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인물의 요인과 속성을 다루려는 문화연구의 관점이라면 모를까, 정색하고 '허경영 현상은 무엇이냐?'는 일고찰적 질문을 던지는 것은 굉장히 멋쩍은 일이다. 허경영이 무엇이긴 무엇이겠나.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가. 기인, 대통령 후보 혹은 허본좌 뭐라고 부르건 허경영은 그냥 우스개일 뿐이다.

허경영은 오랜만에 출현한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우스개이다. 그러니까 '남을 웃기려고 익살을 부리면서 하는 말이나 짓'을 하는 이다. 우연찮게 하수상한 시대를 만나, 인터넷이라는 환경적 혜택으로 소비가 극대화된 우스개이다. 물론, 그 소비가 온-오프라인을 넘어서 유통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고 기막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우스개이기 때문에 가능한 발생 그리고 확장이었을 뿐이었다.

▲ 허경영 ⓒSBS '그것이 알고싶다'
우스개는 그런 것이다. 쓰잘데기 없다고 생각되거든 즐기지 않으면 되는. 하지만 무관심이더라도 한 번쯤은 듣게 되는. 그러나 취향과 입장에 따라 그냥 흘려도 되는. 하지만 재미있다면 적극적이 되는. 웃음을 모든 것을 잊게하는 힘이 있고, 가장 적극적 수용이 일어나는 텍스트이자, 가장 빈번하게 새로운 창작이 가미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여기저기 퍼뜨리고, 따라한다. 야구장 피켓에, 주기도문에 허경영이 인용되는 것은 정확히 그 속성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스개로서의 허경영을 처음 발굴한 곳은 <딴지일보>가 될 텐데, 역시 웃자는 거였다.

그래서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허경영을 다룬다고 했을 때, 영 부적절하다까지는 아니었지만 뭔가 엇박자라고 생각했었다. 웃자고 하는 것인데 표정 싹 바꿔 죽자고 덤비지는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언론의 속성상 사소한 말꼬리 하나까지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터이고, 그것은 역으로 우스개를 우스개로, 꽁트가 꽁트일 뿐인 상황에서 홀로 고루한 척을 하게 되지 않을까에 대한 노파심이었다.

그리고 역시 그랬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밝혀낸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거나 밝혀지거나 안 밝혀지거나 별로 상관없던 것들이었다. 허경영 현상에 대한 해답도 없었고, 일고찰적 수준에는 더욱이 미치지 못했다.

그가 정치꾼이라는 거, 사기꾼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이가 있을 수 있고, 설령 문란하다고 한들 상관없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대중은 그가 단지 우스개이기 때문에 즐기는 것이고, 즐기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짚어졌어야 했던 것은 이 터무니없는 우스개에 위로받고 있는 대중 심리였지, 그 즐김 자체가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허경영의 세세한 사생활을 들춰낼 것은 아니었다.

각설하고, 이후 허경영은 SBS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상상 이상의 금액을 청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 것이다. 어느 정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기획 의도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허경영의 '허명'을 더욱 키워준 꼴이 됐다. 예컨대,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에라이 허경영 이 나쁜 놈 같으니'하는 감정적 파장은 별로 들지 않았다. 우스개로 존재하는 허경영과 실제의 허경영을 <그것이 알고 싶다>가 적절히 구분해내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 허경영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향을 영 잘못 짚은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그래서 허경영은 외려 우주 만방에 걸쳐있는 자신의 명예와 눈빛만으로 지구를 구원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고작 시사프로그램이 알아 챌 수 있겠느냐는 대갈성을 치고 있는 것이다. 월간조선에 실린 허경영의 주장에 따르면, 12명의 천사가 허경영을 지켜준다고 하는데(아니면 이미 징역을 살아 본 그인데) 그깟 법률 따위가 무서울 허경영도 아니다. 그의 뻥은 안드로메다를 상회하고 있고, 그의 자기 확신은 현존하는 모든 것을 압도한다. 그래서 웃긴다. 확실히 어느 인물이 스스로 대유행을 만들고자 한다면, 어떤 상황과 어느 역경이 오더라도 굴하지 않고 이 정도 일관성은 보여줘야 한다고 온 몸으로 울부짖는다고나 할까.

확실히 말하건대, 허경영은 언론을 통한 사회적 검증의 대상도 현상도 아니고 못된다. 사회적으로 수행해야 할 것은 문화연구적 비평이고, 허경영 현상을 쫒는 대중 심리에 대한 분석이다. 이미 옳고 그름의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 그를 검증하겠다며 허경영 부르는 놀이의 윤리를 따져 묻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허경영이 누구인지, 허경영 현상이 무엇인지 대중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냥 그를 매개로, 팽이삼아 회로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 정색하고 이 놀이판을 엎자고 하는 것은 진중권의 말마따나 과도한 진지함으로 놀이를 망치는 썰렁한 태도이다.

행여, 그것이 저널리즘의 문법에 맞지 않는 우스개는 통용될 수 없다는 소산의 발현이라면 더욱 볼썽사나운 일이다. 4만 달러 소득에 가고, 7대 강국에 간다는 주술, 4대강 사업을 하면 전 국민이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도 결국, 정색만 했다 뿐이지 '내 이름을 부르면 넌 행복해진다'는 허경영의 우스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것에 대해 언론은 얼마나 정색하고 있는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해 허경영이 저지르고 있는 문제는 사실 별 게 없다. 그는 본좌급 인터넷 스타로 온라인에 존재하다가 '내 이름을 부르면 넌 행복해진다'는 코믹송으로 오프라인으로 넓히고 있을 뿐이다. 다분히 비지니스적인 태도이고, 겉으로 보긴엔 쇼 엔터테인먼트의 경로에 충실한 이행이다.

오히려 허경영의 행보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그와 너무 밀접해있어, 그의 우스개를 우스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질적인 재산상의 손해를 입을 지도 모를 그의 밀접한 주변이다. 사기를 당한 많은 사람들의 경우, 과정에서 자신이 사기를 당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를 향한 설익은 진지함은 오히려 그의 그림자를 짙게 하여 소수의 실제 피해자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도 어디선가 그가 '오링 테스트'와 같은 비과학적 퍼포먼스를 초과학이라고 침 튀기며, 자신에 대한 기사들을 증거로 제시하며, 누군가들을 진짜 현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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