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다시 한 번 들썩이고 있다. 2013년부터 준비했고, 정부와 대법원까지 정보공개 청구소송으로 다투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올해 6월~7월 중 방송될 예정이었던 <훈장>이라는 2부작 프로그램이 돌연 ‘붕 떠’ 버렸기 때문이다. <훈장>은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 2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작진과 내부 구성원들은 친일 행적자와 일본인들에게 훈장이 가장 많이 수여됐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이야기를 다룬 <친일과 훈장>의 ‘민감함’ 때문에 회사가 방송일자를 확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문제제기하고 있는 중이다. 방송일자가 잡히지 않아 ‘방송 여부’조차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최근 <훈장> 제작진이 전부 인사조치돼 의혹은 증폭되고 있다.

KBS는 유독 ‘역사 프로그램’ 때문에 안팎으로 시끄러웠던 적이 많다. 올해만 해도 이승만 정부가 한국전쟁 때 일본으로의 망명을 시도했다고 단독보도한 후 종북좌익척결단 등 극우단체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광복 70주년 프로그램 <뿌리 깊은 미래>도 좌편향적 역사관이 투영됐다는 이유로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에게 질타 당하는 사례가 있었다. 두 프로그램 모두 뉴라이트 사관을 지닌 역사학자 이인호 이사장이 직접 언급하며 문제 삼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앞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백선엽 예비역 대장에 대한 다큐는 각각 ‘독재자’와 ‘친일 부역자’를 미화했다는 이유로, 작곡가 정율성에 대한 다큐는 공산주의자를 KBS에서 다루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비판 받은 바 있다. 박근혜 정부 취임 초 방송된 <다큐극장>은 박정희 대통령 업적을 부각하는 아이템이 대다수여서 기획 단계부터 반발에 부딪쳤다.

살아있는 친일파를 ‘전쟁 영웅’으로, 백선엽 다큐

2011년 5월 18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KBS가 6·25 특별기획으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돼 있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다룬 <전쟁과 군인>이라는 2부작 다큐멘터리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군의 살아있는 전설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조명함으로써 전쟁의 참상, 조국의 소중함, 전쟁이 주는 교훈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방송에 앞서 열린 <공영방송 KBS 이승만 백선엽 찬양방송,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는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하면서 저지른 죄행에 대해 단 한 번의 공식 사죄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한 백선엽을 느닷없이 오성장군인 ‘원수’로 추대하려 하고, 동상을 만들어 세우고,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하면서 억지로 영웅을 만드는 것이 과연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가”(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간도특설대는 ‘반인륜적 테러를 저지른 무장집단’으로 정사에 기록돼 있음에도 (미화 다큐가 방송되는) 황당무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의 KBS는 왜정 때 경성방송국의 행태의 모습”(조영건 전 사월혁명연구소장) 등 내용의 비판이 나온 바 있다.

▲ 2011년 6월 24일 방송된 백선엽 예비역 대장에 대한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

국내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가 KBS에 방송 중단을 촉구하는 등 역사단체와 언론시민사회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에 대한 다큐 방송에 심각한 우려를 표해왔다. 당시 광복회는 “백선엽은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인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했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 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라며 “‘국민의 방송’이라는 KBS가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백선엽 찬양 다큐멘터리 방송을 굳이 송출하겠다는 행태는 아무리 봐도 설득력이 없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이에 KBS는 “비록 백선엽의 젊은 시절에 대한 친일 논란이 있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취재한 6.25 전쟁에서의 그의 공은 별개의 사안이다. 그의 과에 대한 평가는 다음 과제로 별도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답했고,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다룬 다큐 <전쟁과 군인>은 예정대로 2011년 6월 24일, 25일 양일 간 방송됐다.

