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2013년부터 탐사보도팀이 취재해 온 <친일과 훈장>이라는 프로그램 제작진 전원을 인사발령 조치했다. 친일 행적자와 일본인들에게 훈장이 가장 많이 수여됐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당시 이야기를 다뤄 ‘민감하다’며 방송일자조차 잡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취재까지 마치고 후작업을 해야 할 제작진이 모두 타 부서로 가게 돼 ‘공교로운’ 인사라는 반응이 나온다.

KBS는 10일 인사를 냈다. 이번 인사발령을 받은 보도본부 소속 직원 50여명 가운데 ‘공교롭게도’ <훈장> 방송을 준비하고 있던 탐사보도팀 기자 두 명이 각각 보도국 라디오뉴스제작부와 디지털뉴스국 디지털뉴스부(14일자)로 가게 됐다. 두 기자는 대한민국에서 수여된 훈장 70만 건을 단독 입수해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이라는 2부작 프로그램을 제작해 왔다. 7월 말 취재가 끝났는데도 별다른 이유 없이 방송일자를 확정하지 않는 사측에 <훈장> 제작진이 성명을 낸 지 이틀 만에 벌어진 인사다. 3일 전, <훈장> 취재를 하던 팀장도 네트워크부로 발령 났다. (▷ 관련기사 : <이승만-박정희는 금기? KBS ‘친일과 훈장’ 불방 위기>)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권오훈, 이하 새 노조)는 11일 성명을 내어 “지난 8일 탐사보도팀 일선 기자들이 해당 프로그램의 방송 편성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자 사측은 방송 날짜를 확정해주기는커녕 제작진 두 사람을 아예 다른 부서로 인사 발령을 내는 폭거를 저지른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새 노조는 “일신상의 이유로 부서를 옮길 수밖에 없는 한 기자를 제외하고 팀장과 다른 기자는 모두 프로그램 제작이 완료될 때까지 부서를 옮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인사 발령을 낸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라디오뉴스제작부로 간 기자는 11일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잔류를 희망했고 인사가 나더라도 프로그램 취재, 제작은 마치게 해 달라고 했으나 아직 시사제작국 쪽에서 답변이 없다”고 말했다. 제작진 전원이 인사 조치를 당해 ‘방송 여부가 더 불투명해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국·부장은 데스킹을 마치는 대로 방송하겠다고 하는데 문제는 ‘데스킹’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라고 할 수도, 제작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선까지의 ‘수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새 노조의 한 관계자도 “방송일이 잡혀 있지만 그에 앞서 인사가 났을 경우, 해당 부서에서 근무협조를 받아 (제작과 보도를) 마치고 그 부서로 가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라며 “석연찮은 인사”라고 지적했다.

새 노조, 사측 해명 반박 및 공방위 예고

새 노조는 또한 이날 성명에서 <훈장>에 대한 KBS 해명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KBS는 메르스 사태로 <훈장> 아이템이 나가기로 했던 <시사기획 창>에서 기존에 준비됐던 아이템들이 순연됐고, 8월 ‘광복 70주년 특별편성’과 9월 <한국경제의 미래> 4부작 편성이 겹쳐 방송 예정일이 10월 이후로 늦춰졌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새 노조는 “메르스 사태로 <시사기획 창>의 기존 아이템이 나가지 못한 것은 지난 6월 2일과 9일, 16일 등 3주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메르스 관련 아이템이 끝나고 ‘광복 70주년 특별기획’이 나갈 때까지 6주 동안 일반 아이템이 나갈 동안 ‘훈장’ 아이템은 편성되지 못했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훈장 제작진은 관련 프로그램 편집용 원고를 지난 9월 2일에야 데스크에게 제출했다’는 회사 주장에 대해서는 “현재 KBS 제작 시스템 상 주간 프로그램의 경우 방송 날짜가 미리 잡히면 거기에 맞춰 취재와 원고 작성을 준비한다. 방송 날짜가 잡히지도 않았는데 취재와 원고 작성을 마치는 경우가 도대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라며 “<시사기획 창>에서 방송 예정일이 잡히기도 전에 원고 데스크를 본 전례가 실제로 있기나 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런 전례가 있다면 사측은 분명히 밝혀 주기를 바란다”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제작진은 지난 5월부터 기획안을 수차례 제출했고, 7월에는 5~6페이지짜리 프로그램 요약본과 30페이지짜리 가원고를, 그리고 이번에는 팀장이 데스크 본 원고까지 제출하는 등 탐사제작부장과 시사제작국장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줬지만 이제 와서 사측은 방송 순연의 책임을 제작진에게 돌리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 KBS 탐사보도팀은 대한민국에서 수여됐던 훈장 70만 건을 단독입수해 훈장 수여 내역과 내용과 절차 면에서 문제가 없는지를 알아보는 기획 2부작을 2013년부터 준비해 왔다. 그러나 방송일자조차 잡지 못한 상태다. 제작진은 친일 행적자와 일본인들에게 훈장이 가장 많이 수여됐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당시 이야기를 다루는 점 때문에‘민감하다’며 방송일자가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왼쪽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사진=KBS, 연합뉴스)

새 노조는 “사측이 <훈장> 아이템에 대해 방송 일자를 확정하지 못하고 시간 끌기로 일관하고 있는 모습은 현재 KBS 내부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훈장> 2부인 <친일과 훈장> 아이템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당시, 친일 행적자와 일제식민통치를 주도한 일본인들에게 대거 훈장을 수여했다는 내용이기에, 그동안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기에 앞장서 온 이인호 이사장과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에서 해당 아이템은 불편한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바라봤다.

새 노조는 “다음 달 사장 선임을 앞두고 연임에 욕심을 내고 있는 조대현 사장이 차기 사장 선임에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이사장의 눈치를 보느라 <훈장> 아이템이 방송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며 “사측이 이런 의혹을 해소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훈장> 아이템의 방송 날짜를 확정하면 될 것이다. 9월 말까지 편성된 <한국경제의 미래>(4부작)이 끝나는 즉시 <훈장> 아이템을 방송하라!”고 촉구했다.

새 노조는 향후 공정방송위원회에서 이번 사안을 다루겠다고 예고하기도 했다. KBS 노사가 자사 보도와 프로그램 공정성 제고를 위해 논의하는 자리인 공정방송위원회는, 8·16 특집 편성과 휴가철을 이유로 사측이 계속 거부해 와 6월 2일 이후 정상적으로 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새 노조는 “이번에도 사측이 공방위 개최를 거부한다면 조대현 사장이 공정방송을 위한 최소한의 의지도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는 것으로 보고 우리는 조대현 사장 반대와 연임 저지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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