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2013년부터 탐사보도팀이 취재해 온 <친일과 훈장>이라는 프로그램의 방송을 기약 없이 미루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친일 행적자와 일본인들에게 훈장이 가장 많이 수여됐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당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 때문에 ‘민감하다’며, 담당 부장이 방송용 원고 제출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방송이 허공에 ‘뜬’ 시기에 공교롭게도 담당 팀장과 취재기자들마저 ‘교체’를 앞두고 있어 의혹은 증폭되고 있다.

KBS <훈장> 제작진 및 탐사보도팀 일동은 8일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훈장>이 처한 위기를 알렸다. 탐사보도팀은 지난 2013년부터 ‘훈장을 통해 본 대한민국 70년 역사’를 기획, 취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훈장’을 누가 왜 받았고 혹시 문제는 없는지를 알아보는 대기획이었다. 정부가 서훈 명단을 ‘개인정보’라며 공개하지 않자 탐사보도팀은 정보공개 청구소송까지 거치면서 올해 4월 70만 건의 훈·포장 명단을 입수했고, 자체 취재를 통해 정부가 감춰 온 내역도 찾아냈다. 그동안 70만 건에 달하는 전체 훈장 내역은 현재까지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제작진은 “취재 결과, 대한민국 훈장에 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두 가지로 압축됐다. 우선 지난 몇 년 동안 법원이 ‘조작됐다며’ 무죄를 선고한 간첩사건에서 당시 수사관들이 훈장을 받은 것이 드러났고 대한민국이 친일 행적자와 일제식민통치를 주도한 일본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는 것”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이라는 2부작 특집이 발제돼 방송일자도 사실상 확정됐고 취재도 7월 경 마무리됐다고 설명했다.

당초 1TV <시사기획 창>을 통해 6월, 7월에 한 편씩 방송되기로 했던 <훈장>은 5월 말 터진 메르스 사태 때문에 7월 말로 연기됐다. 하지만 제작진은 “6월 말 ‘이승만 정부 망명요청설’ 보도 이후 7월 초순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며 “‘8월에는 광복 70년 특집프로그램이 줄편성된다’는 이유로 7월말 훈장 방송 일에 훈장보다 늦게 발제된 아이템이 방송되더니 이후 <훈장 2부작>은 돌연 방송 목록에서 사라졌다 <훈장 2부작>은 이때부터 허공에 뜬 것”이라고 주장했다.

▲ 왼쪽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사진=KBS, 연합뉴스)

제작진은 KBS 사측이 특히 <친일과 훈장>을 문제 삼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친일 행적자와 일본인들에게 훈장이 가장 많이 수여된 것이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 시기였고 당연히 프로그램에는 두 정부에 대한 ‘사실 발굴’과 ‘균형 잡힌 평가’가 들어갔다. 이때부터 새로운 논리가 등장했다. ‘민감한 내용이니 내용을 보고 방송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당초 방송 일자까지 확정돼 있던 2부작 프로그램이 순식간에 ‘방송 여부’조차 불투명해진 것이다.

시사제작국장과 탐사제작부장은 <훈장>이 ‘민감한 내용’이라며 제작진에게 지속적으로 기획안과 프로그램 내용 제출을 요구했다. 제작진은 기획안을 수차례 전달했고, 5~6페이지 프로그램 요약본과 30페이지 분량의 가원고까지 제출했다. 그럼에도 국장과 부장은 “훈장이 2부작 거리가 되는지 검토해 봐라”, “가원고로는 안 된다. 팀장 데스킹을 받아 와라”, “국장이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면 방송 원고를 보고 국장, 부장, 팀장이 모여 한 번에 정리하자”면서 방송일자 확정을 미뤄왔다.

제작진은 “팀장 데스킹까지 끝낸 편집용 원고를 지난주 수요일(9월 2일) 줬다”며 “수차례 기자들이 개인적으로 찾아가 읍소도 하고 설득도 하고 부서회의에서 큰소리로 논쟁도 벌였다. ‘내용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조율이 가능하니 잠정적으로라도 방송일자를 잡자’는 하소연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지난 7일 탐사보도팀장이 교체됐다. <훈장> 취재를 맡았던 기자 2명도 이번 주 내로 인사가 예정돼 있다. 제작진은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 이번 취재 과정에서 보인 국장과 부장의 태도는 안절부절과 도망다니기였다”며 “더 이상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변명은 하지 마십시오. 탐사보도팀은 진정한 저널리즘을 구현하려는 KBS 기자들의 바람과 응원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일선 기자들의 열망을 분노로 바꾸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환영받지 못할 아이템이라는 건 알았지만… 제작 프로세스까지 무시한 처사”

