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보수·경제지가 반도체업계 연구·개발 직군에 '주52시간' 노동 상한을 제외하는 반도체특별법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관심을 보이자 반색했다. 이재명 대표의 지지층 외연 확장이 '친기업 우클릭'으로 귀결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노동권을 약화시키는 게 민생·혁신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언론 비판이 제기된다. 장시간 노동으로 산업 경쟁력을 살리겠다는 발상은 원인 분석이 잘못된 시대착오적 판단이라는 지적이다. 집권을 위해서라면 노동권도 훼손할 수 있다는 얘기로 윤석열 대통령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다는 시민사회 비판이 이어진다.

지난 3일 이재명 대표는 국회에서 '반도체특별법 노동시간 적용 제외 어떻게?'라는 제목의 정책 디베이트(토론회)를 개최했다. 반도체특별법은 지난해 11월 국민의힘이 발의했으며 연구·개발 노동자의 주52시간 노동 상한제 제외가 주된 내용이다. 민주당은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신년 들어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재명 대표가 '얘기를 들어보자' 말하면서 이날 토론회가 열리게 됐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달 2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반도체특별법과 관련해 "필요한 조치를 과감하고 전향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앞서 민주당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결정 과정에서도 이재명 대표가 우클릭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자 '정책 디베이트'라는 이름으로 토론회를 연 뒤 지도부 일임을 결정하고 결국 기존의 '조세정의' 정책 방향을 뒤집는 모습을 보였다.
이재명 대표는 토론회에서 "특정 산업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고 하니 할 말이 없더라"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표는 "총 노동시간을 늘리는 게 아니라 특정 시기에 유연성을 부여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데 공감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이 3일 발표한 조합원 설문조사 결과에서 연구·개발 직군 90%(응답자 904명 중 814명)는 '주52시간' 적용 제외 방안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한다는 응답은 6.2%에 불과했다. 응답자 88.2%는 '주52시간' 적용 제외가 연구·개발 직군 업무 효율성에 긍정적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서술형에서는 "3년 연속 상위고과를 받았지만 월 초과 근무시간은 평균 5시간을 거의 넘지 않았다", "52시간 초과근무를 통해 혁신을 이뤄내겠다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 "52시간 적용 제외 시 고과를 받기 위해 시간만 채우는 인력이 늘어날 것"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한겨레는 4일 관련 기사에서 이재명 대표가 이해 부족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반도체특별법은 '주52시간' 적용 제외가 쟁점인데 총 노동시간을 유지한 채 특정 시기 집중근무를 허용하자는 주장은 맥락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한겨레는 이재명 대표 주장에 대해 "현행 근로기준법의 유연근로제나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다 중단된 '연장근로 관리단위 개편'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는 3일 <부자감세에 이어 노동개악까지, 이재명 대표 ‘우클릭’ 행보 중단하라> 성명에서 "정책의 우클릭을 넘어 집권을 위해서라면 노동자 권리도 훼손할 수 있다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라며 "노동시간 규제 완화는 단순한 친기업 정책이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참여연대는 이어 "내란수괴 윤석열의 노동시간 연장 시도를 비판해 온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노동시간 규제 완화를 논의하는 것도 자기모순"이라며 "금투세 폐지에 이어 노동시간 규제 완화까지 윤석열과 다를 바 없는 정책 행보를 보이는 이재명 대표를 규탄하며, 이는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존중사회'라는 민주당 강령에도 어긋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고 말했다.
정의당은 3일 성명에서 "'69시간 근무제'를 말한 윤석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정의당은 "이재명 대표는 단서를 달았지만 결국 회사가 요구하는 만큼 특정 시간 몰아서 일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며 "노동계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선택적근로제, 탄력근로제, 재량근로제 등 이미 관련 제도가 있다. 그러니 이재명 대표가 던져야 할 질문은 현행제도를 놔두고 '왜 반도체 기업에만, 아니 삼성에만 노동자를 혹사해도 되도록 특혜를 주어야 하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4일 경향신문은 사설 <주52시간제 허무는 게 민생이고 혁신인가>에서 "정치권이 경제·민생 위기 타개 방안의 하나로 논의 중인 반도체 경쟁력 강화가 시대착오적인 ‘주 52시간 노동 예외’ 법제화로 변질되고 있다"며 "한국 경제가 처한 구조적 내수·수출 부진과 글로벌 보호주의 부상 등 위기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고루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삼성전자 위기는 조직 안팎에서 ‘삼무원(삼성전자 공무원)’이란 자조가 나올 만큼 관료적 보신주의가 팽배해지면서 혁신과 도전 대신 원가절감 경영에 안주해온 탓이 크다. 반도체 패러다임 변화를 읽지 못하고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투자 타이밍을 놓친 것도 결정적 원인"이라며 "그런데도 주52시간 노동 규제 탓을 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한국 경제는 심각한 저출생과 선도 기술 부족, 글로벌 통상환경 악화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일선의 기업부터 정부까지 기존의 임금 경쟁력에 기반한 수출주도 경제에 집착해선 절대 돌파할 수 없다"며 "주 52시간 노동 규제를 허물어 노동자에게 부담을 전가할 땐, 오히려 인재 유출 우려만 커질 것이다. 저출생을 심화시킬 걱정도 크다"고 했다.
