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시뮬레이션 <심시티>, 위기에 처하다

2013년 3월, 거대게임회사 EA가 새로 발매될 게임 하나를 발표하자 많은 게임커뮤니티들이 들썩였다. 2003년 4편을 마지막으로 별다른 소식이 없던 <심시티> 시리즈가 새로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도시를 건설하고 경영하는 건설시뮬레이션게임의 개척자이자 대표작인 <심시티>는 10년의 공백기동안 발전해온 기술을 포함해 온라인플레이, 더욱 세련된 도시환경, 더 방대한 데이터 처리를 표방하며 예약구매 붐을 일으켰다.

그리고 발매 후, <심시티> 2013년 신작은 메타크리틱 유저평점 2점대를 찍는 기록적인 악평을 기록하며 몰락했다. 온라인플레이를 표방했으나 서버는 접속이 되지 않았고, 완성도도 부실해 만들던 도시가 갑자기 초기화되는 현상도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유저들은 10년전의 <심시티 4>에서 다루던 도시 크기의 1/4도 안 되는 신작의 맵크기에 실망했다. <심읍내>라는 별명이 붙었고, 고전게임 판매사이트인 GOG에서는 전작 <심시티 4>를 이벤트로 판매하여 큰 수익을 올렸다.

▲ <심시티>(2013)와 <심시티 4>(2003)의 맵크기 비교. 10년의 기술발전만큼 큰 도시 시뮬레이팅을 원했던 유저들이 가장 크게 좌절한 것은 다룰 수 있는 맵의 크기였다. (이미지=엔하위키미러)

발매 전에 몰렸던 큰 관심과 발매 후 쏟아진 실망의 결과까지 합쳐보면 어쨌든 <심시티>가 게이머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게임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재미있었기에 기대했고, 재미있었기에 실망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게임은 다른 게임과 조금 다르다. 갈수록 강해지는 캐릭터도 없고, 드라마틱한 서사도 없다. 특별한 아이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코어나 티어로 다른 사람과 경쟁할 만한 요소도 없으며, 게임 안에서 뭔가 달성해야 하는 목표 같은 것도 딱히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전 게임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새 시리즈에 기대를 거는 게이머들이 넘쳐난다는 것은 뭔가 다른 면에서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전산으로 구현한 ‘마법의 붓’이 주는 희열

<심시티>는 쉽게 말하면 ‘빈 땅에 도시 짓기’가 전부인 게임이다. 시리즈를 통틀어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에게는 빈 땅만 덩그러니 주어진다. 지형 등을 고려해 플레이어는 도로를 깔고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을 설정해 시민들이 살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전기나 수도 등의 인프라시설이 준비되면 시민들이 새 도시에 전입하기 시작하며, 인구가 늘고 산업이 발전할수록 도시의 규모와 발전도가 점점 올라가 거대한 메트로폴리스까지도 발전이 가능하다.

도시를 짓는 과정 자체는 나름의 재미가 있다손치더라도 게임으로 불러주기에는 어렵다. 레고블록으로 집을 짓고 찰흙으로 도시를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심시티> 시리즈가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게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플레이어가 지은 도시에 발생하는 상호작용 덕택이다.

<심시티>의 도시는 플레이어가 만든 범주 안에서 개체들간의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주거지구를 설정하고 이어 도로를 뚫으면 외부에서 시민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살며, 세금을 낸다. 이 사람들은 아침에 일터에 나갔다가 밤이 되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며, 번 돈을 가지고 상가에서 쇼핑을 한다.

심즈(게임 내의 주민)들의 상호작용은 단순히 플레이어의 결정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며, 역으로 플레이어에게 상호작용을 요구하기도 한다. 도시의 인구가 늘어 현재 가지고 있는 발전소만으로는 전력공급이 부족해질 경우, 시민들은 추가 발전소 건설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들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시민들은 불만을 갖고 도시를 떠난다.

또한 심즈들의 상호작용은 심즈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통체증이다. 도시의 규모가 커질수록 화물량과 출퇴근인구가 늘어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길이 막히면 통근거리가 길어져 심즈들의 불만도가 올라가고, 화재가 나도 소방차가 제때 도착하지 못해 대형화재로 번지고 만다.