<훈장>을 취재한 A기자는 8일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역대 정부 중 박정희 정부가 18년으로 제일 길어서 (방송에) 얘기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친일’이란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템이라는 건 예상했다”면서도 “6월까지는 특별히 제지를 걸지 않았다. 잘 마무리해서 내보자는 분위기가 이승만 망명 보도 이후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고 말했다.

앞서 KBS는 6월 말, 이승만 정부가 일본 정부에 ‘6만명 망명 의사’를 타진했고 일본이 한국인 피난 캠프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의 문서를 확인했다고 단독보도했다. 그러자 종북좌익척결단 등 극우 성향 단체와 뉴데일리 등 극우 매체들이 반발했고, ‘뉴라이트 역사학자’ 출신 이인호 KBS이사회 이사장이 해당 뉴스 보도를 이사회 ‘안건’으로 끌어들여 긴급 이사회까지 열렸다. 7월 3일 KBS는 이승만기념사업회의 일방적 주장을 모두 반론으로 받아주고도, 원 보도 및 관련 보도를 인터넷상에서 모두 삭제해 내부 구성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A기자는 “그 이후로 (부장, 국장이) 내용이 뭔지 좀 더 가져와 봐라, 이런 수준이면 못 믿겠다면서 나중에는 (팀장이) 최종 승인한 걸 가져오라고 하더라. 방송 여부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일(방송에 뭐가 나갈지 내용부터 가져오라는 것)은 제작 프로세스 상 없는 일”이라며 “취재는 마쳤는데 방송일자가 안 나와 편집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친일과 훈장> 취재는 민족문제연구소와의 공동작업이다. 훈장 수여자가 친일 행적자인지 알아봐야 하는데 이 분야에서 가장 전문성 있는 곳이 민문연이어서 공동분석을 위한 1000만원 예산 집행까지 마쳤다. 취재 지시를 하고 민문연과 공동작업하라고 싸인을 한 게 올해 5월이고, 그 싸인을 한 사람이 현재 국장인데 계속 연기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교로운 시점에 일어난 인사에 대해서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면 보통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는 유지시켜 달라고 하고 (회사에서도) 그렇게 해 주는 게 보통이다. 만약 그냥 떠나버리면 방송이 펑크날 수도 있으니 제작은 끝내고 갈 수 있게 배려하는 게 원래 프로세스인데, 이번에는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방송일자도 안 잡혔으니 교체해도 된다’는 식”이라고 전했다.

▲ 당초 6월 말, 7월 말 두 차례에 걸쳐 방송될 예정이었던 KBS 특집 프로그램 <훈장>이 편성을 확정짓지 못해 불방 위기에 처했다. ⓒ미디어스

B기자도 ‘제작 프로세스 상 이례적인 일’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시사기획 창>은 보통 3개월 텀으로 기자가 아이템을 발제하면 회의를 거쳐 의견 수렴하고 부장이 승인하면 1주일 안에 방송일자가 잡히는데, <훈장>의 경우 날짜는 확정하지 않으면서 ‘방송은 낸다’는 말만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B기자는 “제작진에게 방송일자가 안 잡힌다는 건 ‘방송 여부’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연기’라고 해도 비약하면 10년 뒤에는 방송에 낼 수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잠정적으로라도 날짜를 잡자고 수차례 얘기했고, 혹시나 내용상 문제가 있다면 제작진들과 같이 의견 교환을 하면 된다고까지 했는데 그런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B기자는 “팀장 데스킹 끝낸 원고를 보낸 지 1주일이 되도록 답이 없다. 계속 검토중이라고만 한다. 오늘은 성명이라기보다는 제작진들이 이런 애로를 겪고 있다는 간곡한 호소문을 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같은 논란에 대해 KBS 측은 “제작진의 성명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메르스 때문에 (방송일자가) 순연(차례로 기일을 늦춤)된 탓에 원고가 지난주 수요일(2일)에 왔고 데스크를 보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팀장 교체 등 최근 인사에 대해서도 “이번 사안과 상관없는 보도본부 차원의 정기 인사”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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