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너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가령 지난해 대학 입학을 앞둔 조카가 교대와 어지간한 기업은 입사가 쉽게 된다는 실용 대학을 놓고 고민할 때 난 주저 없이 말했다. ‘조카야 니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올 때면 초등학생의 수는 터무니없이 줄어들 것이고, 실력 빵빵한 니 선배세대부터 밀린 교대생들의 적체는 끔찍할 정도일 것이다. 삼촌은 그냥 취직 걱정이 덜한 곳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충고했다. 다행히 조카는 삼촌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 대학으로 진학했다. 한 학기 동안 실기가 부족해서 고생했지만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다. 내가 똑똑한 것은 아니지만 10년 후 이 땅에서 벌어질 출생률 저하에 따른 후유증은 눈에 보듯 선하다. 각종 출산 장려책을 내놓아도 아이 낳기를 꺼리는데 지금 보이
1987년 말 사상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군사정권 후보 노태우 씨를 당선시키기 위한 군대 내의 조직적인 부정선거 개입을 폭로한 L1씨. 군 당국이 부하 사병들을 대상으로 가혹한 형벌을 가하자, 그는 군 감옥에서 16일 간의 단식투쟁으로 맞선다. 이후 순탄한 군 생활로 큰 문제가 없는 듯 보였지만, 전역한 뒤에 군 당국의 테러와 보복은 오히려 더 노골화한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끊임없는 감시와 폭행에 시달렸고, 내부고발 전력은 취업의 문턱에서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극도의 가난과 불편, 소외감에 고통 받기를 3년여. 위험인물이라는 낙인을 떼고 가까스로 보안부대 사찰을 졸업한 그는 지금 한 정보기술 계통 벤처 사업체의 어엿한 사장님이다. 15년 전 자신의 행동에서 시작된 각성된 사회의식을 발판으
“복잡하지만 단순하다” 헌법재판소의 언론법 관련 결정에 대해 한나라당의 입장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단순함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좀 필요하다.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를 제외한 야당이 헌재에 무엇을 판단해 달라고 했으며 헌재가 결정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한나라당을 주축으로 하는 언론법 개악 주도세력이 헌재 결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며 이들이 오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결국 이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리해야 한다.헌재 결정문에 따르면 야당이 헌재에 요구한 것은 지난 7월 22일 오후 제283회 국회 임시회의 제2차 본회의에서 국회의장, 부의장이 신문법안, 방송법안, IPTV 방송법안, 금용지주회사업안을 각각 가결 선포한 행위가 야당 국회의원들의 심의, 표결권을 침해한 것인지
KBS의 사장이 바뀔 것인가, 아니면 이병순사장 체제로 유지될 것인가가 곧 결정된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다. KBS노조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를 접은 지 오래된 상황인지라, 필자의 입장에서는 KBS노조의 입장은 중요하지 않다. 이병순 현 KBS사장을 지지하든 하지 않든 이미 KBS노조의 입장은 미디어운동진영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상황. 문제는 사원행동이다. KBS사원행동이 지난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보여준 입장, KBS노조와 다른 입장과 전혀 다른 실천을 높이 사는 것은 필자의 평가뿐만은 아니다. 그래서 사원행동의 입장과 의지를 귀기울여 들어야 할 터. KBS사원행동. 지금에야 그 이름이 어떻게 바뀌었든, 지난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그리고 징계와 강제전출의 수난을 겪어던 사원행동이,
패륜을 양산하는 법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한다. 무슨 오이디푸스 신화에서처럼 신탁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이제 그 아들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사막으로 고행이라도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신탁 대신 법탁을 받고, 사막 대신 감옥으로 가야 한다. 얼추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 버전 정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고행을 떠나는데 반해 현대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지배 권력에 의해 고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확실히 비극은 비극이다.지난 달 28일에 있었던 용산 참사 관련 재판의 결과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재판에서 재판부는 이충연 용산4구역철대위원장 등 피고인 2명에게 6년형을 선고했고, 다른 피고인 5명에 대해서도
흔한 말로 정치를 생물이라고 한다. 진화와 능동을 가르는 냉철한 변증법과 선택과 집중을 결정하는 열정의 의지로 정치가 매순간 파닥인다(혹은 일 수 있다)는 뜻일 테다. 그렇다면, 제1야당 민주당은 어떠한가? 진화하고 있는가? 능동적인가? 선택은 적절한가? 집중은 충분한 것인가? 정세에 대처하는 민주당의 변증법과 사태에 임하는 민주당의 의지가 과연 어떠하냐는 말이다. 한 마디로 '아니올시다'이다. 생각도 하기 전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깊은 회의감부터 밀려든다. 언제부터인가 민주당은 도무지 정치가 안 된다. 아주 호기로운 순간도 있었건만, 좀처럼 정치를 생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유예되고 잠복해있던 민주당의 문제들, 무기력하고 또 무기력한 민주당의 정치가 헌재 판결 이후 그 앙상함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당신에게 '스포츠'는 무엇입니까? 스포츠를 잘 '하고' 싶은 마음 만큼이나 스포츠를 잘 '읽고' 싶다는 욕구가 큰 시절입니다. 하는 스포츠와 보는 스포츠의 경합속에서 그만큼 스포츠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지만, 보다 정밀하게 스포츠를 읽고 싶다는 욕심이 못내 간지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때 마침, 야구도 끝나고 이제 무슨 재미로 사냐라는 분들을 위해, 에서 보다 풍성한 스포츠 읽기를 위한 고품격 교양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체육교사이자 스포츠사회학자인 미디어스의 필진 남상우씨가 전공자의 전문성으로 그리고 지적 호기심과 열정을 총동원하여 "스포츠 지식문화사" 시리즈 연재를 시작합니다. 꼼꼼하게 따라 읽다 보면, 분명 내년 봄 당신의 스포츠는 훨씬 풍성해질 겁니다.
