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저 2호가 태양계를 벗어난 외우주에 도달하는 시점이고, 화성탐사로봇 큐리오시티가 직접 화성 표면의 사진을 찍어 전송하는 시대이다. 경이로운 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비밀들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우주는 인류에게 신비와 상상이 안방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과학과 합리가 사고의 기초인 현대인에게 과학이 미처 닿지 못한 우주라는 영역은 상상력이라는 대단히 비합리적인 인간의 능력이자 즐거움이 재미없게 날카로운 계량화의 칼날을 피해 히히덕거리며 숨기에 적합한 곳이다.

명백히 존재하지만 감각과 경험이 닿을 수 없는 우주는 그래서 현실 속의 판타지 공간이다. 안 그래도 판타지를 다루기에 적합한 게임이기에 우주를 다룬 게임은 그 숫자가 적은 편이 아니다. 북미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EVE online>, 386~486 프로세서 시대를 풍미했던 고전명작 <윙코맨더> 시리즈, 높은 자유도로 매니아층의 인기를 모았던 <X> 시리즈, 전 우주종족의 운명을 다룬 <매스 이펙트> 3부작, 3차원 우주전투를 밀도 있게 그려낸 <홈월드>, 두말할 여지가 없는 <스타크래프트>까지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면 미안할 정도의 대작들이 우주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우주를 다룬 게임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최고의 10대 게임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우주와 게임은 친밀한 관계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EVE online, 윙코맨더 아카데미, X3:reunion,매스이펙트3, 홈월드2, 스타크래프트2.

우주를 다룬 게임 중 최고의 게임을 꼽아 보라면 그러나 저 위의 게임들이 아닌 다른 게임 하나를 꼽고 싶다. 대규모의 인력과 자본이 들어가 완성한 높은 퀄리티의 그래픽과 방대한 스크립트들, 고품질의 물리엔진으로 구현해낸 우주의 현실감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완성해 낸 수준높은 서사가 담긴 대작이 아니다. 이른바 인디 게임으로 불리는 소규모 그룹이 만들어낸, 그러면서도 오히려 인디게임이게 구현이 가능했던 망망하고 공허한 우주를 홀로 헤치고 나아가는 우주 특유의 느낌을 잘 살려낸 게임이 있다. <FTL: Faster Than Light>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Faster Than Light, 초광속 쯤으로 번역이 가능한 게임의 제목 FTL은 사실은 단순한 이 게임의 서사를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는 단어다. 플레이어는 우주 연방군의 함선 하나를 지휘하는 함장으로, 갑작스런 반란으로 인해 궤멸 상태에 빠진 연합함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반란군의 기밀문서를 탈취한 뒤 적진으로부터 탈출하기 시작한다. 함선에는 FTL엔진, 다시말해 초광속 워프 엔진이 달려 있으나, 장시간 운용이 불가능해 워프와 워프를 거듭해 성계를 거쳐가며 적진으로부터 탈출해 가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이 단순한 스토리로 무슨 재미가 나올 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겠지만, 게임은 원래 주어진 서사에서만 재미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FTL의 워프 이동화면. FTL엔진의 동력이 충전되면 주변 성계로 워프할 수 있다. 우측 상단의 exit마크에 도달하면 현재의 은하를 벗어날 수 있고, 매 턴마다 왼쪽에서 추격군들이 다가온다.

오랜 역사의 보드게임 장기의 경우, 중앙의 장군(초, 한)을 지키면서 각자의 이동 룰을 가진 말들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것이 게임의 모든 것이다. 초, 한 두 나라를 상징하는 장군 말을 통해 초한 쟁패전을 그려냈다고는 하지만, 장기 한 판에 해하 대첩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홍문의 회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저 장기 두는 두 사람의 말 이동이 만드는 이야기와, 장기 두면서 벌어지는 잡담과 주변의 구경, 훈수가 장기 한 판의 서사다. 장기는 오직 말 32개와 각 말들의 이동 룰, 게임의 보편 룰만을 설정했을 뿐이다.

