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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국지는 그렇지 않아![Play the Game #07] 범람하는 삼국지 게임에 대한 아쉬움
Redder / 게이머 | 승인 2015.02.07 09:39

중국 오천 년 역사 중 가장 요즘 사람들의 기억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대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배경이 되는 위, 촉, 오의 삼국시대다. 사실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심 밖인 영역인데, 일단 기간 자체도 전체 역사에서 짧은 축에 속할 뿐더러 다른 후대 역사에 주는 영향력도 그리 큰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 고교 교과서에도 위.진.남북조시대의 한 꼭지 정도로 등장하며, 시험문제에 등장하는 빈도도 낮은 편이라 <삼국지연의> 애독자들의 상심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등장인물과 하나하나 살아있는 인물의 특징들, 방대한 지리환경에 역사와 픽션을 섞을 그럴듯한 이야기구조 덕분에 삼국지 관련 콘텐츠는 소설이나 영화 뿐 아니라 게임에서도 무척 주목받는다. 당장 2015년 2월 기준으로 애플 앱스토어에서 삼국지 관련 게임 콘텐츠를 검색해보면 결과값이 200개를 넘는 것을 볼 수 있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만나는 게임 광고 배너도 유심히 보면 유난히 삼국지 관련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단일 원작을 기준으로 등장한 게임 숫자로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것이다.

삼국지 게임의 대표작, 고에이 삼국지 시리즈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은 역시 일본 고에이 사의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 시리즈> 일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처음 등장한 <삼국지 1>을 시작으로 20여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언제나 신작 발매 소식이 한국 게이머들을 들뜨게 했던 대표적인 장수 프랜차이즈인 <삼국지 시리즈>는 단순히 인기 게임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삼국지 매니아, 이른바 ‘삼덕’ 세계 구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한 게임이다.

성장기에 게임을 접했던 삼국지 매니아들과 그 이전 세대 매니아들의 차이는 삼국지 속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인식하느냐에 있다. 게임 이전 세대라면 관우와 허저 중 누가 강한가? 라는 질문에 대전기록을 살피거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요 승리 전적을 기초로 이야기를 풀겠지만, <삼국지 시리즈>를 접해 보고 이를 통해 삼국지 세계관을 갖춘 세대는 데이터베이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바로 ‘무력, 지력, 정치, 매력, 통솔’ 같은 개념이다.

   
▲ <삼국지11>의 장수정보 화면. 통솔-무력-지력-정치-매력의 5개 주력항목이 펜타그래프로 나타난다. 원작 관우의 느낌을 수치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삼국지> 시리즈는 콘텐츠 표현의 한 획을 그었다. 저 수치만 봐도 관우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는데다가, 다른 캐릭터와의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는 삼국지 속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성을 1부터 100까지의 지표를 기준으로 수치화하여 표현했다. 예를 들면 소설 속 최강의 무장인 여포는 게임 시리즈 전체에서 무력 100(방천화극을 들어 +8이 되기도 한다), 지력 20대로 설정되어 언제나 강한 힘, 부족한 머리의 캐릭터로 등장하며, 당연히 제갈량은 시리즈 내에서 대부분 지력 100을 달고 나온다. 삼국지 이야기 전체에서 상위권 장수를 꼽으라면 게임 이전 세대와 달리 게임 키드 삼국지 매니아들은 거의 대부분 ‘무력 90 이상의 장수가 누구지?’를 되새길 것이다.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수치로 표현되는 게임의 특징은 콘텐츠 속의 인물들이 흘러가는 서사에 고정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콘텐츠 수용자의 상상력이 손쉽게 개입할 수 있는 편의성인 ‘상상의 질료성’을 부여하는 요소다. 앞서 언급한 질문을 돌이켜 보자. ‘관우와 허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삼국지 시리즈> 게임 안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답을 구할 수 있는 질문이 된다. 궁금한 누군가는 실제 게임에서 둘의 일기토를 지켜볼 것이고, 이는 고정된 서사에서는 즐길 수 없었던 더 많은 이야기들을 가능케 한다. 고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는 최고 인기 콘텐츠인 <삼국지연의> 매니아들이 꿈꾸는 그 상상력의 발현을 채워주어 놀라운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총 열두 편의 시리즈를 낸 <삼국지 시리즈>는 대개 시작은 비슷하다. 황건적의 난, 동탁과 군웅할거, 관도대전 무렵 등 소설 속 주요 시대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 속에서 내가 플레이할 군주(또는 장수)를 고른다. 그리고 실제 역사와는 상관없이 플레이 캐릭터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다.

