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영광 객원기자] 지난 9월 10일 MBC는 방송의 날 특집으로 다큐멘터리 <암흑 속의 횃불>을 방송했다. <암흑 속의 횃불>은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다큐로 동아일보 기자들이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의 언론탄압에 저항하다 해직된 후 오늘날까지 쉼없이 이어온 자유언론 실천 운동의 기록을 담았다.
오는 10월 24일이면 ‘자유언론실천선언’ 50돌을 맞는다. 선언일보다 훌쩍 앞서 방송된 <암흑 속의 횃불> 제작 이야기를 들어 보고자 지난 9월 19일 서울 충무로역 근처에 있는 뉴스타파 함께센터에서 이 다큐멘터리 연출한 박정남 PD를 만났다. 다음은 박 PD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암흑 속의 횃불> 연출하셨는데 방송 끝낸 소회가 어때요?
“이번 다큐 같은 경우 무사히 방송 나갔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자칫 방송 못 나갈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솔직히 있었거든요. 이 다큐를 봄에 제안 받았는데 10월 24일에 맞춰 방송하려고 계획했거든요. 그런데 MBC 사정도 녹록지 않은 데다 이진숙 방통위원장이 임명되면서 잘못하면 방송 못 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방송을 빨리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MBC에서) ‘방송의 날’에 맞춰 편성 하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방송의 날은 9월 3일인데 그날이 이번에 대본 쓴 정재홍 작가가 <PD 수첩> 하는 날이에요. 그날은 도저히 불가능해 한 주 미뤄서 9월 10일 방송하게 됐습니다. 사실 후반 작업하는 데 힘이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방송이 무사히 나가게 돼서 정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이번 다큐는 제안 받아서 한 건가요?
“제가 지금부터 10년 전에 자유언론실천선언 4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거든요. 올해 초쯤 뉴스타파에서 50주년 공식 다큐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었고 거기에 MBC에서도 제안이 왔어요. 사실 준비 중이었던 아이템을 MBC에서 하게 된 거죠.”
40주년 때 공부해둔 기본이 있으니 별다른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겠네요?
“해둔 공부가 있지만 많이 잊어버려서 다시 읽었죠. 40주년 다큐 <40년> 제작 때 기초가 됐던 게 『1975』라는 책이었어요. 그리고 『동아투위 30년사』라는 책이 있었는데 이번에 기초가 됐던 책이 『동아투위 40년사』예요. 옛날에 봤던 책, 자료들을 다시 다 보게 됐죠.”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있을까요?
“40주년 때는 백지광고를 냈던 사람들 이야기를 거의 못 담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백지광고 냈던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았어요. 제가 이번 프로그램하면서 ‘누가 도와주나’ 하는 느낌을 몇 번 받았거든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73동인회’라고 문학 작품을 하던 사람들이 신춘문예에 당선돼서 당선금으로 백지광고를 냈거든요. 이태호 작가라는 분이 실명으로 광고 냈는데 이 분을 만났어요. 만나서 한참 얘기를 들었는데, 당시 대학가나 진보적인 분들 사이에서 백지광고 내는 게 약간 유행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해요.
그래서 백지광고 낸 사람들이 누군지 찾아보곤 했다는데, 그때 그분이 분명히 백지광고에 ‘꽃나라’라는 노래 악보 낸 걸 봤대요. 가명으로 악보를 냈는데 조각가 이일호 씨라고 해요. 이일호 씨가 꽤 유명한 분이거든요. 그러면서 이일호 씨에게 연락해서 확인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조각가협회 통해서 이일호 씨에게 연락했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알았냐며 본인이 맞다고 하셔서 또 이분 만나 그 스토리를 쭉 들었어요.
곡이 있잖아요. 곡이 있으면 노래를 해야 하는데 이분은 나이가 많으세요. 때문에 노래하기 힘드셔서 이 노래를 누구에게 맡길지 고민했죠. 그런데 꽃다지의 보컬인 김혜윤 씨가 제 대학교 후배예요. 여자분에 맡기면 혜윤 씨고, 남자분에게 맡기면 손병휘 씨라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 어느날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양한수 위원 모시고 촬영하고 있는데 손병휘 씨가 지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바로 손병휘 씨를 섭외했어요.
그리고 프로그램이 아무래도 언론운동 하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하는 이야기와 함께 70년대 대학가 분위기를 듣고 싶어서 이상돈 전 의원을 섭외하려고 했죠. 이상돈 전 의원에게 전화해서 사정 얘기 했더니, 알고 전화했냐며 자기도 백지광고 냈다고 하더라고요. ‘정권은 무상하되 자유언론은 영원하다’라고 광고 낸 게 있대요. 한번 찾아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백지광고가 어마어마한 숫자예요. 근데 찾아야 하잖아요. 다행히 이틀 만에 찾아서 이상돈 교수에게 보냈더니 너무 반가워하면서 오라고 해요. 그래서 갔죠.
또 양산에 촬영하러 갔었어요. 당시 이화여대 1학년생이 백지광고를 냈어요. 김혜숙 씨라는 분이 했는데, 가보니 세 자매인데 세 자매 전부 이화여대 출신이고 전부 백지광고를 했대요. 그때 냈던 광고들을 아직도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이런 분을 연이어 만나면서 이 프로그램 뭔가 되나 보다란 느낌을 받았어요.”