전세대란이란 언론보도가 잠잠하다. 하지만 전세파동이 가라앉은 것이 아니다. 비슷한 기사를 반복적으로 쓰기 어려우니 언론보도가 줄었을 뿐이다. 전세파동이 더 싼 셋집을 찾아 서울, 수도권을 넘어 경기도 일원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는 양상이다. 강남 지역의 전세수요만 해도 안양, 군포, 의왕, 과천 등지로 몰려 안양권에는 매물이 바닥났다. 문제의 심각성은 전세파동이 내년, 내후년에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 집권기간 내내 전세파동이 극성을 부린다는 소리다. 무분별-무계획한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 사업이 멀쩡한 집들을 마구 헐어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엉터리 뉴타운 공약으로 당선의 단맛을 즐겼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는 낙선의 쓴맛이 기다릴
최근 한 달 사이 광주에선 환호와 혼란이 뒤섞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로야구 기아타이거즈가 12년 만에 우승하면서 광주시민들이 한풀이라도 한 듯 축제분위기였죠. 그러나 한 달도 안 돼 그 기쁨은 광주시의 돔야구장 건설 계획발표로 일대 혼란 속에 파묻혀버렸습니다.야구장. 처음엔 저도 혹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천후 경기장에서 언제든 야구경기가 가능하고 또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싶었죠. 하지만 갈수록 이게 아니다싶어집니다. 돔구장 자체의 친환경성 문제나 선수들 부상위험도, 또는 개방형에 비해 4배에 달하는 건설비용이나 민자유치에 따른 특혜의혹 등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무엇보다 이 일을 밀어붙이는 광주시의 방식과 태도 때문입니다. 지난달
권력은 작동방식을 따지자면 복잡하지만, 그 속성과 스타일은 의외로 간단히 규정할 수도 있다. 대개의 권력은 과거 지향적인 속성을 같고, 언제나는 아니겠지만 또 숱한 권력들의 스타일은 보통 돌고 돌아 회귀적 스타일을 띈다.청와대가 공보담당관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각 비서관실 마다 언론 상대 업무를 담당하는 특정한 창구, 즉 공보관을 두겠다는 얘기이다. 흔한 말로 창구의 단일화 되겠다. 운용 시점까지 못 박았다. 대통령의 재가가 나는 대로, 늦어도 이달 중순에는 바로 시행하겠다고 한다. ‘공보관’이란 말이 왠지 촌스러운 것처럼 분명, 언젠가 본 듯한 풍경이다. 완전히 흡사하진 않지만, 역사의 반복이라고 하기에 큰 무리는 없을 정도이다. 참여정부 말기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참여정부는 기자실을
두 가지 인식적 오류의 정리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전체주의를 민주주의의 반대말로 오인하는 것이다. 둘을 모순적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개념적으로는 그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 있어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의 내재적 증상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우발적 예외 혹은 외부가 아닌, 정상적 논리 내부의 상황으로 존재해 왔다.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박정희 독재가 언제 ‘민주’라는 말을 포기한 적이 있었으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며 독재적인) 정책들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 적이 있었던가? 대체 누가 민주주의를 말하는지,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막스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라는
한국 영화계가 '죄다' 좌파라고 한 윤계상의 발언은 분명 당황스런 일이다. 물론, 세상사를 설명하며 '죄다'라고 하는 부사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의식이 덜 여물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설익음을 이유로 그가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문제가 비록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개념의 엄밀함을 벗어난 것뿐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발언에 부당함을 느끼는 대중이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야 논란이 될 줄 몰랐다고 했고, 거듭 사과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아이돌 출신으로 영화계에서 여전히 이질감을 느낀다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 그의 표현대로라면 분명, 잘 모르는 단어였을 텐데 말이다.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게맛살이라는 이름의 상품은 사실 게살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맛과 냄새는 비슷하다. 그런데 최소한 한 마리에 십 만원이 훨씬 넘는 진품 영덕 대게를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이 뭔가 다르다고 한다.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다르다고 한다. 진짜 대게와 게맛살의 차이는 그 맛을 느끼는 사람의 감각을 충족시켜주지만, 명품과 짝퉁의 차이에서도 이런 감각적인 차이가 있을까? 물론 그것은 감각적인 만족이라기보다는 보통 현시 가치나 기호 가치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차별적인 만족을 준다고 한다. 자본주의에서 본래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이론적으로는 모호하더라도 양화된 가격으로 나타나는 교환가치는 확실하다. 향유할 수 있는 자와 그럴 수 없는 자를 사회적으로 차별화하고 차이를 재생산하여 다음
