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방송을 위해 노사 합의로 만든 공정방송위원회(이하 공방위) 제도가 KBS에서 영 맥을 못 추고 있다. 지난 8월 ‘휴가철’이라는 이유로 공방위를 열지 않았던 KBS 사측은 이번에는 “연말이라 바빠서…”, “집행 간부가 임명된 지 얼마 안 돼서” 등의 이유를 들어 또 다시 공방위 개최를 거부했다.

KBS 노사가 맺은 단체협약에 따르면 매월 셋째 주 금요일에 정기 공정방송위원회가 열리게 돼 있다. 그러나 KBS 사측은 지난 18일로 예정됐던 공방위 개최 여부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야 구두로 개최 불가 의사를 통보했다. 사측의 거부로 파행을 겪지 않았다면, 고대영 사장 취임 후 처음 열리는 이번 공방위에서 벌써 반 년째 불방 중인 특집 프로그램 <훈장> 불방 사태와 최근 열린 집회 시위에 관한 보도 문제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훈장>은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 2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KBS 내부에서는 친일 행적자와 일본인들에게 훈장이 가장 많이 수여됐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이야기를 다룬 <친일과 훈장>이 민감한 내용이기 때문에 방송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시사제작국 간부들이 삭제를 요구한 부분이 ‘박정희 대통령이 기시 노부스케 총리에게 보낸 친서’가 등장하는 부분이라는 게 10월 드러나면서 이 같은 주장에 더 힘이 실렸다. <훈장> 제작진들은 수차례의 데스킹과 원고 수정을 거쳤지만 여전히 방송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다. (▷ 관련기사 : KBS ‘훈장’ 삭제된 내용은 ‘박정희가 기시 노부스케에 보낸 편지’)

▲ 대한민국 훈장 (사진=KBS)

“공정방송을 위한 최소한의 의지라도 갖고 있다면 논의의 장으로 돌아오길”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권오훈, 이하 새 노조)는 22일 낸 성명에서 사측이 “집행 간부가 임명이 된 지 얼마 안 됐다”, “연말이라 바쁘다” 등의 이유로 공방위를 거부했다며 “고대영 사장과 사측이 공정방송을 위한 최소한의 의지도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고 일갈했다. 실제로 KBS 공방위는 지난 6월 2일을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파행을 겪고 있다. 9월 초 한 차례 열린 회의는 본부장 신임투표 결과에 따른 인사조치 요구 건만을 다뤘다.

새 노조는 “이 과정에서 당초 지난 5월 방송 예정이었던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 2부작 프로그램은 당초 예정일에서 반 년 넘도록 방송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방송 날짜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며 “사측이 제작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내용 수정을 요구하며 방송을 불방시키면서, 이에 대한 제작진과 제작실무자 대표들의 문제 제기는 아예 원천봉쇄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새 노조는 “‘법과 규정을 벗어나는 행위에 대해서는 원칙대로 대응할 것’이라는 고대영 사장의 취임사대로 공방위 또한 정상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취임사가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고 사장과 사측은 안면몰수하고 기존의 법과 규정조차 지키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것이 고 사장이 말한 ‘위기를 함께 극복해갈 동반자’인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이며 ‘상호 존중’의 자세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현재 편성규약과 단체협약 등 각종 공정방송을 위한 제도적 장치에 대한 사측의 도발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공방위뿐만 아니라 기자협회가 편성규약에 보장된 보도위원회 소집을 수차례 요구했지만 사측은 이 또한 정당한 근거 없이 수개월째 거부하고 있고, 최근에는 편성규약에 보장된 기자협회장의 편집회의 발언조차도 문제를 삼고 있다”며 “우리의 인내심을 더 이상 시험하지 말길 바란다. 사측이 공정방송을 위한 최소한의 의지라도 갖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이를 위한 논의의 장으로 조속히 돌아오길 바란다”고 경고했다.

교섭대표노조인 KBS노동조합(위원장 이현진, 이하 KBS노조)도 같은 날 성명을 내어 “‘연말이라 집행기관들이 바쁘다’, ‘임단협 협상도 진행 중이라…’라는 사유가 말이 되는가? 공방위에 참석할 부사장과 본부장, 국장들이 모두 임명된 마당에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KBS노조는 “공방위는 편성·제작·보도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노사의 공식 회의기구다. 1990년대 KBS노동조합 투쟁의 산물로 그동안 255차례에 걸쳐 열렸다. 교섭대표노조가 소집 요구를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새 노조의 요청 또한 충실히 반영했다. 양 노조의 강고한 연대가 가장 잘 이뤄지는 부분이다. 안건 선정이나 지향점에 있어서 작은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나, 보다 큰 공정방송에 대한 열망은 같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KBS노조는 “공정방송은 근로조건”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의 판결을 언급하며 “단협으로 월 1회 개최하도록 돼 있던 정례 회의가 열리지 않은 것에 대해 재판부는 ‘MBC 경영진의 절차 무시 행위로 방송 공정성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으며, 이는 근로조건에 관한 분쟁에 해당된다’고 판시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사측이 다음번에도 정례 공방위를 또 회피하려 할 경우 조합은 단체협약 위반으로 고발하겠다는 입장을 밝혀둔다. 이럴 경우 모든 책임은 공방위의 사측 총책임자가 지게 된다는 사실을 전진국 부사장은 똑똑히 기억하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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