방송 직후 수신료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 공영방송이 친일파를 영웅화한 것에 대해 분노하는 의견이 속속 올라왔으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 역시 그 해 7월 21일 ‘문제없음’ 결론을 내렸다. KBS이사 출신인 권혁부 위원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 덕분에)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데 백선엽 장군을 좀 미화한들 뭐가 문제 되느냐”고 반문했고, 다른 여당 추천 위원들도 ‘제작자율성’을 존중한다며 “문제없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겨 보겠다는 의도의 프로그램인데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비중이 지나치다는 지적이나, 방송 내내 친일 전력 설명이 전무하다시피 한 것은 공정성과 균형성을 위반했다는 야당 추천 위원들의 지적은 ‘소수’라는 한계로 묵살됐다.

반 년 미뤄진 방송, 심의위 법정제재 ‘고초’… 정율성 다큐

2011년 8월 14일, <KBS스페셜>에서는 중국 혁명음악의 대부인 음악가 정율성의 생애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방송 나흘 전, KBS이사회 간담회에서 여당 추천 이사들이 ‘친일도 나쁘지만 친북은 더 나쁘다’는 논리로 제작진을 심하게 질책했고 일부 이사는 이사직까지 걸며 ‘정율성 다큐’ 편성을 막겠다고 주장했다. 황근 이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율성은 독립운동은 극히 일부분만 했고 평생을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KBS에서 조명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라고 말했고, 결국 14일에는 <기억의 재구성 1945. 8. 15.>라는 프로그램이 대체 편성됐다.

정율성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자문을 맡았던 노동은 중앙대 국악과 교수는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정율성은 일본 군국주의에 맞서 민족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노래했던 음악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정율성과 관련해 중국과 문화 교류를 하고 있고, 광주에서는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수 년째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KBS 여당이사들이) 역사를 자꾸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각으로 정율성 다큐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유감스럽다”고 전했다.

<KBS스페셜> PD 일동은 “만약 사회주의 전력을 문제 삼아 독립운동가들을 다룰 수 없다면 우리는 실존했던 독립운동 세력의 80%를 역사 속에서 지워야 한다. 이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라며 여당이사들의 반발을 “느닷없고 시대착오적인 문제제기”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경영진의 사과와 재발방지, 방송 보류된 정율성에 대한 다큐의 즉각 편성 및 방송을 요구했다.

KBS노동조합도 “정율성은 이미 그의 탄생지인 광주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추모사업 또한 활발하게 진행 중인 인물”이라며 “제작자율성 수호의 화신임을 자처했던 사측이 이사들의 지적을 두고 사실상 1년 전부터 기획해 온 프로그램을 갑작스럽게 방송 보류하는 게 과연 온당한 처사인가”라고 비판했다. KBS PD협회 또한 “KBS의 친일인물 다큐멘터리에 대한 비판을 모르쇠로 일관하던 그 기개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이었는지 그들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라며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찬양하는 다큐 방송을 강행하면서도 정율성 다큐는 편성을 즉각 보류한 사측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 2012년 1월 15일 방송된 정율성 다큐

정율성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해를 넘긴 2012년 1월 15일에야 한중 수교 20년 기획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이란 제목으로 겨우 방송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방송된 이후에도 고초를 겪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2012년 1월 방송된 정율성 다큐를 2년이나 지난 2014년 1월 9일에 심의해 중징계를 예고했고, 그 해 6월 22일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를 위반했다며 방송사 재허가 시 감점되는 법정제재 ‘주의’(벌점 1점)를 의결했다.

독립운동 단체들 집단 항의에도 막지 못했던 이승만 다큐

KBS의 역사 프로그램 중 가장 논란이 뜨거웠던 작품은 2011년 9월 중 방송됐던 ‘이승만 다큐’다. KBS는 2010년 12월 24일 개편설명회에서 건국 60주년이 지난 만큼 가감 없이 건국 중심인물을 객관적으로 다룰 시기가 됐다며 2011년 8월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제1공화국>(가제)을 방송하겠다고 밝혔다.

당장 내부에서부터 반발이 나왔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이하 새 노조)는 “이승만 특집은 이승만 독재를 부인하고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도록 한 헌법정신에도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새 노조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 10명을 조사해 방송한다던 당초 계획과 달리 ‘이승만’에 방점을 맞추겠다고 선언한 점, “이승만은 대단한 사람이고 방송에서 한 번 다뤄 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김인규 사장의 발언 이후 추진됐다는 점 등을 들어 절차적, 내용적으로 하자가 있다고 말했다.

