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방한을 둘러싼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오는데, 대통령실과 여당의 대응이 중요하다. 부풀리지 말고, 없는 걸 있다 혹은 있는 걸 없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정치적 구도에 기대 아무데나 가져다 붙이거나 ‘전 정권 반대’의 맥락 속에 모든 걸 가둬놓으려 해선 안 된다.

우리 언론과 정치권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사죄 수위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지만, 이건 애초에 별 쟁점도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의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을 하게 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는 발언에 굳이 의미부여를 하려는 노력도 있지만, 냉정하게 얘기하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내용의 발언은 아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말하는 “징용공 문제”란 ‘어려운 환경에서 노동을 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 문제’를 말한다. 그러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노동을 강요한 일을 인정하고 이의 피해를 보상하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힘들고 슬픈 경험”이 무엇 때문에 발생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확고하다는 점에서 원래 일본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총리 개인의 의사 표명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봐도 ‘진전된 입장’이라는 일부 언론의 평가는 사실의 왜곡이다. 조선일보가 8일자 지면에 정리한 ‘일본의 역대 과거사 발언’을 보면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1990년 5월 가이후 도시키 총리가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과 슬픔을 체험하신 것에 대해 겸허히 반성하며 솔직히 사죄하는 마음”이라고 한 것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성'과 '사죄'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가이후 도시키의 이 발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의 강제성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나 주변국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 표명으로 볼 수 있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전에 나왔다. 즉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고노 담화 이전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는 수준이다.

다만 기시다 총리 발언에 그나마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기자들과의 추가 문답에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정부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아베 신조 정권은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등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과거 정부의 담화, 특히 고노 담화를 겨냥해 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하다 무산된 바 있다. 이 점으로 보면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더 후퇴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진전된 입장’을 내놓으라는 우리 요구에 대한 동문서답인데, 이 정도에도 의미부여를 해야 한다는 것은 씁쓸한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나란히 걷고 있다.(대통령실 제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나란히 걷고 있다.(대통령실 제공, 연합뉴스) 

양국 정상이 추후에 히로시마 원폭 한인 희생자 위령비에 함께 참배하기로 한 걸 성과로 꼽는 분위기도 있는데, 이것도 냉정하게 봐야 한다. 히로시마 원폭은 그 자체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일본이 납북자 문제와 함께 자신들의 역사적 위상을 ‘피해자’로 ‘워싱(washing)’하는 주요 소재다. 한인 희생자 위령비의 존재는 당시 재일 한국인들이 이러한 ‘피해의 주장’에서도 배제됐다는 점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워싱’의 혐의를 더 짙게 한다. 실제 일본의 주류는 원폭 피해만 말하지 왜 그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만일 두 정상이 참배를 통해 ’당시 일본 전쟁 지휘부의 무모한 고집이에 따른 미국의 원폭 투하로 한일 민간인의 무고한 피해가 야기됐다’는 점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참배는 의미가 있다. 이게 가능하려면 일본의 태도 변화와 우리 지도자의 분명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히로시마는 기시다 후미오의 지역구인데다, 한국 대통령은 일본이 뭘 하든 다 ‘오케이’라는 태도다.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고 보면,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에도 “양국이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미래 협력을 위해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는 인식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또 말했는데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다. 국민들이 그걸 모를까봐서 좋은 대학 나온 엘리트 출신인 대통령이 굳이 가르쳐주겠다는 것인가?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의미 있는 세력이나 전문가가 존재하긴 하는가? 왜 허수아비 때리기를 계속하는가? 정권의 대일정책에 대한 반대를 ‘전 정권’의 틀에 가둬놓고 그것에 대한 반대를 지속적으로 표명하는 걸로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정파적 문법이 아닌가?

오히려 일본은 한 발짝도 움직일 마음이 없는데, 일본 총리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진정성을 확인했다느니 하는 게 국익에 반하는 것이다. 모범답안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선 양국간 이견이 있지만 이 간극은 장기적으로 좁혀나가도록 하고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겠다”고 하면서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거다. 이런 태도였다면 야당도 좀 더 정교한 논리로 비판하라는 주장에 힘이 실릴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러니 야당도 안이한 접근을 반복한다.

기시다 총리의 발언을 과대포장하고 의미 부여하는 것은 정권이 솔직하지 않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일본 입장에선 ‘컵에 반 따른 물’ 같은 건 애초에 주요 고려사항도 아니었다. 일본 언론들이 평가하는 이번 한일정상회담의 주요 의미는 안보와 경제다. 한미정상회담과 ‘워싱턴 선언’ 이후에 일본이 일정을 바꿔 긴박하게 움직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전략자산을 더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 등 압박을 심화하겠다는 의지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분명해진 이상, 이 방향의 선두에 일본이 서겠다는 거다. 그게 자기네들 국익에 부합한다고 보는 거다.

윤석열 대통령은 ‘워싱턴 선언’에 일본의 참여도 열어놓겠다고 했는데, 이거야말로 일본의 관심사였다. 일본은 자체 핵무장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고 핵연료 재처리를 통한 플루토늄 생산 등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비핵 3원칙’ 등으로 자체 핵무장은 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에 일본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독도 영유권 문제나 초계기 갈등에 대해 한국에 제대로 할 말을 하지 못한다며 연일 기시다 후미오를 꾸짖던 산케이 신문이 윤석열 대통령을 배우라는 훈수를 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의문인 것은 ‘워싱턴 선언’을 통해 만들기로 한 ‘핵협의그룹(NCG)’에 대해 대통령실은 “한미 양자 간 논의가 다자 간 논의인 나토식 핵공유보다 더 실효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는 거다. 만일 그 단위가 뭐든 실제적으로 동아시아 전략자산 전개와 운용에 관해 한미일이 협의하는 구조가 형성되는 방향으로 가는 거라면 대통령실의 이전 설명은 그야말로 ‘아무말 대잔치’로 전락한다. 그러니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일단 한미 양자간 기구부터 명확히 하고, 필요하다는 일본도 미국과 동일한 형태의 논의 기구를 만들 수 있음을 언급한 거라고 ‘톤다운’ 했다.

이런 설명은 두 가지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첫째, 그런 논리라면 미일간 문제는 미일이 협의할 문제인데 한국이 “일본도 할 수 있다”고 굳이 말하는 이유가 뭔가? 둘째, 한미 간 또 미일 간 확장억제 논의 기구가 성립된다면 미국은 한국용 전략자산과 일본용 전략자산을 따로 운용하게 되는 것인가? 과연 미국이 그렇게 하겠는가, 아니면 동아시아를 통으로 놓고 중국 러시아를 겨냥한 자기들 계획대로의 전략자산 운용을 하겠는가? 뭐가 더 개연성이 높겠는가?

결국 ‘워싱턴 선언’과 이번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방한은 중국-러시아와 대립하는 최전선으로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군사적 의미부여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한국은 미중 양쪽 중 하나를 택하라면 미국을 택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또 미중이 굳이 싸우겠다는 것에 대해선 제발 좀 싸우지 말라고 할 수밖에 없는 팔자이다. 그러니 정권이 설명해야 할 것은, 그러한 운명을 거슬러 굳이 동아시아를 군사적 경제적 화약고로 만드는 데 함께하면서 누구를 향한 어떤 이익을 얻어내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거다. “우리는 문재인 정권과는 다르다”, 이거 하나로만 때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남 얘기 그만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집권 세력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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