중국 대륙 지도가 펼쳐진 화면에서 플레이어는 천하통일을 위한 큰 전략을 품고, 농토를 개간하고 인구를 늘려 병력을 확충하면서 때를 기다린다. 무력이 높은 장수와 지력이 높은 모사들을 모으기 위해 전국을 물색하고, 주변의 강한 군주를 지켜보면서 싸워야 할지, 친하게 지내야 할지를 저울질한다. 그리고 싸워야 할 때가 되면 공격 명령을 내려 전투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소설 속 서사와 다르거나 같은 수많은 이야기를 직접 이끌어 내는 경험을 맛본다. 조조를 플레이하면서 유비-손권 연합군 따위는 물량으로 밟아버리는 시나리오를 타는 조조 매니아도 있고, 관우-장비-조운 트리오의 막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원래 시나리오와 달리 서주에서 쫓겨나지 않고 그대로 중원을 접수하는 유비 플레이도 가능하다. 아예 원작에 나오지 않는 새 군주를 만들어서 당대 최강의 A급 무장들을 모아 올스타 팀으로 중원을 휩쓰는 재미도 있다.

삼국지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며 새 역사를 써내려가는 재미에 게이머들은 크게 반응했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한국에서 <삼국지1>은 정식발매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불법복제로 인해 고에이 코리아는 명성에 비해 별 수익은 얻지 못했고, 결국 한국시장 철수를 결정하여 <삼국지 12>부터 또 한국 발매는 되지 않는다…) 고에이는 큰 흥행에 자신감을 얻었고, 강력한 원작 콘텐츠의 힘을 보다 다양하게 활용할 방안을 모색한다.

영걸전, 삼국무쌍 - 장르의 확장, 시각의 변화

<삼국지 시리즈>는 턴방식 전략시뮬레이션 장르로, 삼국지 콘텐츠를 높은 시점에서 조망하는 게임이다. 100여 년의 장구한 흐름 속에 변화하는 세력의 모습을 그려내기엔 적합한 관점이지만, 한편으로는 원작의 서사가 갖는 이야기로서의 강점은 자유로운 상상력에 밀릴 수 있는 관점이었다. 좀더 인물들 가까이에 초점을 맞추고 원작 시나리오의 재미에 집중한 새로운 콘텐츠를 고에이는 출시하는데, 바로 <삼국지 영걸전>(1995)을 시초로 한 <영걸전 시리즈>다.

   
▲ <삼국지 영걸전> 전투화면. (출처: 엔하위키) 부대 하나하나가 병과를 표현하는 아이콘으로 구현되었고, 선택한 유닛의 상세정보는 우측 창에 각각의 수치로 나타난다. 각 부대를 클릭해서 이동하고 전투하고 스킬을 사용하며, 턴 방식으로 진행한다.

<삼국지 영걸전>은 이른바 SPRG(simulation Role Playing Game)장르로 분류되는 형태를 가진 삼국지 게임으로, 플레이어가 삼국지 속 유비가 되어 준비된 시나리오 속의 여러 전투를 승리해 나가며 숙적 조조를 물리치고 천하를 구하는 스토리를 가진 게임이다. 정해진 스토리가 없어서 재미있었던 <삼국지 시리즈>에 비해 자유로움은 떨어지지만, 원작 시나리오와 가상 시나리오의 선택 분기를 겪으면서 승리조건을 달성하는 재미를 가진 <삼국지 영걸전> 은 삼국지 원작이 가진 캐릭터성들이 롤플레잉 특유의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재미에 녹아들면서 마찬가지로 큰 흥행을 거두었다. 이후 유사한 엔진으로 다른 캐릭터, 다른 시나리오를 얹은 <삼국지 공명전>, <삼국지 조조전> 등이 지속적으로 큰 인기를 거두며 하나의 시리즈를 갖추게 되었다.

고에이의 삼국지 콘텐츠 이용은 이후 또 한번의 시점 변화로 정점을 맞이하는데,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등장이다. 관우가 단칼에 안량을 베고, 장판파의 장비가 백만 대군을 홀로 세우고, 화웅이 호로관의 연합군 장수를 뎅겅뎅겅 베어내는 전장의 호쾌한 액션의 상상에 목마를 삼국지 매니아들을 단숨에 끌어들일 수 있는, 장수 개인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액션 게임이다. 