동아투위 해직 언론인들이 역사박물관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있을까요?
“<40년> 만들 때와 50주년 이번 다큐 만들 때 제일 큰 차이점 중에 하나가 동아투위 휘호가 나왔단 점이에요. 5년 전쯤 돌아가신 동아투위 한 위원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휘호가 나왔어요. 그래서 동아투위 위원들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기증하신 거예요.
저는 화선지 같은 데 쓴 족자인 줄 알았는데 가서 보니 벽지더라고요. 정말 놀랐어요. 벽지에다 일필휘지로 쓴 건데 그렇게 큰 글자 쓰기는 서예를 많이 하신 분 아니면 힘들어요. 돌아가신 이계익 위원이 쓰신 건데 그게 역사박물관 현대사의 한 섹션으로 전시돼 있어요. 어르신들에겐 거의 심장과 같은 휘호죠.”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이 됐지만 지금 상황에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동아투위 위원들이 읽은 선언문에서 ‘언론의 자유라는 것은 당국에서 허락하거나 국민 대중에게 가져다 쥐여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부분이 저는 제일 와닿았어요. 언론인 스스로의 각성을 요구하는 거거든요. 그 부분을 지금 언론인들이 충분히 받아 안아야 하는 상황이죠.
사실 당시 언론 수용자들에 대한 입장이 거기에는 안 들어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 부분이 더 들어갔어야 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언론인들 스스로의 각성을 통해서 언론의 자유 쟁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지금도 와닿고, 특히나 지금 더욱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언론사에 중앙정보부 기관원이 상주했다고 나오던데 감시 목적이었나요?
“그럼요. 제가 알기로는 90년대까지도 기관원들이 방송국에 오갔다고 들었어요. 신문사로 출근하던 7개 부처 기관원들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요. 다 간섭하고, 특히 중앙정보부 같은 경우는 ‘이거 빼라 저거 빼라’라는 지시, 간섭이 엄청났었고 말 안 들으면 남산에 끌고 가서 폭행했어요. 송건호 선생 같은 경우도 자유언론실천선언 하루 전날 남산으로 끌려갔었잖아요. 10.24에 맞춰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던 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예요.”

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할 때 동아일보 기자들은 비장한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한 200명 정도가 모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기자들뿐만 아니라 PD, 아나운서 같은 직군도 같이했었요. 당시 동아일보사 구조가 2층이 공무국이고 3층은 편집국, 4층 5층이 동아방송이었을 거예요. 한꺼번에 다 모였고, 그 족자를 쫙 펴고 선언문 읽는 순간 모두가 전율을 느꼈다고 표현하시더라고요.”
군부독재 하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 준비 과정 자체가 기미독립선언 때만큼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래서 기자들 집에 모여 준비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겁나지 않으셨냐고 질문했는데 겁나지 않았대요. 해야 할 일을 하는 거고 잘리면 할 수 없지라고 생각했고, 잘려도 다들 복직이 될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50년 동안 못 돌아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안 했다고 해요.”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동아일보 기사가 달라졌었나 봐요?
“많이 달라졌죠. 당시에는 맨날 하던 얘기가 ‘시위 기사 1단 깨기’였어요. 1천 명이 시위해도 10명이 시위를 해도 1단이었죠. 근데 시위의 규모와 중요도를 생각해서 기사의 단수를 늘려야 한다는 식으로 계속 싸워나갔던 거예요.
그때 동아일보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콘텐츠 중 하나가 ‘고바우 영감’이었거든요.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의 섹션에 그 시위 기사들을 묶고, 그다음에 굵은 선을 쳤어요. 그러면 그게 톱기사처럼 보이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10.24 선언부터 이듬해 3월 17일 기자들이 쫓겨날 때까지의 그 기간이 언론의 해방구였고, 그 역할을 동아일보가 해낸 거죠.”

이후 동아일보에 광고가 안 들어왔잖아요. 정부가 자유언론실천선언 때문에 압력 넣은 건가요?
“광고주들, 기업에 압력을 넣었어요. 중앙정보부와 국세청이 동원되면서 광고가 빠지기 시작한 거죠. 당시에 동아일보가 어떤 신문이었냐면 광고를 내기 위해서 줄서던 신문이었어요. 광고 효과가 가장 좋은 신문이었기 때문에요. 특히 제약회사 광고들이 줄을 섰죠. 지금은 신문이 32면까지도 나오지만 그때 당시에는 8면이었어요. 8면 안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되게 경쟁이 치열했죠. 그런데 가장 광고 효과가 좋은 신문에서 광고를 빼야 되는, 그렇게 어이없는 상황이었다고 해요.”
그런 상황에서 시민들이 광고를 낸 건가요?
“맞아요. ‘이름 없는 시민’이 낸 광고가 있었는데 나중에 DJ(김대중 대통령)로 밝혀지죠. 그게 초창기 광고였고, 이후 시민들이 낸 광고가 실리게 됩니다. 근데 거기서 하이라이트는 [암흑 속의 횃불]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서 낸 전면광고였는데, 진짜 대단한 거죠.
그리고 그 부분이 또 아이러니한데 기사는 검열해도 광고를 검열할 순 없잖아요. 정의구현사제단이 전면광고를 산 건데, 거기에 실리는 내용은 누구든 간섭할 수가 없거든요. 그 당시까지 사제단이 썼던 모든 성명서를 압축해 전면광고를 넣은 거예요. 1월 초 기사였고, 그게 엄청난 화제가 됐었죠.”