인물과 공과를 모두 다루는 객관적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는 KBS의 해명과 달리 기획안에 따르면 ‘이승만 다큐’는 △개화청년 이승만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대한민국을 건국하다 △이승만과 한국전쟁 △제1공화국의 명과 암 등 ‘이승만’ 개인을 부각하는 내용이었다.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는 그 해 7월 15일 KBS를 항의 방문해 “만약 KBS가 이승만의 공과를 균형 있게 다루지 않으면 건국 훈장 반납 등 극한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으나, 백선엽 예비역 대장에 대한 다큐 때처럼 ‘방송 중단’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다큐 방송 문제는 4·19 혁명 단체, 6·25 민간인 희생자 유족 단체, 언론단체 등 총 97개로 구성된 ‘친일독재 찬양방송 저지 비대위’까지 탄생시켰다. 비대위는 간도특설대 출신의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영웅으로 미화해 방송한 것에 대해 사죄하고, 학살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5부작 특집 제작을 즉각 중단할 것 등을 요구했다. 2011년 8월에는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진면목 △분단과 전쟁책임 △정치보복 △민간인 학살 △반민특위 해체 △헌정파괴 및 민주주의 압살 등 6개 주제로 이뤄진 <이승만 진실 찾기 자료집>을 펴냈고, 비대위 원로 125명은 “오직 우리 역사를 올바로 기억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주장하며 ‘이승만 다큐 전면 중단’ 촉구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이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을 건국하다’라는 제목(3편)부터 뉴라이트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표현하는 것은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헌법을 부정하는 행태’”(서중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5편은) 거의 모든 내용이 이승만 전 대통령 업적에 해당할 수 있는 부분”(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라는 전문가들의 비판도 이어졌다.

그러나 KBS는 방송을 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조인석 KBS 다큐멘터리 국장은 조선일보 기고를 통해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기획의) 첫 번째 인물로 선정한 것은 그의 삶이 우리 근현대사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라며 “KBS 본관 앞에서 일부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이승만 편 방영 반대 집회를 가졌으나 이 때문에 방영을 늦출 수도 없고 당길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 다큐는 5부작에서 ‘개화와 독립’, ‘건국과 분단’, ‘6·25와 4·19’ 3부작으로 축소돼 2011년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 연속으로 방송됐다.

▲ 2011년 9월 29일 방송된 이승만 다큐

KBS는 4·19 혁명 단체 등 시민사회의 거센 비판 때문에 방송 내용을 일부 변경했으나 △이승만이 권력장악을 위해 자행했던 행동, 김구 암살 관련 의혹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관련된 언급이 없다는 점 △정부 수립 이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와 역사를 파탄낸 범죄적 행동, 인권탄압, 고문, 학살 등 반민주적 만행에 대한 언급이 충분치 않은 점 △부정선거와 부패행위가 대한민국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한 점 등 날카로운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방송 이후, 시청자들은 “3류 드라마도 아니고 온몸이 오그라들 정도”, “약속했던 공정성은 거의 눈에 띄지도 않고 완전히 이승만 찬양 홍보 전단지였다” 등의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비대위는 “기획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짜깁기 수준의 다큐”라고 혹평했고 민언련은 이 다큐멘터리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과오와 의혹을 축소, 외면하거나 교묘하게 왜곡했으며, 객관성과 균형을 상실한 ‘이승만 띄우기’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23편 중 12편이 ‘박정희 향수’ 아이템, <다큐극장>

2013년 3월 5일, 새 노조는 KBS가 4월 봄 개편에서 박정희 시대를 미화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 열흘 남짓 됐을 시기였다. <그때 그 순간>(가제)은 박정희 정권 18년을 중심으로 현대사를 다룰 수 있다는 위험성, 개편 실무 막바지 시기까지 정확한 실체를 밝히지 않은 점, 시사 및 역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내부 인력을 배제한 채 졸속 추진하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목됐다.