*<진삼국무쌍3>의 역대급 장면인 호로관 여포 전투. '호로관 메뚜기'라 불리며 초심자를 공포에 몰아넣은 여포의 포스가 압도적이었다.

<진삼국무쌍 시리즈>는 플레이어가 삼국지 속 실제 장수 1명을 3인칭의 카메라 시점에서 액션 버튼을 통해 무기를 휘두르며 적진 한복판을 돌파하고 전장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여 승리하는 것이 목표인 액션 게임이다. 전략의 <삼국지 시리즈>, 스토리와 캐릭터의 <영걸전 시리즈>와 다른 삼국지의 액션성에 주목한 <진삼국무쌍 시리즈>는 <진삼국무쌍3>에서 대폭발하는 인기를 얻어 이후 고에이 삼국지 시리즈 중에서도 21세기 기준 가장 주력 콘텐츠의 자리를 차지한다.

익숙한 콘텐츠의 경제성이 불러낸 참극 - 삼국지가 차고 넘친다

<삼국지>, <영걸전>, <진삼국무쌍>. 삼국지 콘텐츠 하나를 가지고 세 가지 접근을 통해 근 20년을 이어 온 고에이 사의 성과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중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경제성이다.

위 세 가지 시리즈에서 삼국지 콘텐츠의 특징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을 살펴보자. 턴 전략시뮬레이션, SRPG, 3인칭 액션물이라는 장르적 특징에서 바라본다면 세 시리즈는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그리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은 아니다.

<삼국지>의 경우 시리즈 대대로 문제되는 것이 부족한 인공지능이다. 싱글 플레이가 핵심인 게임인데, 플레이어 외의 군주들이 펼치는 전략을 보노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플레이가 펼쳐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군이 튼튼한 요새에 여포-제갈량-관우-장료 급의 탄탄한 에이스 장수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단지 병력 수가 조금만 많아도 물량으로 쳐들어오다가 결국 국력 소모로 망하는 인공지능은 게임의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단점이다.

<영걸전> 은 특정 병과의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강력하거나 쓸모없어 게임의 밸런스가 맞지 않고, 이에 따라 플레이가 지나치게 단조로워지거나 초심자에게 과도한 난이도 장벽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진삼국무쌍>은 그나마 세 시리즈 중에서는 여러모로 완성도에 대한 평가가 후한 편이지만, ‘사골무쌍’이라는 비아냥 섞인 별명은 게임의 시리즈 넘버 상승과 무관하게 콘텐츠가 전혀 발전이 없다는 비판에 휘말린다.

그러나 이런 단점들은 어쨌건 삼국지라는 확실한 원작 콘텐츠를 배경에 깔고 가면서 상당 부분 희석되었다. 무명의 창잡이 김씨가 휘두르는 창 액션이 아닌, 충의의 상징 관우가 휘두르는 청룡언월도에 1천명의 적 병사가 날아가기 때문에 <진삼국무쌍>이 흥미진진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게임상의 단점을 덮어낼 수 있는 원작 콘텐츠 삼국지는 저작권 문제가 부각되지 않는, '무료' 소스다.

그 무료 소스가 없었다면 단점 커버를 위해 제작사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캐릭터를 플레이어에게 각인시키는 데는 많은 자원이 든다. 삼국지라는 원작이 없는 상태에서 <진삼국무쌍>의 관우 느낌을 내려면, 충과 의를 평생에 걸쳐 실천하는 삶을 살며 높은 무용으로 천하를 벌벌 떨게 했던 캐릭터라는 사실을 플레이어에게 이입하기 위해 더 긴 사전 설명이나 설정, 혹은 스토리라인을 만들어야 한다. 만약 <삼국지>라면 그 수많은 등장인물들에게 다 이런 색을 입히는 것은 시간상으로도 비용상으로도 무리있는 결정일 것이다.