<FTL> 또한 게임이 제공하는 서사는 별 게 없지만,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끝없는 적의 추격, 매번의 워프마다 조우하는 새로운 이벤트와 아이템들을 마주하면서 플레이마다 다른 이야기를 써 나간다. 일반적인 최근 게임들은 이러한 게임 기획의 의도를 플레이어에게 전달하기 위해 향상된 물리엔진, 높은 효과의 그래픽기술, 고품질의 사운드 등을 활용하곤 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사실 상당한 수준의 비용을 요구하는 항목들이다. 최신 MMORPG게임 한 편에 2-3년간 백억 단위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현실인데, 소규모 인디 제작사인 <FTL>의 스튜디오는 그만한 돈을 들일 여력은 없다. <FTL>은 기술과 비용으로 메꿔야 할 그 자리를 인디게임 특유의 장기인 상상력 자극으로 채운다.

상상력 질료 1. <FTL>의 함선 전투: 어디서 분명 본 것 같은

플레이 중 적의 추격대와 조우하거나 우주해적선을 만나는 등의 상황을 맞닥뜨리면 전투 화면이 펼쳐진다. 이때 전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함선과 승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전투 상황에 맞게 배치한다. 함선에는 조종실, 산소발생실, 엔진실, 방어막제어실, 의무실 등의 기능 영역이 존재하고, 승무원들은 각 기능 영역에 배치되면 해당 기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2. 플레이어는 함선의 동력을 각 기능영역에 배분한다. 동력은 제한적이므로 모든 기능에 최대 출력을 부과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전투 상황이 되면 무기실과 방어막 제어에 동력을 쏟아부어야 하고, 부상자가 없다면 의무실은 가동을 멈춰야 무기 발사가 가능하다.

3. 적 함선과의 전투는 동력이 제공되는 무기를 이용해 적 함선의 특정 기능영역을 공격하면서 진행된다. 방어막 제어실을 집중 공격해 방어막을 무력화하거나, 적의 산소실을 날려 제압할 수도 있다. 적 또한 같은 방법으로 아군 함선의 기능영역을 공격해 온다.

▲FTL의 전투화면. 왼쪽이 아군 함선, 오른쪽이 적 해적선이다. 적은 텔레포트를 통해 아군 함선 무기실에 적 해병을 침투시켜 백병전을 벌이고 있고, 아군 함선은 CCTV제어실이 공격당해 함선 내부 상황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른 게임에서의 우주 전투가 대개 직접 함정을 조종하는 조종사 시점이거나 전략지도에서의 함대기동 형태인 것과 달리 <FTL>이 제공하는 전투 화면은 함선 1대에 대해 함장의 위치에서 기능과 승무원을 통제하는 형태다. 그런데, 이 장면은 우주 SF물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장면이다.

바로 SF드라마 <스타트렉>의 전투 장면이다. 함선의 동력을 적절하게 배분하여 공격과 방어에 분산하고, 적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모든 이야기가 함교(bridge)에서 벌어지는 것이 <스타트렉>시리즈의 전통인데, <FTL>의 전투는 또렷하게 <스타트렉>의 전투를 그대로 모사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마치 커크 선장이 된 것 같은 기분 속에 함대함 전투를 치르게 된다.

화려한 3차원 그래픽을 동원해 함선기동을 보여 주거나 대규모 함대의 포격전 등을 시각화하는 데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 하지만 인디게임인 <FTL>은 대규모 자본투여보다는 함선의 평면도와 승무원 배치만을 저해상도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대신, <스타트렉>에서 익히 선보인 바 있는 '상상 가능한 우주전투'의 전제를 만들고 실제 전투 영상은 모두 플레이어의 상상에게 맡겨 버렸다. (<스타트렉> 드라마판 또한 제작비 문제로 인해 우주전투를 함교 안에서 표현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플레이어의 상상력은 좀더 나래를 펼 수 있었고, <FTL>의 저해상도 그래픽 전투 화면은 생각보다 박진감넘치는 우주 전투의 감각을 제공할 수 있었다.