KBS <역사스페셜> 등 역대 역사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PD들조차 “중차대한 역사 프로그램을 몰래 준비한 경우는 어떤 방송사에서도 없던 일”이라며 “박근혜 정부 출범과 동시에 이런 방송이 나가면 KBS는 정권에 아부하는 방송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KBS이사회조차 ‘프로그램의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며 다수가 우려를 표했고, 양대 노조는 <그때 그 순간>으로 대표되는 ‘졸속 개편’을 강력 비판했다.

▲ 2013년 6월 15일 방송된 <다큐극장>

2013년 봄 개편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였고, 내부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으나 “여러분이 그렇게 우려하고 걱정할 만한 내용이 아니다”라는 외주제작국장의 설명 이후 <다큐극장>은 23편까지 무리 없이 방송됐다. 개편 전 새 노조가 외주제작사의 기획안을 입수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10월 유신, 새마을운동, 육영수 피습 등 박정희 시대와 관련 있는 아이템이 다수 포함돼 있었고 특히 10월 유신을 ‘불가피했다’고 표현해 논란이 됐다.

2013년 5월 4일 방송된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경제 역군들’ 편이 박정희 정권 아이템을 다룬 첫 방송이었는데 대내외적인 비판을 의식한 듯 ‘산업 역군’들의 희생을 부각하는 데 집중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급되거나 영상에 비친 것은 58분 중 3분가량에 불과했으나 파독 근로자들과의 만남에서 보인 ‘눈물’로 등장한 그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23편 중 12편이 박정희 시대 아이템이었고,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경제 역군들’, ‘최초 해외파병 베트남戰’, ‘수출 100억불, 한강의 기적을 이루다’, ‘428km의 땀과 눈물, 경부고속도로’, ‘잘 살아보세, 새마을운동’ 등 박정희 정권의 업적을 부각하는 편도 상당수였다. “전후는 68년이나 되는 세월이기 때문에 다룰 소재가 많아, 특정인 미화 의혹은 사실왜곡”이라던 KBS의 설명과 배치된다. 말 많고 탈 많았던 <다큐극장>은 그렇게 ‘준비된’ 아이템을 모두 소화하고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사장 한 마디에 ‘문제작’ 된 <뿌리 깊은 미래>

올해 2월 7일 방송된 광복 70주년 특집 <뿌리 깊은 미래>는 뉴라이트 역사학자 출신 이인호 이사장의 공개적인 문제제기로 그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른 프로그램이다. 2월 11일 이사회에서 이인호 이사장은 <뿌리 깊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많이 듣고 있다며 ‘북한에서 할 만한 내레이션이 나온다’며 ‘지식이 부족하거나 우매한 제작진이 있다면, 이사회가 거기에 대해서 외부 여론을 전달해 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 2015년 2월 7일 방송된 <뿌리 깊은 미래>

KBS PD협회는 “<뿌리 깊은 미래>는 해방 후 전쟁과 혼란 속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져 온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현재 우리가 그 고생을 성공적으로 극복해 이 자리에까지 왔음을 자랑스럽게 보여준 다큐멘터리다. 그러다보니 당시 해방공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나 국제관계, 심지어 북한 상황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면서 “이런데도 이사장은 ‘북한’이라는 이념 잣대를 들이대려 시도했다”고 지적했다. ‘우매한 제작진’이라는 표현에는 “이인호 이사장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KBS 프로그램의 내용의 최종 책임 프로듀서인양 행동하고 사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보수세력의 입맛에 맞지 않는 프로그램들이 심의위를 거치며 중징계를 받는 상황은 <뿌리 깊은 미래>에서도 반복됐다. 올해 4월 1일 심의위 방송심의소위에서 여당 추천 위원들은 “어디 가서 한국방송 팀장이라고 하지 남녘방송 팀장이라고 하지 않을 것 아니냐”고 비꼬며 <뿌리 깊은 미래>에 ‘좌편향’ 낙인을 찍었다.