무료 원작 소스를 이용한 고에이의 방식은 그래서 다른 게임의 성공보다도 더 경제성 면에서 값진 성과가 되었고, 이 성과는 수많은 영세 게임 스튜디오들에게 큰 영감이 되었다. 깊고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익숙한 콘텐츠를 무료로 손쉽게 이용하는 방법을 본 제작사들은 곧 똑같은 방법을 사용한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PC게임의 제작, 유통 면에 있어서 사실상 불모지로 전락한 대한민국에서 게임 제작사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콘텐츠의 양이 폭증한 것은 스마트폰 이후에 등장한 앱 생태계의 힘을 얻은 바가 크다. 메이저 개발사들만큼의 비용과 인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중소 개발사들은 고에이의 효율적인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각종 스마트폰 게임과 웹게임을 쏟아내는데, 그 방식의 모방이 지나쳤는지 어느날부터 웹게임/어플마켓은 온통 삼국지 게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말이 모방이라고 불렀지 사실은 표절에 가까운 수준이다. 삼국지 같은 저작권 풀린 고전 콘텐츠에 무슨 저작권이겠냐 하겠지만, 고에이 사가 그냥 콘텐츠를 주워다 쓴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삼국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 처음 삼국지를 접한 나는 금성출판사의 박홍신 글 / 신동우 그림의 16권 세트를 읽었는데, 이때 삼국의 군복과 군기 색은 삽화에서 조조군 붉은색, 유비군 파란색, 손권군 녹색이었다. 사실 색의 선택이야 고증이 어려우니 자유로운 게 정상인데, 요즘 나오는 삼국지 관련 게임들을 살펴보면 백이면 백 다 똑같이 파란 조조군, 녹색 유비군, 빨간 손권군을 따른다.

이 색 배정은 정확히 고에이 사가 정립하고 밀어붙이는 설정이다. <삼국지>부터 <진삼국무쌍>까지 고에이는 삼국지라는 원전 콘텐츠에 고에이만의 색을 입히기 위해 노력해 왔다. 관우는 언제나 녹색 모자를 쓰고 있고, 여포는 곱등이 같은 기다란 깃이 투구의 포인트다. 조운은 항상 미소년 컨셉이며, 조조의 초상화는 고에이의 일본 전국시대 게임인 <신장의 야망> 주인공 오다 노부나가 일러스트와 거의 흡사하다. 그런데 이 고에이의 설정이 요즘 넘치는 삼국지 게임들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고에이의 자회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동일한 컨셉이 여러 회사의 게임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여러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유사한 이미지. 맨 오른쪽이 고에이의 <삼국지11>에 등장하는 관우의 일러스트다. 나머지 이미지는 모두 다른 회사의 삼국지 게임인데, 소설 원전이나 정사에는 관우의 복식에 대한 색 언급이나 모자 언급이 없다. 누가봐도 분명한 모티브가 있다.

말그대로 손쉽게 베껴먹는 방식의 제작을 통해 쏟아지는 고에이 아류성 삼국지 게임들은 게다가 게임성 자체도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경우들이 상당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플랫폼의 액션 게임에 그저 주인공 캐릭터만 장팔사모 들고 있는걸로 삼국지가 되는 게임, 카드에 적힌 공격력과 방어력으로 전투를 벌이는 카드게임 엔진에 캐릭터만 고에이 스타일의 삼국지를 입힌 게임, 소셜 웹게임의 대표작 <부족전쟁>과 별 차이없는 엔진에 고에이 스킨을 입힌 삼국지 웹게임이 차고 넘쳐난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들 중에 이런 게임에 호평을 줄 사람이 없다. 굳이 이 칼럼을 쓰기 위해 몇몇 게임을 결제까지 해가며 해본 입장이 우울해지기까지 하는 수준도 부지기수다. 고에이의 성공방식은 분명 좋은 가이드가 되었지만, 그것이 게임으로 녹아나지 못하고 고전 원전의 껍데기만 씌운 결과가 되면 삼국지는 게임 소스가 아닌 마케팅 아이템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 현상은 많은 게이머들에게 삼국지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모든 게임을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 요즘 나오는 삼국지 게임은 대부분 삼국지를 제대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럼 진짜 삼국지를 게임으로 즐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삼국지처럼 게임으로 표현하기 좋은 원전 소스가 망가지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나는 게임 제작자도 아니고 관련 업계에 발가락 하나라도 닿는 사람이 아닌 순수 콘텐츠 수용자의 입장이다. 따라서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한계는 직접 플레이한 삼국지 관련 게임 콘텐츠 중에 무엇이 가장 재미있었는가 수준일 것이다.

내 기억 속 최고의 삼국지 게임은 게임사가 발매한 게임이 아닌 게임이었다. 일종의 동호회 활동이었고, 웹이 등장하기 전 PC통신 시절 나우누리 서비스의 동호회 중 하나였던 <삼국지 클럽>이었다.