살랑 이는 가을바람에도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산길을 오르내리며 수북이 쌓인 나뭇잎을 밟는 느낌이 평온합니다. 어느새 감나무에도 감잎이 모두 떨어져 노란 감들만 감나무에 풍성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온 동네가 노란 감들로 둘러싸여 산골마을이 평화롭습니다.이제 감을 딸 때가 되었습니다. 다른 해 같으면 열심히 따서 깎고 있을 텐데 올 해는 좀처럼 감 따기가 쉽지 않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오면서 바람구멍이 더욱 커 보여 집 공사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웬 만큼하고 ‘곶감’할 생각이었는데 바람구멍이 좀처럼 메워지지 않습니다.이러다 가을비를 만났습니다. 밤새 센바람과 함께 내린 가을비는 마음을 조급하게 합니다. 철이 오고 감을 담담히 맞이하면 될 일인데 조급한 마음이 생기는 건 아직 겨울을 맞이할 마음준
소설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사실 지난주에 결혼식 참가를 위해 대구에 내려가다가 문득 써보고 싶은 소설이 생겼다.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공간들이 좋았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가을 산빛과 내 추억이 담긴 장소들이 어우러졌기 때문에 잘 묶으면 괜찮은 단편소설이 하나 될 것 같아서다. 하지만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다가 금방 싱거워졌다. 결국 글을 쓰면서 느끼는 내 문장은 마치 서평을 쓰는 문체 마냥 딱딱하고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연 이렇게 쓴 것이 제대로 소설로 그려질까를 고민하다가 멈췄다. 물론 조만간에 다시 글쓰기를 재개해서 어느 문학잡지의 공모에 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소설쓰기가 순간의 감상만으로 완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비교적 단순하다. 젊은 시절에는 새로운 장르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졌다. 논란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헌재의 판결은 헌법재판소다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번 헌재의 결정을 권력의 눈치를 본 타협의 산물이라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판결문에 밝혀놓은 ‘의의’를 읽어보면, 반드시 헌재가 정부의 눈치를 보고 이런 판단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헌재는 이번 결정을 두고 “하자 있는 심의 표결절차에 터잡아 이루어진 법률안 가결선포행위가 국회의원인 청구인들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하였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표결처리에서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니 한나라당이라고 해서 환호작약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헌재의 판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재가 설정하는 ‘어떤 민주주의’에 있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미디어 법안 처리가 위법하다고 판정하면서도, 그것을 무효화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신문법 등 미디어 관련법은 ‘위법하지만 유효한’, 이상한 상태에 머물게 됐다.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권한쟁의 사건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헌재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2대 4대 3’ 판결신문법과 방송법 외에도 다른 법안도 관련되어 있고 9명의 헌재 재판관의 의견이 각 법안마다, 그리고 쟁점 마다 갈려서 제대로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신문법을 중심으로 각 재판관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번 판결은 ‘2대 4대 3’의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민형기, 목영준 재판관은 국회의장의 자율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면서 청구인들, 즉 야당 의원들의 권리가
'진보전략회의'는 한국사회 주요 전략아젠다에 대한 진보적 정책생산을 목표로 모인 연구자, 활동가들의 전략네트워크이다. '진보전략회의'는 사회운동의 통합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운동과 운동을 이어주고 지역, 부문, 현장에서 운동기획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표방하고 있다. '진보전략회의' 회원들이 발표하는 '진보논평'을 본 지에 게재한다. 지지율과 선거의 정치공학한국의 제도정치가 후진적이라는 보편타당성은 정치인들의 정치인식이 허접하기 때문이다. 지난 10.28 재보궐 선거 결과에 대한 한나라당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수준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한나라당이 “이해가 안 되는 결과”라면서 실망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들의 상황인식과
지난 2009년 7월 22일, 하늘에서는 해가 달에 가리워지는 ‘우주쇼’가 펼쳐졌고, 바로 그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는 개정미디어법을 놓고 ‘막장쇼’가 벌어졌었다. 당연하게도, ‘우주쇼’는 모든 지구인들의 탄성을 자아냈고, ‘막장쇼’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불행하게도 황홀한 ‘우주쇼’는 언제 다시 올지 기약이 없건만, 다시는 오지 말았으면 했던 ‘막장쇼’는 시리즈로 계속된다. 그날의 ‘막장쇼’가 지나간지 3개월이 지난 10월 29일, 어이없는 ‘막장쇼’는 장소를 달리하여 재개봉한다. 이번엔 헌법재판소다.말장난헌법재판소 결정문이 언제나 중후하고 유려한 문장을 동원해 추상같은 권위가 넘쳐흘러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대략 난감한 결정문을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