상상력 질료 2. 여백의 미로 우주를 채워버린 배경음악

<FTL>이 단순한 그래픽과 심플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우주 방랑의 느낌을 강렬하게 줄 수 있는 요소에는 배경음악의 비중도 상당하다. 값비싼 악기나 샘플링을 쓰지 않고 16비트 사운드카드에서나 나올 법한 신디사이저 음을 사용하고 있지만, 에코 가득한 전자음 사이의 여백을 활용해 <FTL>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그래픽 구성과의 연관성도 고려한 기획이다. 만약 화면은 최신 그래픽 엔진을 동원한 화려함의 향연인데 배경음악이 16비트 전자음이었다면 혹평을 면치 못했을 것이나, 화면이나 음향 모두 저해상도 시절의 분위기를 가져오면서 올드게이머들에게는 오히려 8비트-16비트 시절의 도트그래픽과 사운드를 상상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인디게임은 장르 특성상 좀더 매니악한 게이머들에게 더 어필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게이머들에게 고전게임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래픽과 사운드의 조합은 마치 무한도전의 ‘토토가’를 보며 감동하는 30-40대의 감동과 유사한 느낌을 제공할 수 있었다.

* FTL 사운드트랙 전곡 모음집. ‘사운드블래스터’나 ‘adlib’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반가울 소리다.

상상력 질료 3. 로그라이크 장르 - 잘 된 추상화가 끌어내는 게임매체 고유의 재미

이런저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FTL>이 위험하고 고독한 우주를 헤매는 함장의 외로움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이유는 게임 자체가 가진 장르적 특성에 가장 크게 기초한다. <FTL>은 게임장르 내에서는 로그라이크(rogue-like)로 분류되는데, 꽤나 유서가 깊으면서도 게임 매체의 원시적 본질이 가장 잘 살아있는 장르다.

로그라이크란 이름 그대로 '로그' 와 유사한 게임들을 총칭하는 장르로, 대략 1980년대 초반 즈음에 등장한 텍스트 기반의 롤플레잉 게임을 필두로 한다. 로그라이크 게임은 특별한 스토리가 없고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던전 한복판에서 아이템을 얻고 레벨업을 하며 적들을 물리치고 출구로 나가는 것이 목표인 단순한 게임인데, 심지어 최소한의 그래픽조차도 단지 텍스트 문자열로만 표현된 대단히 원시적인 형태의 게임장르다.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가장 유명한 NetHack 3.4.3 버전의 게임화면. 빨간 @가 플레이어이고 세부 상황은 하단의 텍스트로 표기되며, 맵과 오브젝트는 텍스트로만 표현된다. 그러나 룰을 알면 이만큼 재미있는 게임도 드물다. 넷핵 공식사이트에서 직접 받아 플레이할 수 있다.

지금이야 정통파 로그라이크 게임들의 화면을 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가 막힌 그래픽이지만, 사실 로그라이크 장르는 등장 시기에는 무려 충격적 그래픽 게임으로 알려졌었다. 예전 칼럼에서 롤플레잉 게임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했다시피 PC게임은 보드게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초기의 게임들은 그냥 보드게임의 계산을 도와주는 계산기거나 상황을 문장으로 출력해 주는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무려 그래픽(!)이 보강된 로그라이크 장르는 당대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로그라이크 장르가 각광받는 것은 다양한 시청각 효과와 서사로 무장한 현대 게임들에서 치장을 걷어내고 남은 뼈대로서의 게임 본연을 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픽이 화려하지 않아도, 엄청난 스토리가 들어가지 않아도 단지 몇몇 스탯을 구현하고 탐험과 전투의 기초만을 그려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재미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마치 게임계의 화석같은 존재인 것이 로그라이크 장르이다.