<삼국지 클럽>은 삼국지 소스를 배경으로 일종의 역할놀이를 벌이는 동호회였고 기본 룰은 간단했다. 회원은 삼국지 소설 내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잡고, 클럽 룰에 의해 설정된 중국 대륙 지도 안에서 활동을 벌인다. 채팅방에서 다른 인물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세력을 만들고, 특정 도시를 기점으로 나라를 세우고 다른나라와 외교, 첩보, 전쟁 등을 벌이며 천하 통일을 위해 플레이하다가 한 국가가 천하를 통일하면 시즌을 끝내고 리셋하는 방식이었다.

   
▲ <나우누리 삼국지클럽> 제 9기에 사용된 전략지도. 그래픽 표현이 어려웠던 PC통신시절이어서 텍스트맵을 통해 지도를 표현했다. 알파벳은 각 지점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 사용하는 전술맵 코드다. (이미지는 네이버 ssgg8282님의 블로그에서 참조하였음)
   
▲ <나우누리 삼국지 클럽> 9기에 사용된 전술지도. 서량에서의 공성전이 발생하면 이 맵에서 상호 공방을 벌이게 된다. 9기의 전투 방식은 확인 불가.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 ssgg8282님의 블로그.

국력은 주어진 금과 세금을 사용한 국토개발 업무를 문관이 담당하거나, 타세력과의 무역과 외교를 통해 키웠고, 전쟁은 전쟁신청서를 운영진에게 제출하여 전쟁발발 시점에 해당 도시의 무장들이 수행했다. 별다른 프로그램없이 사람의 룰로 돌리다보니 초창기에는 전쟁 방식도 가위바위보를 하자거나, 숫자야구 게임을 통한 병력깎기나, 심지어는 공격력을 특정 회사의 주식을 고르고 다음날 신문의 등락폭으로 설정하는 방식을 쓰는 등의 난항이 있었다.

중학생 때 처음 서비스를 접하고 ‘손건’ 닉네임을 부여받은 나는 인력난에 허덕이는 각국 재상과 군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촉나라 군주의 ‘손건은 역시 촉이죠’ 명분론에 감읍하여 유비의 휘하로 들어간 나는 곧 후회했는데, 녹봉이 생각보다 별로였고 이미 어느 정도 자리잡힌 촉에서는 높은 지위의 벼슬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후회가 오던 찰나 막 형주 지방에 건국세력을 모으던 초나라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운을 만나 재상 자리를 보장받고 바로 이적했다. 초에서는 주로 익주의 촉과 국경을 맞대서 벌어지는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신문을 발행해 재야의 여론을 몰아 당시 서량 지방에서 강세를 떨쳤던 해동성국의 명분없음을 설파해 내분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결국 과몰입에 의한 PC통신 전화료 폭발(당시에는 전화선-모뎀을 통해 데이터통신을 했는데, 시간제 요금이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다)로 부모님의 PC압수라는 결말로 끝난 게임이었지만, 인생을 통틀어 접해본 삼국지 관련 모든 콘텐츠 중 가장 매력적인 기억은 <나우누리 삼국지 클럽>이었다. 벌써 20여년이 훌쩍 지난 일인데도 아직 나는 촉-초 전쟁의 선전포고를 날리던 대화방 분위기를 잊지 못하며, 첫 오프라인 정모로 나갔던 서울 대학로의 국내 최초 인터넷카페 '칸타타'의 코코아 맛을 기억한다. (중학생에게 커피는 당시엔 무서운 음료였다.) 웹의 대세에 밀리며 흔적도 찾기 힘든 옛 기록이 되어버렸지만, 어디에서 다시금 그런 외교전과 첩보전을 벌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나우누리 삼국지 클럽>을 기억하는 게임 개발자가 있다면, 그리고 이 글을 본다면 꼭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때 그 재미, 꼭 좀 다시 구현해 달라고.

<Play the Game> 다시 보기

①편: 비욘드 어스,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②편: MMORPG의 장르적 특성과 워크래프트의 세계관 그리고 WOW

③편: 게임 속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④편: 게임에도 정당해산 따위는 없다

⑤편: 스타크래프트, 윙코맨더3...우주를 다룬 최고의 게임은?

⑥편: 상호작용의 매체, 게임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Redder / 게이머  Grolmars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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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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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클 2015-02-08 13:51:29

    추억의 나우누리 삼클
    당시 머드게임 해 본 사람들은 텍스트 게임만의 중독성을 알 거임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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