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권력자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드물다. 좋은 기자도 그만큼 희귀하다. 언론사에 들어가면, 첫 6개월을 ‘수습 기자’로 지낸다. 경찰서 3~4곳을 맡아 기자 훈련을 시작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후반의 신참 기자는 경찰서장과 ‘대당’한다. 수습 기자의 첫 임무는 서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일이라는 우스개가 이 바닥에 있다. 서장을 당당히 대할 수 있어야 ‘출입처’인 경찰서를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기자들에겐 있다.

‘원론적으로’ 경찰 취재 경험은 좋은 기자의 자양분이 된다. 힘 있는 자는 경찰서에 가지 않는다. 힘없는 자들이 피해자 또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앞에 줄지어 선다. 10여 년 전 겨울, 수습 기자가 되어 처음 경찰서 형사과를 찾은 날을 잊을 수 없다. 중년 남자가 팬티 차림으로 유치장 창살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만취 상태였다. 형사인가 싶어 말을 건 양복 신사는 알고 보니 사기 피의자였고, 이런 자가 조폭이구나 싶은 험상궂은 남자가 실은 경찰이었다. 퇴학당한 중학생들이 공사장에서 돌려 마신 본드 냄새, 그러잖아도 팍팍한 직장생활의 우울한 퇴근길에 느닷없이 봉변을 당한 샐러리맨의 피냄새, 이 사건에 관해 할 말이 무지하게 많지만 배운 게 없어 두서없이 머리만 조아리는 퇴학생 보호자들의 술 냄새.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비릿하고 습습한 공기가 경찰서 전체에 스멀거리고 있었다.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경찰서는 악다구니의 집합소다. 서민과 권력이 서로 갈등하는 최전선이다. 그런 경찰 취재를 통해 수습 기자는 대학의 온실에서 서민의 뻘밭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경찰이 ‘법과 질서’의 눈으로 ‘사건’을 다룰 때, 기자는 ‘인간과 정의’의 눈으로 ‘사람’을 만난다. 거기서 기사를 길어 올린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실제 진행되는 일은 사뭇 다르다. 사람을 만나려면 사건을 취급하는 경찰과 친해져야 한다. 어울리는 일이 잦아진다. 피의자의 처지보다 경찰의 고충에 공명하는 일이 많아진다. 서장·과장 등 간부들이 기자에게 먼저 다가오기도 한다. 그들은 승진에 목을 매고 있고, 기자들이 함부로 휘두르는 펜 끝에 식구들의 생계가 끝장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경찰 간부의 눈으로’ 세상 보는 법을 기자들에게 전염시킨다. 이 과정은 이후 기자 생활 내내 반복된다. 검찰, 법원, 행정부, 국회, 청와대 등에서 거듭 된다.

언론의 ‘출입처 시스템’은 감시견 역할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권력자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시민사회의 대표를 ‘자임’한 기자는 권력 기관에 스스로를 ‘파견’시킨다. 시민의 눈으로 권력의 부패와 전횡을 감시한다. 기사로 폭로하여 경종을 울린다. 결과적으로 ‘출입처 시스템’은 특종 보도에도 도움이 된다. 권력기관은 고급 정보가 오가는 길목이다. 비밀스런 문서와 음험한 이야기들이 횡행한다. 문서를 건네줄 내부 제보자와 친밀해지기만 한다면, 특종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이 방식은 기자들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느 기자가 첫 기사를 썼는지, 시민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기자 사회의 평판과 관련이 있다. 묻혀진 진실을 캐낸다는 특종의 ‘원론적’ 의미는 출입처 경쟁에서 이겨 직업적 성공을 거두려는 기자의 ‘실용적’ 가치로 종종 격하된다.

언론의 존재이유를 망각하지 않고, 날 서린 비판의 눈으로 권력자들을 감시하는 기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열의 아홉은 ‘감시견’ 대신 ‘반려견’이 되어 간다. 드물게 비판기사를 쓴다 해도 권력자들의 언어로 보도한다. 그들이 쓰는 기사에서 세상은 권력자, 명망가, 권위자, 유력자의 각축장이다. 여기에 이데올로기는 없다. 진보건 보수건 ‘파워 게임’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면, 결정적 부패 보도조차 “그 놈이 그 놈”이라 생각하는 필부들의 상식에 지푸라기 하나 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기자의 뿌리에 해당하는 서민들이 감동하거나 분노하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다. 기자는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한다. 스스로 파워 게임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신문이 대통령을 만들었던가?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대통령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이 별처럼 많았다는 이야기다.