같은 날 한겨레는 사설 <이재명표 실용이 ‘주 52시간’ 완화로 이어져선 안 된다>에서 "주 52시간 예외 논의는 실익이 없을뿐더러 반도체뿐 아니라 다른 산업에도 노동시간 규제를 허물 수 있다는 잘못된 정책 신호를 줄 수 있다"며 "삼성전자 등에서 근무한 복수의 연구개발 노동자들은 경영 전략의 부재가 근본 원인인데 노동시간을 늘려 반도체 위기를 극복한다는 발상은 안일하다고 반박한다. 휴식권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외려 우수 인재가 유출될 것이라고 경고한다"고 썼다.
한겨레는 "만일 이 대표가 노동시간 규제를 허무는 법안의 국회 통과에 힘을 싣는다면, 이는 장시간 노동을 유발하고 노동자 휴식권을 빼앗는 퇴행적 정책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며 "규제 완화를 외치는 쪽에선 건강권 보호를 위한 조처는 거론조차 하고 있지 않다. 장시간 노동이 여전한 우리 실정에서 득보다 실이 큰 정책에 섣불리 부화뇌동해선 안 된다"고 했다.
반면 보수·경제지는 이재명 대표의 행보에 호응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4일 사설<'몰아서 일하면 안 되나' 李 대표, 이 상식 왜 외면했나>에서 "반도체 산업은 경제만이 아니라 세계의 군사·안보 지형까지 바꿔 놓을 수 있는 전선 중의 최전선이다. 반도체를 핵심 전략 산업으로 일궈온 한국이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탈레반식’ 주 52시간제라는 족쇄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며 "이 대표가 민노총 등 지지 세력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해 주 52시간제 개혁의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사설 <‘반도체 주 52시간 예외’ 입법, 李 실용주의 전환 시금석 될 것>에서 "이 대표가 고소득 연구개발자에 한해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밝히면서 주 52시간제 예외를 전향적으로 수용할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근 이 대표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우클릭’ 행보를 가속화하는 것도 힘을 보탠다"며 "이 대표의 태도 변화는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신성장동력의 불씨를 점화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이 대표의 약속이 표심을 노린 정략적 행보에 그치지 않으려면 반도체법을 비롯해 시급한 경제·민생법안부터 서둘러 처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세계일보는 사설 <미·중 AI 전쟁에도 반도체법 하나 처리 못하는 巨野>에서 이재명 대표의 주장에 "맞는 말"이라며 민주당 내 반대 목소리를 비판하는 데 집중했다. 세계일보는 "경직적인 주 52시간 근무제는 기업에 족쇄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야당 일각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유연근무제’나 ‘특별연장근로’를 내세워 어깃장을 놓고 있는 게 한심할 따름"이라며 "기업을 넘어 국가 간 패권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산업이다. R&D 인력에 한해서라도 예외 규정을 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라고 했다.
서울신문은 사설 <‘삼류 위기’ AI 생태계… 마지막 골든타임 놓치지 말아야>에서 "AI 기술과 반도체는 불가분의 관계"라며 "AI 열차의 막차라도 타려면 반도체 기업에 대한 지원과 규제 폐지, 주 52시간 규제 적용 예외 등을 포함한 반도체특별법 통과는 ‘기본’"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신문은 "딥시크 쇼크에 이재명 대표는 AI 추경을 주장한다. 그보다 당장 반도체특별법부터 통과시켜 달라는 업계 호소가 조금도 과하게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 밖에 서울경제 <巨野 반도체특별법 조속 처리로 李 ‘실용 변신’ 진정성 보여라>, 파이낸셜뉴스 <난국 빠진 경제, 李 대표는 언급한 실용주의 실천을> 등의 사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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