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일부터 11일까지 전시 '언데드'가 열렸던 문래의 대안예술공간 이포의 모습. 입구에서부터 이포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오고 있었다.

지난 13일 새벽, 2007년과 2008년 두 해에 걸쳐 벌어졌던 이랜드 홈에버 노동자들의 파업을 주제로 만든 영화 <카트>가 개봉했고 필자는 그 영화에 대한 리뷰를 작성했다. 전태일 열사의 기일이자,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은 물론 정당한 투쟁마저 '폭력'과 '불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채 전국적으로는 물론 지역 사회 일각으로부터 버려진 존재인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의 해고 무효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선고가 내려지는 날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대작 <인터스텔라>의 가공할 만한 흥행 파워에 밀려 쭉 2위를 찍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 좋은 흥행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쌍용자동차에 대한 대법원의 선고는 <카트>의 흥행 기록보다는 <카트>의 실제 사건인 이랜드 홈에버 노동자들의 투쟁 결말에 좀 더 가까운 내용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못한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2심에서 인정했던 내용을 모두 부정한 뒤 고등법원으로 다시 돌려 보냈다. 한국에서 정리 해고가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와 이를 회피하기 위한 회사 측의 노력이 있었음을 보여야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상하이자동차로 넘겨진 쌍용자동차의 경영진들은 신제품 개발로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 살아남기보다는 모회사가 된 상하이자동차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을 넘기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2008년 미국에서부터 경제위기가 시작되자 쌍용자동차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 다음해 대량 정리 해고 계획을 세웠을 따름이다. 2008년에는 평택시민과 함께한다는 명목으로 노조 위원을 초청하면서까지 인기 유명가수를 대동한 콘서트를 열었던 쌍용자동차였다. 상생은 허울이었고, 모든 회계는 회사에 지나치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러한 해석이 사법부의 최종적인 해석이 되었고, 쌍용자동차는 매우 충분하게 노동자와 동반하여 살아남기 위해 애쓴 존재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2009년 공장에서 농성하며 잡혀가기 직전까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싸웠던 노동자들은 눈치도 모르고 괜히 회사에 남아있는 나쁜 존재가 되었다. 포털 사이트의 댓글은 그들에 대한 비난으로 넘쳐났다.

애써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대법원의 판결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한 근거를 생각했다. 이미 올해 초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제기했던 회계 조작 문제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안진회계법인이 감사조서를 변조했던 사실이 반영되지 않아 많은 논란을 낳았던 처분이었다. 한국GM의 노동자들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 또한 대법원에서 회사 측의 논리가 인정을 받았다. 콜텍 등이 제기했던 정리해고 소송 역시 노동자들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학습지 교사의 노동자 자격에 대한 법원의 인정은 일관되지 않고 계속 왔다갔다 하고 있다. 노동권 신장을 위한 판결도 많았지만 그러한 판결 이상으로 재계를 위한 판결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애초에 몇 십년간 계속 그래왔지 않았는가. 분명 예전보다 나아진 점도 있지만 한국은 노동자들이 생존하기에 무척이나 쉽지 않은 국가 중 하나이다. 특히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노동권을 주장하는 순간 생존은 더욱 힘들어진다. 파업으로 인한 기업의 피해보상 소송에 공권력은 빠르게 대처하지만, 파업 중 발생한 용역, 경찰로 인한 피해에 대한 소송은 매우 미적지근하게 흘러간다. 애초에 그렇게 움직였던 정부였고, 법원 역시 이러한 경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미 쌍용차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자 문득 최근에 본 전시가 생각났다. 철물점과 각종 중소규모 공장으로 가득한 문래에는 최근 몇 년전부터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미국과 중국의 예술가들이 싼 임대료를 찾으러 공장 지대로 몰려들었던 것처럼, 한국 역시 신촌과 홍대에서 밀려난 이들이 문래로 조금씩 모여들고 있다. 그렇게 예술가들이 모이자 자연스럽게 그들을 위한 공간들이 등장했다. 그 공간 중 하나가 바로 '대안예술공간 이포'이다.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실처럼 이포 역시 철물점으로 사용되던 공간을 인수해 전시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다만 삼청동이나 종로의 갤러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최대한 생활공간으로써의 특성을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포는 각종 잡다한 물건을 보관할 창고로 쓰였을 지하 공간, 뒷편에서 식사를 하고 가볍게 차를 마시던 휴식 공간을 그대로 남겨놓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전시장에 어울리지 않을 것과 같은, 생활적 특성이 강한 장소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이포의 특성은 그곳에서 개최되는 전시들에 새로운 느낌을 부여한다.