로그라이크 장르의 재미는 장르 최대의 미덕인 강력한 추상화에서 비롯된다. 깜깜한 던전, 아무것도 모른 채 심연에 내던져진 주인공. 그리고 생존을 위해 어둠을 탐색하고 적과 전투를 벌이고 살기 위해 식량을 찾고 무기와 갑옷을 구한다는 기본적인 구조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간결하게 구현한 이 추상화 작업은 플레이어에게 자신만의 상상력을 붙일 수 있는 거대한 날개가 된다.

똑같은 로그라이크 게임을 플레이하는 두 사람이 있을 때, <반지의 제왕> 매니아는 모르도르 어딘가를 탐색한다는 심상을 그릴 것이고, <피를 마시는 새>를 읽은 독자라면 두억시니 동굴 어딘가에서 탈출해 나오는 주인공을 상상할 것이다. 상상력을 이길 시각화가 없고, 그 상상력의 질료만을 제공함으로써 로그라이크 장르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본질적 특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장르가 되었다.

그리고 <FTL>은 그 로그라이크 장르의 현대적 계승자이다. <FTL>이 보여주는 단순화와 단순화를 통한 심상의 내면화는 로그라이크 게임들이 갖는 핵심적 공통점이었다. 굳이 복잡한 서사를 첨부하지 않은 것 또한 로그라이크에 대한 경배의 일종이다. 오히려 던전을 중심으로 그려냈던 정통파 로그라이크 장르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우주라는 새로운 광막한 공간에 구현함으로써 <FTL>은 게임 매체가 갖는 본원적 가치에 충실한,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플레이어들에게 충분한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인디 게임: 블록버스터 게임과의 상보 관계

게임은 근본적으로 대중문화 내의 서브컬처로 자리잡혀 있고, 이는 곧 게임이 상업성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높은 퀄리티의 게임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자본은 투여된 만큼의 이윤 회수를 위해 게임 제작에 관여할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블록버스터로 분류될 수 있는 게임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을 포함해야 하고, 이는 이윤회수라는 틀 안에 일정부분 게임의 콘텐츠를 제한하는 효과를 낳는다. 대표적인 것이 <리니지> 등의 성공으로 촉발된 양산형 MMORPG가 일관적으로 유지했던 사냥 - 득템 - 렙업의 공식이 보편화된 케이스다. 그게 재미있다는 사람이 많아 돈이 되고 그래서 유행한 거겠지만, 모든 신작 게임이 똑같이 중세풍의 병장기에 포인트앤 클릭으로 몹을 사냥하는 형태로 출시되는 획일화의 부작용을 낳았다.

영화계에서의 독립영화와 마찬가지로 게임 또한 인디의 세계가 존재한다. 모든 취향이 동일할 수 없고, 다양성의 보장은 또다른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는 법이다. 고립된 유전자적 다양성이 종의 영속성을 해치게 되는 자연의 섭리와 다르지 않게 창작의 영역에서 또한 다양성의 보장은 중요한 이슈다. 수많은 인디게임들은 마케팅적 측면에서 보자면 니치 마켓의 수요를 채울 수 있는 상품이 되고, 창작의 측면에서라면 폭넓은 상상의 기틀을 제공하는 업계의 토양이다. 더군다나 앞서 언급한 바대로 인디게임은 인디에서만 풍길 수 있는 특유의 느낌을 가지고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대작들보다 더 새로운 재미를 보장할 수 있기도 하다.

<FTL>의 출시와 성공은 그래서 결코 작은 인디게임 회사의 명작 하나로만 의미가 남지 않는다. 최초의 킥스타터 성공 게임이기도 한 <FTL>은 인디게임의 영역이 보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증명한 작품이다. 아니 그런 가치를 다 무시하고서라도, 칠흑같은 어둠 속에 알 수 없는 두려움만 가득한 우주를 헤쳐 나가는 고독한 함장의 느낌을 이 수준까지 구현할 수 있는 콘텐츠는 내게 아직 <FTL>만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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