KBS는 “일반인들이 광복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번영했는지 내용을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내외 정치상황이 많이 생략돼 불균형 정보로 오해를 산 것 같다”면서도 “결과적으로 불균형이 생겼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책무를 무겁게 생각하겠다”고 제작과정에서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러나 심의위는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 제14조(객관성)를 위반했다며 여당 추천 위원들의 다수결에 따라 방송사 재허가 시 감점 요인이 되는 경고(벌점 2점)를 의결했다. 징계 사유는 ‘한국전쟁 발발,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처벌, 미군의 흥남 철수 등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맥락상 필요한 부분을 생략하거나 특정 장면의 부각, 사실과 다른 내용의 내레이션 등으로 왜곡된 역사 인식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내용을 방송했다’는 내용이었다.

일방적 반론 받아줬으나 국·부장까지 날아간 ‘이승만 정부 망명 보도’

KBS <뉴스9>는 올해 6월 24일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 리포트를 단독보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6·25 전쟁 당시 일본 정부에 6만명 망명 의사를 타진했고, 일본이 한국인 피난캠프 계획을 세웠다는 문서가 나왔다는 내용으로 ‘일본 망명 요청설’이 일본 및 미 군정 문서로 확인돼 보도 반향이 컸다. KBS는 6월 25일, <전쟁 통에 지도자는 망명 시도…선조와 이승만>이라는 인터넷뉴스를 내보내기도 했다.

▲ 2015년 6월 24일 방송된 KBS <뉴스9> 이승만 정부 망명 보도

보수세력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다루는 뉴스에 몹시 민감했다. 종북좌익척결단·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등 보수단체들은 “설사 이승만 대통령이 기습남침에 대응해서 대한민국을 살리려고 망명정부를 어떤 곳에 세우기로 한들, 그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라며 보도책임자 퇴출을 촉구했다. 조선일보는 7월 2일 <KBS가 이런 報道(보도) 하라고 시청료 내야 하나>라는 칼럼으로 ‘KBS 때리기’에 가세했다. KBS는 7월 3일 이승만기념사업회의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담은 반론보도를 했고, 6월 24일, 25일에 나간 원 보도를 모두 삭제했다.

하지만 후폭풍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논란을 더 ‘키운’ 것은 KBS이사회 이인호 이사장이었다. 이인호 이사장은 “이 문제에 대해 밖에서 굉장히 시끄럽고 KBS 성토대회까지 열린다고 한다”며 ‘대책 논의’를 위한 긴급 이사회를 소집했다. 야당 추천 이사들과 새 노조는 이사회가 ‘월권 행위’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으나 이사회는 강행됐다.

7월 8일 이사회 주제는 ‘보도의 정확성 제고 방안에 관한 보고’였으나, 실상은 ‘이승만 정부 망명 보도’ 기사의 취재, 보도, 삭제, 반론보도의 경과를 청취하는 자리가 됐다. 이인호 이사장을 필두로 한 여당 추천 이사들은 “이사회에서 얘기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언론 자유가 보장돼 있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 이사들이 지혜를 모으면 모을수록 좋은 것”, “보도한 기자가 아주 무지했거나 특종을 바란 것 같다”, “(이 보도가) 우리나라 국익에 무슨 이득이 있느냐, 반세기가 지난 마당에” 등의 힐난을 쏟아냈다.

이사회의 혹평이 나온 지 1주일도 되지 않아 해당 보도를 담당했던 보도국 국제부, 인터넷뉴스국의 국·부장이 전부 교체됐다. 8월 27일, 심의위는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 ‘공정성’과 제14조 ‘객관성’을 위반했다며 방송사 재허가 시 감점되는 법정제재 ‘주의’(벌점 1점)를 의결했다. 2달 만에 최초 보도 삭제, 굴욕적 반론 보도, 보도 책임자 문책, 규제기관의 제재가 이루어진 것이다.

▲ KBS 안팎에서 논란이 됐던 역사 프로그램 목록 (표=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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