그리고 지난 3일부터 12일까지 이포에는 '언데드'라는 이름의 전시가 열렸다. 제목만 보면 꼭 최근 나오는 게임이나 영화에서 흔히 볼법한 좀비 같은 존재를 중심으로 다뤘을 전시같지만 이러한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영화 연출을 배웠지만 현재는 사회진보연대와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 지회에서 활동가로 움직이고 있는 홍명교와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그리고 각종 도시의 풍경을 담으면서 사회 참여적 경향을 보였던 사진작가 홍진훤이 결합한 이 전시는 판타지에 나오는 '언데드'가 아닌 한국 사회의 '언데드'적 존재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전시에서 의미하는 '언데드'는 두 가지이다. 바로 최근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죽었다는 의혹을 낳았지만 공식적으로 삼성그룹 측에서 부정한 이건희 회장, 그리고 분명 살고 있지만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뒤에도 제대로 죽지 못하는 (삼성전자서비스의) 노동자이다.

▲ 전시장의 첫 번째 방에는 상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보였다. 그들이 추모하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을 비롯해 세상을 떠난 동료들이다. 그들은 바로 삼성전자서비스의 노동자들이다.

전시장에 맨 처음 들어가면 보이는 방에는 왼편에 사진 한 장이, 오른편에는 지금은 팔지 않는 구형 브라운관 텔레비전에 영상이 흐르고 있다. 사진에는 일군의 사람들이 노란 상복을 입은 채 어떤 건물 앞에 서있는 장면이 담겨 있고, TV에는 동요 '나처럼 해봐요'의 노래에 맞추어 위아래로 분할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영상의 위에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이, 아래에는 서초동에 있는 삼성그룹 본사 빌딩 앞에서 전경들이 에워싸고 있는 현장을 농성 파업을 위해 묵묵히 지나가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모습이 있었다. 당연히 사진 속 상복을 입은 사내들은 TV 속 아래 영상의 사람들과 같은 인물이다. 전시는 지난 5월 노조를 지키라는 유서를 남긴채 자살한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의 죽음을 추모하는 동시에 삼성 측의 노조 인정과 단협 체결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삼성 본관 앞 농성 당시의 모습을 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쪽은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를 알리기 위해 열심히 언론에 자신들을 홍보했고, 다른 한 쪽은 그 한 쪽으로 인해 죽은 존재를 위해서 움직였다. 비슷한 죽음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후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생명에 대한 사실 역시 더욱 많이 퍼졌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전적으로 인지도와 권력에 의거한다. 사람의 죽음에는 경중이 없다고 하지만 이미 모두가 잘 알듯 경중은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이 되었다.

다음 방으로 들어가자 더 구체적인 사진과 영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른편에 놓여진 두 개의 사진은 농성을 위해 봄이지만 추운 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자며 철야 농성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정적이다. 얼핏 보면 생기없이 보이지만 동시에 그 모습은 그 다음 날 더 활기차고 바쁜 투쟁을 위한 준비 동작이다. 왼편에는 매일 밤 수면을 통해 활기를 충전했던 이들이 보였던 모습들이 가득 담겨 있다. 여러 개의 사진을 다닥다닥 붙여 놓아 쉽게 형체를 확인하기 쉽지 않지만 이러한 '꼴라쥬' 작업은 그들이 노동권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이들을 위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한 눈에 들어오게 만들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단순히 본관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각종 집회와 시위를 가지며 건물 안에서 자신들을 내려다 볼 회사 사람들, 그리고 근처를 지나갈 사람들이 보도록 하였다. 만장과 피켓을 들어 계속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들의 권리는 물론 이미 죽은 사람들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인식되기 때문이리라.

오른편 한 구석에는 앞서 보았던 브라운관 텔레비젼보다 더욱 작은 사이즈의 구형 TV가 놓여 있었다. 그 곳에서는 <Make The Way>라는 이름이 붙은 영상이 상영 중이었다. 제목과 같이 정말로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과정이 담긴 영상이었다. 길을 만드는 이들은 투쟁을 위해 움직이는 삼성전자서비스의 노동자들이고, 그들을 가로막아 길을 없애는 이들은 다름아닌 경찰들이다. 경찰들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들이 지나가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해 그들을 '합법'의 틀로 에워싸기에 바빴고, 노조원들은 그들의 과잉된 움직임을 뚫고 나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계속 가만히 있으면 그들의 목소리는 결국 경찰 밖을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들의 목소리는 움직일 때 비로소 더 크게 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상에서 보이는 지리한 대치는 비단 삼성전자서비스 뿐만 아니라 투쟁, 집회, 시위 현장 이곳저곳에서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전시가 다 끝났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입구에 비치된 팸플릿에는 전시가 지하 1층으로 연결된다고 나와 있었다. 잠시 내려갈 길을 찾아보니 구석에 조그맣게 계단이 보였다. 관람객에게 조금은 불친절한 계단 벽면에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싸워온 과정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멀티탭에 집회 진행을 위해 필요한 앰프는 물론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가져온 휴대폰 배터리 충전기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 잠시 집회 현장 가장자리에서 막간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한 모습들을 보고 내려온 지하에는 바닥에 프로젝터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어떠한 영상을 상영하고 있었다. 영상의 제목은 <나처럼 해봐요 : 히든트랙>. 맨 첫 번째 방의 영상처럼 이 영상 역시 '나처럼 해봐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앞서의 영상에서 '나처럼 해봐요'가 삼성 자본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선도를 의미하는 반면 이번 영상은 전혀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 두 번째 방에 붙어있는 일군의 사진들. 그 사진들은 바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원들이 자신들의 노동권과 죽은 동료들, 그리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움직였던 기록을 담고 있다.

