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민주주의란 뭘까? 인류 역사의 대강을 짚어보면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왕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지 않는 체제라는 게 그것이다. 국가적 결정에는 국민적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거다.

물론 모든 사람이 국정을 자신의 현안으로 여기고 통치에 참여하는 이상을 달성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정으로는 어렵다. 그런 이유에서 대부분의 민주 국가는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선거에서 자신의 대표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 통치의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런 방식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일까?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했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유권자가 현실적으로 나라의 모든 일에 관여할 수는 없으니 대표자를 뽑아 놓은 것 아니겠는가. 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은 국정에 있어서 일정 정도의 자율성을 보장 받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렇다고 왕처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은 또 아니다. 절차를 제대로 갖추고 국민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민주적 통치자는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매일 같이 고뇌하는 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굳이 선을 긋는다면 ‘되돌릴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선출된 지도자가 지금은 스스로 추진하는 국정의 방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더라도 민주주의와 역사의 큰 흐름 안에서 결국 틀린 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거다. 오늘의 지도자가 틀린 판단을 했다면 내일의 지도자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역대 정권들의 잘못이 있다. 그러나 이 정권은 특히 이 대목에 대한 어떤 경계심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한미일 정상회의의 결과가 그렇다. 연결된 줄 알았던 세계가 조각나는 역사적 흐름에서 우리만 고고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도 협력을 강화해야 할 운명일 수 있다. 한국의 지도자가 일본에 손을 내밀고 중국에 대한 견제에 발을 맞추는 것은 필요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국민적 동의’라는 한계 안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미국 언론은 ‘미국의 외교적 꿈이 이뤄졌다’고까지 평하고 있다. 합의대로라면 미국이 우려하는 대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때, 또는 중국과 일본이 센카쿠 열도 등 영토 문제로 분쟁하다 군사적 충돌로 치달을 때 우리가 연루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는 우려가 제기될 만하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국민적 동의는 확보되었는가? 앞으로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있는가?

물론 대통령실은 법적 구속력이 없으므로 군사동맹과는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공약’ 문서를 봐도 새로운 권리 또는 의무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미국의 고위 관리들은 ‘협의 의무’를 언급한다. 유사시 협의를 ‘의무화’ 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보도는 이미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제기된 바 있다. ‘미국의 외교적 꿈’은 한국에 협의에 응할지 말지의 선택권을 주는 것보다는 의무적으로 응하도록 만드는 것에 가까울 거다. 국제사회는 유감스럽게도 힘의 논리에 따르는 면이 있다. 실제 유사시에 과연 한국이 협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을까?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를 되돌릴 수 있냐는 것이다. 3국 정상들의 합의는 안보협력을 ‘제도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문가들은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합의를 되돌리기 어렵도록 의도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 입장에선 도널드 트럼프라는 예외적 존재가 핑계다. 다음 대선도 바이든 대 트럼프 경쟁이 유력한데 트럼프식 외교노선의 파열음으로부터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선 반대로 얘기할 수도 있다. 어느 언론은 한미일 정상회의의 결과를 ‘급변침’으로 평가했다. 외교 노선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 국민적 동의도 설득도 없는 상태라면 적어도 되돌릴 수 있는 공간은 확보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전임 정권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으면 보수언론이 ‘대못을 박았다’고 썼을 일이다.

세계 해양의 날을 맞아 6월 8일 서울 종로구 환경운동연합 마당에서 열린 일본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방류 계획 철회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상징의식을 펼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세계 해양의 날을 맞아 6월 8일 서울 종로구 환경운동연합 마당에서 열린 일본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방류 계획 철회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상징의식을 펼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다른 사안도 마찬가지다. 강제동원 판결 문제에 관한 제3자 변제를 추진한 일은 어떤가? 법원이 거부하지 않았다면 재단이 ‘판결금’을 공탁하는 걸로 법적 절차를 마무리 했을 것이다. 그 후엔 되돌릴 수 없는 거다. 당사자들이 다 동의하면 모를까 동의하지 않는데도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 한 것은 민주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어떤가? 정부의 공식 입장은 과학적 근거를 갖춰 투명한 절차를 거쳐 방류해야 하고 사후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일본 언론 보도를 보면 한국은 사실상 오염수 방류에 이미 찬성한 거나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와 언론이 한국의 입장을 왜곡하고 있다는 평가도 할 수 있겠으나 그런 빌미를 준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오염수 방류, 되돌릴 수 있는가?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 정권의 이러한 태도가 외교 안보 사안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거다. KBS 수신료 분리 징수, 되돌릴 수 있나? 이동관 방통위원장 체제가 만들 미래는 되돌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이명박 정권 당시 도입된 종편 체제는 대표적인 되돌릴 수 없는 정책이다. 이게 우리 국민에게 무슨 도움이 되고 있는지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평가해봐야 한다.

국민적 동의가 이미 있거나 설득을 통해 동의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다면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 의지가 있기는 하냐는 거다. 대통령이 화를 내거나 누구를 꾸짖었다는 보도는 본 일이 있어도, 동의를 구하고 설득을 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뭘 한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통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아시려나 모르겠다. 혹시 몰라 덧붙이는데, ‘방송장악’은 그런 노력에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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