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말 사상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군사정권 후보 노태우 씨를 당선시키기 위한 군대 내의 조직적인 부정선거 개입을 폭로한 L1씨. 군 당국이 부하 사병들을 대상으로 가혹한 형벌을 가하자, 그는 군 감옥에서 16일 간의 단식투쟁으로 맞선다. 이후 순탄한 군 생활로 큰 문제가 없는 듯 보였지만, 전역한 뒤에 군 당국의 테러와 보복은 오히려 더 노골화한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끊임없는 감시와 폭행에 시달렸고, 내부고발 전력은 취업의 문턱에서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극도의 가난과 불편, 소외감에 고통 받기를 3년여. 위험인물이라는 낙인을 떼고 가까스로 보안부대 사찰을 졸업한 그는 지금 한 정보기술 계통 벤처 사업체의 어엿한 사장님이다.

15년 전 자신의 행동에서 시작된 각성된 사회의식을 발판으로 그는 요즘 공익제보자 지원운동과 국토사랑운동을 찾아내 구상하고 후원하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다 손가락질을 해. 그런데 그걸 치유하는 것은 남이 해줬으면 생각해? 변화가 없는 거여 변화가…. 그래서 이 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거여. 2백 명씩 떼지어서 지들 땅을 땀 흘려 걸어본 사람은 부패하라고 빌어도 안 해요.”

▲ 불감사회 (참여사회, 2006)
사립학교재단의 비리를 언론에 고발한 L2씨, 1992년 총선에서 되풀이된 군대 내 선거부정을 폭로한 L3씨, 열차의 부속품 교체 문제를 언론에 제보한 철도청 공무원 M1씨와 H1씨, 감사원이 특정 기업에 특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린 감사원 직원 M2씨, 군의 무기구매 낙찰 비리를 언론에 공표한 H2씨, 청소년수련원을 운영하는 한 종교재단의 비리를 폭로한 H3씨,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저지른 납품비리를 고발한 H4씨… 이들 공익제보자 9명이 겪은 사회적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불온한 인물이라는 사회적 낙인, 강제 퇴직과 파면, 해고, 잇단 취업 실패, 직접적인 신체 공격, 도피생활, 가족․친지와의 갈등과 불화 등 헤아릴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뒤따랐다. 고용 기피 인물이 되어 극도의 궁핍과 좌절을 경험하고, 스트레스가 부른 위장병과 불면증에 시름했으며, 몇 년에 걸친 소송으로 인해 한 개인의 삶이 철저하게 짓이겨지는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사회의 냉대와 질시를 이겨내고 공익제보 이후의 삶을 성공적으로 꾸려간 경우는 이 책에 소개된 사례만 보더라도 손에 꼽을 정도다.

우리의 상식적인 판단이나 우려와 달리, 공익제보자들은 자신의 행위가 자신에게 이익을 줄지 불이익을 될지를 미리 계산하고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이 아니다. 공익제보자들을 심층 면접하고 이 책을 쓴 저자는 “그들은 존경할 대상이지만 나와 동일시 할 수는 없는 영웅(英雄)도 아니며, 인정할 수는 있지만 같아질 수는 없는 타자(他者)도 아닌, 그들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은 보통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조직의 내부 비리를 고발한 대가로 주어지는 후유증이 그토록 크고 혹독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과연 자신의 결심을 되돌렸을까. 사립학교재단의 비리를 언론에 고발한 L2씨의 말에 해답이 있다. “교사이기 때문에 올바른 아이들 앞에서 떳떳해야 한다. 수업시간에 문제제기를 합니다. 다른 사람은 피해가지만 떳떳한 교사가 되고 싶은 것이 문제제기의 출발점이라고 봐야죠.”

1990년 수서비리와 관련한 감사원의 내부 비리를 폭로한 이문옥 감사관이 내부 고발 이후에 겪은 고초를 똑똑히 목격한 M2씨도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투철한 의지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불의와 부정을 그냥 눈감아버리는 침묵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불안과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책의 마지막 사례인 H4씨는 대기업의 납품비리를 고발했다가 해고된 이후 10년에 걸친 법정 투쟁 끝에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 회사로부터 2천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받게 되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의 신념은 진정 박수를 받을만한 일이지만, 내부고발자를 사회적으로 보호해줄 제도적 틀은 여전히 취약한 것이 현실이다.

이문옥 감사관의 폭로를 계기로 공익제보자 보호의 필요성이 공론화된 이후 2002년에야 부패방지법에 공공분야 내부고발자 보호규정이 명문화됐고, 이후 5차례 개정을 거치면서 해당 조항이 좀 더 다듬어지긴 했지만 이 법의 실효성은 여전히 물음표다. 신분보장에 관한 부패방지법 62조의 해당 법조문은 이렇다.

제62조 (신분보장 등) ① 누구든지 이 법에 따른 신고나 이와 관련한 진술 그 밖에 자료 제출 등을 한 이유로 소속기관ㆍ단체ㆍ기업 등으로부터 징계조치 등 어떠한 신분상 불이익이나 근무조건상의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 누구든지 신고를 한 이유로 신분상 불이익이나 근무조건상의 차별을 당하였거나 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때에는 위원회에 해당 불이익처분의 원상회복ㆍ전직ㆍ징계의 보류 등 신분보장조치와 그 밖에 필요한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

이 선언적인 법의 혜택을 입은 공익제보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한 달 전 MBC <PD수첩>을 통해 9억 원대 해군 납품비리를 고발한 김영수 소령은 근무 평가에서 최하 등급인 ‘E’등급을 받았고 ‘업무적응 미숙’을 이유로 다른 부서로 전출됐다고 한다. 공익제보자 9명의 사례를 심도 있게 분석한 저자는 직장환경과 공익제보의 상관관계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는다.

“많은 사례가 보여주듯이 제보자들은 열의와 애정에 기초해 자신의 업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주변의 사람과 일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일에 특별한 애정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일에 대한 열정은, 도덕적인 부분에서도 긍지를 잃지 않기 위한 훗날의 공익제보와 연결되었다.”

군 선거부정을 고발한 이지문 씨는 어느 주간지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지난 20년간의 내부고발 역사를 돌아보면 이러한 내부고발이 없었다면 이들이 제기한 부정과 비리, 예산 낭비, 불법이 과연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부고발은 누구보다 문제와 잘못을 잘 아는 내부인에 의한 고발이라는 점에서 ‘적발’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부고발의 중요성은 사후 적발의 의미보다 누구든지 비리나 부패 등을 저지르면 언젠가는 적발된다는 사실을 각성시킴으로써 사전 예방의 의미가 더 크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세상을 보다 살 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기꺼이 헌신한 수많은 공익제보자들. 세상은 그들에게 아직도 익명 뒤에 숨기를 강요하는데, 부끄럽게도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눈물에 무임승차하고 있다. 공동체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내면에서 무너진 공익제보자들의 뼈아픈 경험을 사회 전체가 집단 방관해왔기 때문이다. 하여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공동체는 살아있는가? 개인을 적절하게 통합하고 그들의 기대를 받고 있으며 신뢰받고 있는가? 공동체 회복을 위한 기억의 연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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