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수여됐던 70만여 건의 서훈 명단을 분석한 KBS 특집 프로그램 <훈장>이 여전히 방송일자를 확정짓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KBS 사측은 메르스 사태와 광복 70주년 특집을 이유로 당초 6월 말, 7월 말로 잡아 두었던 방송일자를 보류하고 제작진 전원을 인사조치해 다른 팀으로 보낸 데 이어, <훈장> 방송이 ‘무기한 연기’되고 있는 상황을 논의하기 위한 공정방송위원회(이하 공방위)에 대해서도 회피로 일관했다.
<훈장>은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 2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KBS 내부에서는 친일 행적자와 일본인들에게 훈장이 가장 많이 수여됐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이야기를 다룬 <친일과 훈장>이 민감한 내용이기 때문에 방송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KBS노동조합(위원장 이현진, 이하 KBS노조)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권오훈, 이하 새 노조)는 18일 공동 성명을 내어 공방위 개최마저 거부한 사측을 비판했다. 양대 노조는 17일 <훈장> 프로그램을 안건으로 임시 공방위를 열자고 요구했으나 사측은 “훈장 아이템이 현재 시사제작국 내부 데스킹 과정에 있기 때문에 지켜봐 줄 것을 조합에 충분히 설명했다”면서 거부했다.
공방위는 노사가 맺은 단체협약에 규정된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공식 기구’다. 양대 노조는 사측의 공방위 해태를 훈장 아이템 논의를 회피하려는 것으로 규정하고, 방송 여부가 확정될 때까지 ‘강력 대응’할 것을 선언했다.
사측은 현재 시사제작국에서 <훈장>을 데스킹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제작진은 이미 5월부터 기획의도 및 취재내용이 담긴 기획안을 수차례 전달했고 7월에는 5~6페이지 프로그램 요약본을, 9월 2일에는 팀장 데스크까지 마친 편집용 원고를 제출한 바 있다. 방송일자를 정하기도 전에 ‘방송 내용이 뭔지 모르겠다’며 데스크를 본 원고를 가져오라는 일은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이례적인 일임에도 제작진은 모두 수용했다. 시사제작국에 원고가 간 게 2일이니, 17일 현재 2주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데스킹은 ‘진행 중’이다.
양대 노조는 “3달째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다. 통상적인 제작 관행으로 볼 때 5월에 취재가 완료된 사안을 지금껏 끌고 있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보는가? 준비한 방송이 나가지도 않은 상황에서 정기 인사를 이유로 주요 제작진을 다른 부서로 발령 내는 게 정녕 정상적인 관행이었던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꼭 내보내고 싶은 아이템이었다면 편성 시간을 빼내서라도, 제작진을 다그쳐서라도 인사이동 전 방송을 내보냈겠지 않겠는가? 이제 와서 다른 부서로 간 제작진을 다시 부르기라도 한단 말인가? 수없는 의혹과 의문에 대해 사측은 제대로 된 답변을 한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양대 노조는 “<KBS 방송편성규약>에 따르면 ‘취재 및 제작 실무자는 편성·보도·제작 상의 의사결정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그 결정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권리를 갖고’(제6조 2항), <단체협약>은 ‘프로그램을 편성·제작·보도하는 과정에서 현업제작자와 일선제작 책임자의 의견이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제21조 3항)고 밝히고 있다”며 “사측의 이번 공방위 거부는 명백한 편성규약과 단체협약 정신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앞으로 양대 노조는 <훈장> 방송 회피 시도에 대해 강력 대응하기로 했다. 우선 △‘주요 사안의 경우’ 사장과 교섭대표노조 위원장이 각각 공방위 노사대표를 맡는다는 단협 제23조에 따라 조대현 사장을 상대로 임시 공방위를 재요구하고 △‘공정방송 정신에 반하는 행위를 한 자에 대한 문책을 심의할 수 있다’는 단협 제26조 3항에 따른 절차를 진행하며 △끝까지 방송을 내보내지 않을 경우 제작비 낭비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질지 감사 청구를 검토할 예정이다. KBS는 <훈장> 제작을 위해, ‘개인 정보’라는 이유로 서훈 내역을 공개하지 않은 정부와 대법원까지 소송을 거친 바 있다.
양대 노조는 “사측이 만약 제작진과 노동조합의 이런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방송 날짜를 확정짓지 못한다면 조대현 사장이 연임 욕심에 ‘훈장 아이템’을 불방시키고 있다는 세간의 의혹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일 것”이라며 “연임을 위해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훼손시키는 조 사장에 대해 사내 모든 구성원들과 연대해 공동 행동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