75년 3월 17일이 동아투위 역사에서 중요한 날이었을 것 같아요.
“3월 17일 젊은 기자들이 신문 제작거부에 들어갔었어요. 당시에 정연주 기자를 비롯한 젊은 기자들 20명 정도가 2층 공무국을 점거하고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동아일보가 신아일보 등에서 신문을 내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분들은 굶고 있었고 또 3층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새벽에 술 취한 폭도들이 왔다고 얘기하더라고요.
문을 잠그고 있었는데 동아일보 지국에서 이런 사람들하고 깡패들 동원해서 용접기로 문을 따고 들어와서 두들겨 패서 끌고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50년 동안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 이후에 바로 동아투위가 결성됐어요.”
당시 동아일보가 132명의 언론인을 해고했던데.
“그게 동아일보가 몰락하는 서막이죠. 그때 이부영 위원 같은 경우도 KBS, 중앙일보를 거쳐서 동아일보에 입사했거든요. 당시 동아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신문사를 몇 번 거쳐서 들어가던 곳이었어요. 그 정도로 인재들이 몰렸던 곳인데 한 세대가 끊겨버린 상황이 됐죠.
그리고 정연주 기자가 동아투위 막내 기자예요. 왜냐하면 노조 결성하면서 신입사원을 안 뽑았어요. 그래서 정연주 위원은 나올 때도 막내였고 동아투위의 영원한 막내예요. 그랬던 상황인데 거기서 기사를 한참 쓸 부장급들도 많지 않았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한꺼번에 정리해버린 거기 때문에 그다음부터 동아일보가 힘을 잃어버렸어요.”
엔딩에 동아투위 위원들이 지난 8월 21일 MBC 앞에서 열린 [힘내라 공영방송! 지키자 MBC] 시민문화제에 발걸음하는 장면을 담았잖아요.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동아투위 어르신들이 지금도 언론에 관련된, 그리고 대한민국 민주화에 관련된 현장을 계속 찾아다니세요. 그 모습 중 하나이고 ‘공영방송 지키자’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넣었죠. 근데 그 장소가 정말 아이러니한 장소예요. 거기가 그분들이 쫓겨났던 일민미술관 바로 건너편이고, 동화면세점 자리는 옛날에 동아투위가 쫓겨난 이후 임시 사무실로 썼던 세종여관이 있던 자리예요. 그 중간이 집회 장소였어요. 그런 상징적 의미가 있어서 그 장소에 가신 걸 엔딩신으로 쓴 거죠.”

동아투위 어르신들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시나요?
“농담 반 진담 반일 텐데 ‘내가 이러려고 50년 싸웠나’라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50년 전 상황이나 지금 상황이나 다르지 않다고 보고 계시는 거죠. 50년 전에는 중앙정보부와 국세청을 통해서 탄압했다고 하면 지금은 검찰, 감사원, 방통위, 방심위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관을 동원해서 언론통제하려고 하잖아요. 지금 상황 보면서 권위주의 정권은 속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계속 느낀다고 하시죠. 이제 다들 팔순이 되셨거든요. 항상 하시는 말씀이 내가 눈 감기 전에 이런 상황들이 해소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에요.”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지금의 언론인에게 주는 메시지는 뭘까요?
“‘언론의 자유라는 건 당국에서 허용하는 것이나 국민 대중이 가져다 쥐여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게 핵심인 듯해요. 언론인 스스로의 각성을 요구하는 선언인데, 그분들은 그 각성을 가지고 50년 언론운동을 해오셨고 현재에도 시사하는 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정동익 위원이 인터뷰 마지막에 이런 말씀하셨어요. ‘국민만 믿고, 기사 제대로 쓰면 잘려도 두려워하지 마라. 잘리면 불안하지만 나를 보면 알지 않냐. 나 50년 잘린 생활했는데 다 먹고 살 방법이 있고, 내가 세상에 얘기할 수 있으면 된다’는 말씀이었어요.”
취재하며 느낀 점이 있을까요?
“저는 한 번도 정규직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라 해고 당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몰라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저런 위치에 있다가 해고되고 50년을 길바닥에서 싸운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동아투위 어르신들의 삶을 평가할 때 ‘지사’적 삶을 살았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지사적 삶은 어떻게 보면 언론의 독립운동이겠죠. 이런 삶을 50년간 지속해온 그 의지에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그분들 보면서 저도 그런 삶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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