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7월 22일, 하늘에서는 해가 달에 가리워지는 ‘우주쇼’가 펼쳐졌고, 바로 그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는 개정미디어법을 놓고 ‘막장쇼’가 벌어졌었다. 당연하게도, ‘우주쇼’는 모든 지구인들의 탄성을 자아냈고, ‘막장쇼’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불행하게도 황홀한 ‘우주쇼’는 언제 다시 올지 기약이 없건만, 다시는 오지 말았으면 했던 ‘막장쇼’는 시리즈로 계속된다. 그날의 ‘막장쇼’가 지나간지 3개월이 지난 10월 29일, 어이없는 ‘막장쇼’는 장소를 달리하여 재개봉한다. 이번엔 헌법재판소다.

말장난

헌법재판소 결정문이 언제나 중후하고 유려한 문장을 동원해 추상같은 권위가 넘쳐흘러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대략 난감한 결정문을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드는 건 헌법재판소가 할 일이 아니다. 허무개그는 개그맨들이 하는 걸로 족하다. 근엄하게 법복을 입으신 분들이 개그맨들의 밥줄까지 끊어놓으려 하는 건 상도의를 거스르는 반칙이다. 문제는 이런 반칙이 상당히 자주 있다는 것. 불과 몇 년 전에 “관습헌법”이라는 놀라운 논거를 제시함으로서 21세기 대한민국을 졸지에 경국대전 치세로 돌려보냈던 헌법재판소는 또다시 “절도죄는 인정되나 장물소유권은 도둑님께” 류의 결정문을 내놓았다.

이미 미디어관련법 개정과정에서 벌어졌던 의회의 ‘막장쇼’가 어떤 절차적 하자를 가지고 있는지는 분분하게 논의한 바가 있다(미디어스 7월 23일자 ‘미디어법, 참을 수 없는 절차상의 하자’ 참조). 따라서 이하에서는 절차상의 문제를 상론하지 않을 것이나,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에 따르면 재판관 다수가 이러한 절차상의 하자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으며 그 결과 국회의원들의 의안 심의·표결권이 침해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윤성 국회부의장의 진행으로 “날치기”에 준하여 이루어졌던 미디어법 개정안 의결과정은 국회법이 정한 절차를 대부분 위배했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이 세간의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절차상의 위법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각 법률안의 무효확인청구에 대해선 기각을 해버렸다는 점이다.

당연히 기각결정을 한 다수 재판관에게도 논리는 있다. 그 주요 논리 중 하나는 권한쟁의심판에서 처분의 취소나 무효결정은 헌법재판소의 재량사항일 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가 불법을 확인해줬으니 그 시정은 원래 책임 있는 기관이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첫 번째 논리인데, 헌법재판소법 상 권한쟁의에 관하여 취소 및 무효결정을 “할 수 있다”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본 조항은 명백한 위법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취소 혹은 무효의 결정을 마음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고 해석할 이유가 없다. 처분의 불법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분의 취소 혹은 무효를 결정하지 않을 바에야 도대체 헌법재판소가 권한쟁의심판을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결국 헌법재판관 다수는 법률규정이 강제조항의 형식으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빌미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코메디

공전절후한 4차원 안드로메다급 말장난이 되어버린 헌법재판소의 결정문보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오히려 헌법재판소까지 이 문제를 끌고 간 정치인들의 행태이다. 근본적인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헌정질서가 보장하고 있는 대의제체제, 즉 정당정치가 완전히 실종되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권한쟁의심판은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 정상적인 해법은 아니다. 해법은 정치 자체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들어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빈번히 헌법재판소로 넘겨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신행정수도이전 건이며, 한미FTA관련 사안들이며, 전략적유연화에 관한 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무수히 많다.

각 사안들이 가지고 있었던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권이 자체적으로 해결했어야 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헌재에 책임을 떠넘겼다는 거다. 권력중추의 독선과 여당의 밀어붙이기, 야당의 반발과 의정의 파행이 여지없는 공통점으로 각 사건에서 발견되고, 그러한 특징들은 이번 미디어법 개정과정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시시때때로 사건의 주인공들이 역할을 바꾼다는 점만을 제외하곤 언제나 비슷한 양상이 전개된다. 그 결과 헌법재판소는 정치권이 자기 책임을 손쉽게 떠넘길 수 있는 일종의 도피처가 되어버렸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헌법재판소로 하여금 훌륭한 결정을 내리라고 요청하는 것은 실로 난망한 일이다.

