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조차 망설이던 구톰슨의 나약함을 SK 타자들은 예리하게 후벼 들었다. 1회 박재상의 2루타에 이른 박정
낯선 여행길에서 우연한 만남으로 피어나는 로맨스? 이거 옛날이야기다. 목적지 사이를 바로 이어주는 오늘날의 도로 체계에서 ‘우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연히’ 들어간 동네 구멍가게 할머니에게 가족사를 듣게 되는 ‘우연한’ 만남 따위는 점점 더 찾기 어렵게 됐다. 그런데 한 시골마을 미술관이 그런 우연한 만남을 선사했다. 전남 함평군 잠월면 산내리. 어쩌면 살면서 단 한 번도 가볼 일 없었을, 그저 도로 표지판 상의 지명 정도로 남았을 작은 시골마을이 ‘아는’ 곳이 됐다. 그곳의 사람들과 사연이 구체적인 실체가 되고 인연이 되었다. 이제 산내리는 김복님 할머니가 골목 골목 마실을 다니고, 장복님 할머니와 ‘귀걸이’ 할아버지가 아침마다 베드민턴을 치는, 마을 방송 전에 늘 뽕짝 두 곡을 트는
MB정권의 변태MB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도가 40~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촛불정국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이 지지율을 놓고 조바심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성장발달이 더딘 내 자식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버둥대는 걸 보는 것 같아 오히려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눈물겨운 성장통을 겪으면서도 제 생명과 그것을 부여해 준 부모에 감사하기보다 여전히 거짓말하고, 옛 잘못에 대해 사과 한마디도 없으면서, 마치 효도라도 하는 양 유세를 부릴 때면, 못난 자식,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심보가 불쑥불쑥 솟구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권이 예년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1) 인민을 신민으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