▲ KBS <다큐 3일>의 민생르포, MBC 의 탐사고발은 한국 언론이 빚어낸 최고의 성취였다. 사진 출처 - KBS, MBC
출입처 시스템이 파워 게임의 링으로 변질되어 가는 동안, 그 링에 오르지도 못한 언론인 집단이 있었다. PD들이다. 공중파 방송의 ‘시사교양국’에 둥지를 튼 이들은 ‘교양’에서 ‘시사’로 진화를 거듭했으나, 끝내 출입처 시스템에 편입하지는 못했다. 같은 방송국의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매일처럼 고위 관료와 얼굴을 맞댈 때, 이들은 인터뷰 요청서를 수없이 보내다 마침내 거절당하는 일을 밥 먹듯이 겪었다. 대신 PD들은 골목과 거리로 떠밀렸다. 고위 당국자가 은밀히 전하는 문서 한 장이면 해결될 일을 그들은 골목의 서민과 거리의 군중을 수없이 만나 확인했다. 해고자 대표의 한 마디와 노동부 장관의 한 마디를 평등하게 다루는 ‘객관주의 저널리즘’ 대신 해고자들의 사연을 일일이 파고들어 소개하는 ‘뉴 저널리즘’을 택했다. 기자보다 성실하거나 탁월해서가 아니라, 기자와는 ‘다른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그들이 권력을 만들었던가? 전혀 아니다. 대신 그들은 권력자, 명망가, 권위자, 유력자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했다. 황우석 박사가 자신의 농장에 각 언론사 기자들을 초청해 견학시킬 때, 초대받지 못한 PD들은 황 박사가 거느린 연구자와 그에게서 시술받은 환자들을 만났다. 재경부 출입 기자들이 FTA의 외국 사례를 분석한 여러 문서를 들고 우왕좌왕할 때, PD들은 FTA에 신음하는 멕시코의 서민들을 직접 만났다. MBC <PD수첩>의 탐사고발, KBS <다큐 3일>의 민생르포는 한국 언론이 빚어낸 최고의 성취였다. 그걸 PD들이 개척했으니 흔히 일러 ‘PD 저널리즘’이라 하지만, 실은 탐사 저널리즘의 본령이다.

몰카를 쓴다고? ‘고위 소식통’을 익명인용하면서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기자들보다 낫다. 반론을 충분히 싣지 않는다고? 기계적 객관주의로 사안의 본질을 비틀어버리는 기자들보다 낫다. 이슈를 선정적으로 다룬다고? 노조원에게 전기총을 쏘는 경찰의 선정적 진압 작전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단신 처리하는 기자들보다 훨씬 낫다. 시민의 눈으로, 시민들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권력을 향해 따져 묻는 탐사·기획·심층 보도는 원래 기자들의 몫이었다. ‘반려견’이 되어버린 기자들이 그 임무를 망각했을 뿐이다.

방송에 대한 탄압이 이들 시사교양 PD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초창기 KBS <다큐3일>은 찜질방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에 주목했다. 민주 정부 집권 이후에도 왜 하층민들의 삶이 여전히 고단한지 물었다. 요즘 <다큐 3일>은 한일 민간 교류 행사 따위에 주목한다. 세상은 그저 평온하다. MBC는 시사교양프로를 통폐합하라는 압력에 처했다. “거기서 거기인 프로를 왜 여러 개 만드느냐”는 핀잔을 듣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거기서 거기인 3개 보수신문이 멀쩡히 발행되는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언론은 1분짜리 리포트의 총합이다. 캐묻지 말고 파고들지 말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아야 선진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심층탐사 PD들의 입에 재갈이 씌워지고 있다. 이미 이빨이 뽑혀 반려견이 된 기자들에겐 그 일이 강 건너 불구경 같을 것이다. 저널리즘 전체가 궁형에 처해지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모른다. 그러고도 기자 맞나.

※ 이 글은 안수찬 한겨레21 기자가 인권연대 ‘수요산책’에 28일 기고한 글입니다. 인권연대와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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