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가족오락관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고요 속의 외침’이라는 코너가 인기였다. 귀를 막은 상태에서 옆사람이 외치는 단어를 파악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형식이다. ‘전갈’이 ‘호텔’을 거쳐 ‘오뎅’으로 변하는 과정을 즐기는 게 포인트다. 대통령의 실언을 여당이 옹호하는 광경을 보며 이 코미디가 떠올랐다.

한 가지 확인하자. ‘잡음 제거 음성’이라는 것은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음성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주변의 잡음만 제거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특히 행사장에서 여러 소리가 뒤섞여 있는 음성이다. 발성을 이루는 파열음과 주변 잡음을 완벽하게 구분해 한쪽만 제거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렵다. 방송사들이 ‘원본’이라며 소개한 영상의 음성을 되도록이면 평탄한 주파수 응답을 가진 스피커나 이어폰을 통해 듣고 판단하시길 바란다.

문제는 ‘바이든’이든 ‘날리면(날리믄)’이든 애초에 대통령이 비속어를 말한 사실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선의 대응은 사과를 하고 논란을 조기에 종결시키는 거였다. 대통령도 사람이다.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한 말이라는 걸 국민들도 모르지 않는다. 순방 성과에 대한 평가는 별도로 하더라도 해프닝으로 지나갈 문제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재정공약회의에 참석한 모습 (사진=MBC 보도화면 갈무리)​
윤석열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재정공약회의에 참석한 모습 (사진=MBC 보도화면 갈무리)​

대통령실의 대응은 15시간이나 지나서 나왔다. 상당한 고민을 했으리라 본다. 그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 사과나 유감 표명이 아니라 사실관계 정정인 이유, 그러니까 대통령이 한 말이 절대로 ‘바이든’이면 안 되고 ‘날리면’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미국 사람들을 모욕해 컨트롤 할 수 없는 외교적 문제를 만드는 것보다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국내 문제로 소화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실의 대응이 외신 보도의 흐름을 바꾼 것도 아니고, 미국 정부도 어쩌다 돌발적으로 나온 발언 그 자체를 크게 문제삼는 분위기는 아니다. 사실관계를 다투자는 것은 불필요한 수준의 대응이다.

문제는 비속어 사용의 대상이 미국이냐 한국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아냥은 전염병 공동대응을 위한 글로벌펀드 재정공약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48초간 대면한 직후에 나왔다. 이 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60억 달러를 낼 테니 목표치인 180억 달러를 함께 달성해보자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바이든’을 겨냥한 것이었다면, 이 약속의 달성 가능성을 의심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글로벌펀드를 위한 각국의 노력 자체를 가볍게 보고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도 유엔총회 연설에서 글로벌펀드 기여 강화를 약속했다는 점이다. 스스로 말한 것조차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반면 비아냥이 대통령실의 해명대로 한국을 겨냥한 것이었다면 최소한 진정성은 지켜낼 수 있다. 1억달러 공여를 약속했는데 이를 지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다는 취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실의 대응은 한편으로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다. 실제 전문가들도 판별이 어렵다고 말하는 음성의 진위를 놓고 장기간 옥신각신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이런 식의 논란은 빨리 종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어떤 방향이든 대통령의 사과 혹은 유감 표명이 필요하다. 대통령실의 해명이 맞다고 해도 협력을 구해야 할 국회와 야당을 대상으로 비속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선 수습이 필요하다는 점은 여당 내에서도 지적이 나오는 바다.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러나 대통령과 여당의 태도를 보면 그런 대응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언론의 보도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불분명한 음성에 ‘바이든’이라는 자막을 달아 잘못된 선입견을 심는 무책임한 보도로 국익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최초에 영상을 올린 MBC의 경우 내부에서 더불어민주당과의 내통(?)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여당은 당장이라도 과거 ‘공영방송 장악’과 유사한 논란 속으로 뛰어들 태세를 갖추는 분위기다.

보도도 되기 전에 취재한 사실관계가 더불어민주당에 정치적 이유로 유출되었다면 부적절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건 그 취지와 내용을 따져 방송사가 취재윤리 등의 책임을 물어 내부적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다. 지금은 유출이 된 것은 맞는지, 되었다면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등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정치권이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며 언론을 흔드는 이 상황, 과연 바람직한가?

모든 쟁점을 뒤섞어서 ‘좌파의 음모’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대안적 사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과 윤석열 후보는 더불어민주당이 조국 전 장관 사태 이후 검찰개혁 이슈를 밀어붙이면서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를 해왔다고 비판했다. 이럴 거면 그런 비판은 뭐하러 했는지 의문이다. 정부 여당의 이런 대응은 언론 자유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세운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다.

대통령은 출근길에 “사실과 다른 보도로서 동맹을 훼손하는 것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며 “이 부분에 대한 진상이 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했다. MBC-좌파-민주당 음모론에 힘을 실은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의 예고편을 지난 대선 때 이미 목도한 바 있다. ‘고발사주’를 ‘제보사주’로 엎어치기 한 게 바로 그것이다. 지금 윤석열 정권은 코미디를 스릴러로 바꾸는 아주 위험한 영역으로 발을 들이고 있다.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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