이런 상호작용들은 모여서 플레이어가 건설한 도시를 살아있는 세계로 만들어준다. 단순히 도시모양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전래동화에 나오는 그리기만 하면 실제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붓과 같은 기능이 전산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게임에 구현된 것이다. 플레이어가 그려낸 도시는 바글바글한 주민들이 엮어가는 삶의 터전이 되고, 거기서 벌어지는 갈등과 협력의 상호작용들은 플레이어에게도 시행정가로서의 임무를 부여한다. 장난감놀이와 게임을 가르는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만든 세계가 실제로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

운영시뮬레이션 장르에 속하는 모든 게임들은 그래서 살아숨쉬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상호작용의 구현에 많은 자원을 투여한다. 정치적 풍자가 두텁게 가미된 <트로피코> 시리즈는 불만세력들이 아예 반군게릴라가 되어 플레이어에게 저항하고, 놀이공원 시뮬레이션 <롤러코스터 타이쿤>에서는 수익을 위해 아무리 핫도그가게를 많이 만들어도 그럴듯한 핵심 놀이기구가 없으면 장사가 되지 않는다. ‘마법의붓’만 제대로 동작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게임의 재미는 충족되기 때문이다.

‘마법의 붓’ - 체험적 재현

‘마법의 붓’이라는 에둘러 표현한 단어를 좀더 일반적인 용어로 가져가 본다면 ‘재현’(representation)이 가장 가까운 단어일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건 또는 사물을 창작자가 받아들이고, 이를 현실이 아닌 공간에 창작자의 의지를 포함해 재구성하는 작업인 재현은 모든 예술활동의 기반이다.

예를 들어 도시라는 개념을 여러 장르와 매체의 문법으로 재현한다고 가정해보자. 음악가 스팅은 <Englishman in New York>이라는 곡에서 뉴욕에 살면서도 영국 스타일을 고수하는 인물의 행동양식을 통해 상대적 의미에서의 뉴욕문화를 들려주어 대도시의 문화와 생활양식의 대표주자 중 하나인 뉴욕을 음악으로 풀어낸 바 있다. 드라마 <서울의 달>은 인구 천만의 대도시 서울을 시골뜨기 두 친구의 상경기를 통해 타자의, 그러나 타자가 아니고 싶어하는 욕망을 담아 그려냈었고,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은 귀족과 성직자, 빈민이 한데 뭉쳐 살아가는 도시라는사회현상을 위고 특유의 인간에 대한 묵직한 묘사로 그려냈었다.

<심시티>는 도시를 게임이라는 틀을 통해 재현하는데, 그 방식과 시점, 공간 등이 기존의 다른 장르와 큰차이를 보인다. 특정인물이나 시공간에 시점의 중심을 두지 않고, 도시라는 큰 개념을 이루는 세부적인 요소들을 오브젝트화하고 오브젝트들이 갖는 속성들끼리의 상호작용에 대한 정의만을 게임 안에 설계한다. 도시의 재현은 플레이어와 프로그램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렇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다른 차원에서의 도시에 대한 재현이 가능하다. 실제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하나하나 만들어보고 연결해가면서 제작자가 제시한 도시의 개념을 수용하는 것이다.

▲ 실제 뉴욕전경 사진(위)와 <심시티 4>의 큰지도에서 구현된 뉴욕의 모습(아래). 실사도 게임의 이미지와 같은 느낌을 준다. 게임 이미지의 경우 맨하탄과 센트럴파크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물론 플레이어의 스탠스는 도시 설계자 또는 시장이라는 개인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시장이라고 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도시를 게임처럼 짧은 시간 안에 지어올리고 그 도시를 여기저기 구경해보거나 수백 년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체험하기는 어렵다. <심시티>가 제공하는 도시에 대한 체험적 재현은 그래서 일반적인 미디어의 시점과 조금 다른 차원에 위치한다.