이렇게 어색한 구도를 만들어놓은 후에 하는 일이 기껏 헌법재판소 정문 기둥을 앞에 두고 철야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절간에서 이만배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삼보일배를 하고 어떤 이들은 촛불을 켠다. 뭐하자는 걸까?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미륵불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니면 델피신전의 신관이라도 된다는 건가? 뭘 바라는 걸까? 정치가 원내에서 또는 장외에서 불꽃 튀는 설전과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안수 떠놓고 손바닥을 비비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코메디가 아니다. 의원직 전원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겠다던 민주당은 헌법재판소 판결 전날 이루어진 보궐선거에서 3:2로 승리했다고 환호를 올린다. 거기엔 미디어법과 관련된 정치도 없고 투쟁도 없었다. 4대강 개발은 반대한다고 하면서 경인운하는 찬성하고 있는 어떤 의원이 승리의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TV화면에 크게 부각되는 판국에, 조중동 방송이 안방을 장악한다고 한들 대세에는 지장이 없는 거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가져올 파장에서 보다 주목되는 것은 정치권의 충돌이 아니다. 어차피 청와대는 휘파람을 불고 있을 것이고 여당은 다 끝난 일이라고 덮어버릴 일만 남았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헌법재판소를 공격하는 걸로 또다시 자기책임을 회피할 것이다. 시민사회는? “희망과 대안”으로 뭉치려나? 아무리 봐도 경천동지 상전벽해에 준하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개정미디어법 체제를 뒤집을만한 건수는 보이지 않는다. 헌법재판소가 절차상 위법을 지적하고 국회로 하여금 그 흠결을 치유하라고 권고를 했더라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여당이 이렇게 나오게 되면 앞길은 마냥 막막한 거다.

진정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과 중앙을 위시해 미디어법 개정에 사활을 걸었던 언론사들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자마자 이들은 환호작약한다. 너도 나도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선언하며 종편채널의 꿈에 들떠있다. 하나같이 이들은 자신들이 자금과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겠노라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예컨대 중앙일보는 “좌우 이념대력의 스펙트럼이 아닌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가치를 방송에 도입하겠다”고 사자후를 뿜어대는 실정이다. 물론 이 발언을 한 당사자는 자신의 포부가 전형적인 보수이데올로기라는 점은 살짝 감추고 넘어간다. 이렇게 개정 미디어법과 관련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려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사고는 정치인들이 치고, 욕은 헌법재판소가 먹는 와중에 조선 중앙을 비롯한 언론재벌과 재벌언론은 로또대박을 맞은 듯이 떼돈을 벌 꿈에 부풀어있다. 제 돈 들여 돈 벌겠다는 것을 막을 이유도 없고, 배 아파할 이유도 없다. 자본주의사회 아닌가? 개정 미디어법의 논리가 바로 그거고. 게다가, 어차피 개발동맹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장삼이사들에게, 늘어나는 아파트 프리미엄에 기뻐하는 것만큼 딱 그 정도의 수준으로 조선방송 중앙방송이 선정적인 방송을 내보낸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인가?

헌법재판소 탓하지 말고

다시 한 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돌아가자. 헌법재판소가 무효청구를 인용하지 않은 것은 의원들의 입장에서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도할 일일지도 모른다. 결정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당시 본회의장은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는데, 한나라당 의원들에 의한 대리투표는 물론이려니와 민주당 등 야당의원들의 투표방해 역시 결정문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시 말해,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국회법에 따른 정상적인 심의·표결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 데 대하여 공히 그 위법성을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의원들에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헌법재판소가 청구를 인용하였더라면 법률안 처리를 무효로 만들 정도로 위법행위를 한 모든 의원들은 총 사퇴를 해야만 한다. 본연의 의무인 법률안 처리를 하는 데 있어서조차 위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의원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적 사안을 헌법재판소로 손쉽게 넘기는데 버릇이 들어버린 정치인들 스스로가 대오각성하는 것이다. 헌법이 괜히 3권분립을 엄정하면서 의회에 막대한 권한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헌정질서를 운운하는 국회의원들이 헌법에 보장된 자신들의 권리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헌법재판소가 의원들을 임명하게 하던가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후보를 승인하던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들의 주제파악도 못하는 주제에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가지고 비아냥거릴 자격은 최소한 현직 의원들에게는 없다고 봐야한다.

야당의원들, 특히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까지 했던 민주당 의원들은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의원직 총사퇴를 하고 다시 투쟁에 돌입하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항간에 개정 미디어법을 헌법소원을 통해 무력화시키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으나 그건 굳이 의원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설 필요가 없다. 개정 미디어법으로 인하여 피해를 본 당사자들이 직접 헌법소원에 나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정치인들은 지금부터라도 진짜 정치를 하기 바란다. 촛불이니 삼보일배니 하는 21세기형 샤머니즘 정치는 ‘막장쇼’의 외전일 뿐이다. 차라리 금배지 떼고 국회해산하고 정권타도투쟁을 벌이던가. 그게 더 현실적이지 않나?

#미디어법헌재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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