영상은 앞서의 사진과 영상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의 '하이라이트'가 담겨 있었다. 바로 노조원들의 춤과 율동이다. 울분의 감정으로만 움직이기 어려운 투쟁의 특성상 대부분의 투쟁에는 조직원들의 마음을 진정하는 동시에 단합을 위해 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단계가 담겨 있다. 하지만 '열사'가 발생한 투쟁의 경우 그러기 쉽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일군의 동료들이 세상을 뜬 상태에서도 활기차고 밝은 모습으로 춤을 추고 율동을 한다. 쉽게 보기 어려운 그 모습에 대하여 팸플릿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왜 자꾸 죽어야 할까. 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춤을 추고 싶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우리는 분명 '열사 투쟁'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다르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래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말대로 그들의 발랄한 움직임은 조금은 어설프거나 어색하더라도 절망과 죽음에서 이겨내고 마침내 살 수 있는 길이 되었다. 비록 이러한 장면들은 대부분의 시위나 집회가 그렇듯이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바로 곁에 있던 노동자들, 그리고 지금 어딘가에서 절망에 빠져있는 노동자들에게 '나처럼 해보면서' 함께 움직이자는 밝고 따뜻한 제언이 되었다.

이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은 긴 투쟁 끝에 단체협상을 맺었다. 비록 삼성그룹 측이 직접 나선 것이 아니라 경총의 대리로 이루어진 단협이었고, 또한 직고용이 이루어지지 않아 각 지역센터별로 다시 각각 단체협상을 해야한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동안 노조를 무시하는 경영으로 일관했던 삼성이 전혀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는 컸다. 현재 대부분의 지역 서비스센터가 단체협상을 완료했지만, 진주서비스센터가 지난 10월 위장폐업을 감행해 노조는 현재 이 문제에 초점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삶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언데드'와 같은 삶에 놓인 이들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최저임금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노동3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 끝없는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빈곤층, 두꺼운 차별의 장막 뒤에 놓인 소수자들, 자식들과 친지들이 죽었음에도 사실상 방치되어있는 세월호의 유가족들. 이렇게 세상에 많은 '언데드'들이 놓여있지만 가장 많이 주목을 받는 것은 그들이 아닌 이건희와 같이 생사를 쉽게 말할 수 없는 이들, 아주 가끔 공권력의 손길이 닿으면 곧바로 휠체어와 마스크와 링거를 달아 스스로 생사를 오가고 있음을 연출하는 이들이다. 매체들이 이들의 '언데드' 여부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진정으로 주목해야만 하는 이들은 소외받고, 어느새 존재는 잊혀져 간다.

존재가 잊혀간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살아도 산 것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정말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강력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이 바로 그러한 상황에 놓인 이들 중 하나가 아닐까. 비록 지금은 법원 판결로 계속 호명되고 있지만 만약 이 판결이 서서히 잊혀지면 그들을 주목하는 자들은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이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중 25명이 스트레스로 인한 각종 질병과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대법원 판결로 한 가닥 희망의 실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고르는 사람이 늘어날 가능성은 너무나도 많다. 그 외에도 더 이상 존재를 호명받지 못하는 존재는 이미 많은데다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언데드' 전시를 통해 드러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모습은 절망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어떠한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비록 전시는 끝났고, 전시가 끝난 그 다음 날 대법원에서의 비보가 들렸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죽는 대신 살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을 도와줘야 한다. 그렇게 함께 움직이는 것이 전시가 말하고자 했던, 삼성전자서비스의 노동자들이 춤을 췄던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 전시장을 나오는 길에 발견한 스티커. 실제로 이재용은 이건희에게 노동조합을 인정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스티커에는 이재용과 이건희를 비롯한 삼성이 진정으로 21세기에 맞는 기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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