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심영섭 칼럼]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한 건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사족보행을 하며 네발로 뛸 때는 다른 동물만큼이나 빠르게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간은 두 발로 서면서, 뛰는 속도가 줄었고, 주변 환경에 쉽게 노출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직립보행으로 세상을 더 멀리 볼 수 있는 시선을 얻었고, 두뇌는 더 커졌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에서 생각하는 인간으로 진화했다.

현행 제도를 바꾸는 것도 어쩌면 직립보행만큼 여러 장점을 포기하는 모험일 수 있다. 문제는 이 모험을 해야 할지 혹은 하지 말아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고, 기존의 제도보다 나을 것이라는 확인을 가진 사람은 없다. 다만 특정한 시점에는 오랫동안 누적된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얇은 유리그릇처럼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갈등 상황을 풀어나가야 하는 순간이 온다.

지난 4월 4일 11시 22분에 123일 만에 내란이 끝났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심판 결정 선고를 통해, 정치가 해야 했을 일과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명확히 했다. “피청구인은 취임한 때로부터 약 2년 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피청구인이 국정을 주도하도록 국민을 설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피청구인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야당을 지지한 국민의 의사를 배제하려는 시도를 하여서는 안 되었습니다. (...)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초월하여 사회공동체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를 위반하였습니다”. 당연한 주문이지만, 정치가 오랫동안 수행하지 않았던 일은 설득하고 타협하여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내란을 끝낼 생각이 없는 듯하다.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 (사진=연합뉴스)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 (사진=연합뉴스)

곧 시작될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은 선거방송심의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나섰다. 지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때처럼 선거 보도를 옥죄는 홍위병 같은 선거방송심의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과연 대통령 선거기간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을 초월하여 사회공동체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를 수행할지 의문이다. 류희림 위원장은 지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급조된 단체로부터 선거방송심의위원을 추천받아 구성했으며, 이들은 재량권을 남용하면서까지 선거방송을 옥죄었다. 특히 최고 수준의 법정 제재인 과징금부과를 남발하였고, 대다수 제재는 법원이 과잉규제로 무효화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류희림 위원장이 정치적 후견을 뼈대로 한 선거방송심의위원회를 구성한다면, 또다시 선거방송 보도에 대해 법정 제재를 남발할 가능성이 크다. 선거방송심의위원회로부터 법정 제재를 받은 방송 사업자는 제재를 받은 이후 법원을 통해 무효 판결을 받더라도, 당장 선거기간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또 반론권을 보장하라는 제재를 받으면 공직선거법에 따라 이행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 결정이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지금에라도 류희림 위원장은 선거방송심의위원회를 공개적이고 정치적 중립에 대한 검증이 가능한 수준에서 구성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유례없는 과징금, 그 뒤엔 위원장 가족·측근 민원이? (MBC 뉴스데스크 2023년 12월 25일 자 보도화면 갈무리)
유례없는 과징금, 그 뒤엔 위원장 가족·측근 민원이? (MBC 뉴스데스크 2023년 12월 25일 자 보도화면 갈무리)

류희림 위원장은 이미 자기 가족이 민원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방송심의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졌지만, 진실을 은폐해 온 전력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 2023년 9월 윤석열 대통령 비위 의혹을 다룬 방송사 보도를 겨냥해 가족과 지인을 동원하여 같은 내용의 민원을 복사하여 수십 건 접수하도록 하고, 본인이 해당 방송심의에 참여하여 과징금 등 중징계를 부과하는 ‘청부 민원’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민원 접수 사실에 대해 류희림 위원장은 2023년 9월 14일 담당 팀장의 보고를 받고도 9월 19일 방송소위에 참석하여 과징금을 부과하는 제재 결정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11월 13일 전체 회의에서 중징계 확정을 주도했다. 이러한 행위는 ‘방심위 임직원 이해충돌 방지 규칙’에서 정하고 있는 위원장 포함한 방심위 임직원의 사적 이해관계에 대한 신고와 회피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은 특정한 방송 내용이 방송심의규정을 위반했다고 판단할 때, 재량으로 안건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청부 민원’을 통해 마치 시청자 민원이 밀려들어, 중징계가 불가피한 것처럼 여론을 왜곡하려고 시도한 것은 아닐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2023년 12월 방심위 직원들이 국민권익위원회에 이해충돌방지법 위반으로 공익 신고하였지만, 권익위는 7개월 만인 지난 2024년 7월 ‘당사자 간 증언이 엇갈린다’라는 이유로 판단 불가 결론을 내리고 사건을 방심위에 되돌려보냈고, 방심위는 2025년 2월 자제 조사 끝에 판단 불가로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셀프 민원에 대해 셀프 조사를 거쳐 셀프 면죄부를 준 셈’이다.

"거짓 진술했더니 류희림이 '고맙다' 했다"‥방심위 간부의 폭로 (3월 5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화면 갈무리)

2025년 3월 5일 국회 과방위 회의에서 현안 질의 증인으로 출석한 방심위 강원사무소장은 ‘지난 2023년 9월 14일 류희림 위원장의 쌍둥이 동생 류희목 씨가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 방송에 대해 민원을 접수했다’는 사실을 류희림 위원장에게 대면 보고했지만, 그간 국회와 권익위 조사에서는 일관되게 보고 사실을 부인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거짓 증인에 대해 류희림 위원장도 ‘고맙다, 잘 챙겨주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류희림 위원장은 국회 현안 질의에 불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체 진상조사마저 거부하고 있다. 남은 건 경찰과 검찰 조사밖에 없다. 지금에라도 위원장직을 사퇴하고, 물러나는 것이 조금이라도 명예로운 퇴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갈지자로 ‘사족보행’을 지속해 온 방송통신심의제도는 이제 ‘직립보행’을 위한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그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 심영섭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에서 발행하는 '언론인권통신' 제 1052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미디어스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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