체험적 재현은 감각에 의한 이해만을 다루지 않으며, <심시티>의 경우 도시라는 개념을 둘러싼 시각적, 청각적, 형이상학적 묘사 제반을 다룬다. 형상으로서의 도시가 아니라 개념으로서의 도시를 그려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도 시운영에 필요한 제도적 사항들, 예산의 수입과 지출문제 등 또한 게임 내의 상호작용 요소로 구현되어 있어 플레이어의 플레이 속에 경험적으로 재현된다. 시간과 공간, 형상과 형이상을 구분하지 않아 게임만의 독특한 시점, 차원을 만들어내는 체험적 재현은 게임의 재미와 몰입도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일뿐더러, 지금까지 게임 이전에 존재했던 장르들만으로는 그려내기 어려웠던 새로운 영역에 대한 체험을 인간에게 제공해주는 뉴미디어로서의 특장점이기도 하다.

▲ <심시티 4>의 도시운영법안 화면. 예산이 부족하면 도박합법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데, 추가세금이 들어오는 대신 범죄율이 크게 상승한다. 지출 항목들은 추가적인 예산을 들여 보건, 환경, 화재 등의 운영요소를 안정화시킬수 있는 옵션들이다.

운영시뮬레이션의 개념적 해상도는 아직도 창창한 가능성이 가득하다

체험적 재현이 주는 새로운 체험에 열광하고 즐거워했던 게이머들에게 2013년 발매된 <심시티>는 탄식과 안타까움만을 남겼다. 일신한 그래픽과 편리해진 UI(User Interface, 이용자 환경), 더욱 다양해진 이벤트 요소들과 도전과제들 같은 칭찬할 요소도 분명 들어 있었으나, 큰 도시체험을 원한 이들에게 읍내만한 규모의 제한 밖에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은 모든 장점을 덮고도 남을 안타까운 단점이었다. 많은 게이머들은 정통 운영시뮬레이션의 적자인 <심시티>의 몰락 앞에서 운영시뮬레이션 장르의 존폐위기까지 걱정했으나, 다행히 최근 출시된<cities: skylines>가 호평을 받으면서 새로운 희망을 얻어가는 상태다.

<심시티>가 시도한 풀 3D 그래픽과 같은 긍정적 요소들은 가급적 살려내고, 시리즈 최고의 명작으로 칭송받은 <심시티 4>의 넓은 맵, 광대한 도시를 구현할 수 있게 출시된 <Cities: skylines>는 오히려 <심시티 4>의 정신적 후속작이라는 칭송까지 들으며 꽤 높은 흥행성공을 거두는 중이다.

엔딩 없고, 도전과제 없고, 경쟁 없는 어찌보면 조금은 편안하고 안일한 장르인 운영시뮬레이션은 아직까지 발전할 여지가 너무 많은 장르다. 컴퓨팅 기술의 발달은 해당 장르가 구현할 수 있는 사물과 사건의 개체수를 더욱 늘려나감으로써 개념의 해상도를 더할 수 있고, 각 개체 간의 상호작용을 좀더 현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하마터면 장르의 존재가 사장될 뻔했던 <심시티> 2013년 대실망 사태가 그나마 정신적 후속작을 맞아 수습될 수 있었던 것은 성장잠재력이 큰 운영시뮬레이션을 좋아하는 입장에선 천만다행인 일이다. 그리고 그 성장가능성 속에는 단지 기술적인 성장만이 아니라, 도시와 그 도시를 구성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는 철학적인 가치에 대한 성장도 포함된다. 개념의 해상도가 올라갈수록 결국 우리는 게임 안에서 행동하는 인간객체의 모습에서 더더욱 현실의 재현에 가까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lay the Game>

#01- 비욘드 어스,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02- MMORPG의 장르적 특성과 워크래프트의 세계관 그리고 WOW

#03- 게임 속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04- 게임에도 정당해산 따위는 없다

#05- 스타크래프트, 윙코맨더3...우주를 다룬 최고의 게임은?

#06- 상호작용의 매체, 게임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07- 나의 삼국지는 그렇지 않아!

#08- 맞고만 치던 당신, 설날 고스톱 스코어는 얼마?

#09-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이야기, XCOM

#10- 새마을운동 게임으로 정신과 이념을 교육한다굽쇼?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