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통제하려고 한 정황이 폭로됐다. 고 김영한 전 수석이 남긴 비망록에 김기춘 비서실장 등이 유신스타일의 언론 통제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 및 정부에 대한 비판적 언론 보도를 틀어막으라고 지시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지난 8월 별세한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2014년 6월14일부터 2015년 1월9일까지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사항 등 수석비서관 회의내용을 기록, 비망록을 남겼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은 2일 기자회견을 열고 김 전 수석의 유가족에 동의 아래 비망록을 일부 공개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이 2일 11시 광화문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공개했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박근혜 정부의 언론·표현의 자유 침해

고 김 전 수석의 비망록에는 청와대가 언론의 자유 침해 소지가 있는 지시사항을 내린 내용들이 담겨있다. 2014년 7월2일자 메모에는 김 전 비서실장이 ‘언론환경 - 허위, 왜곡보도, 정부신뢰, 권위추락 – 대응수단 강구’이란 문구가 적혀있는 게 대표적이다.

김 전 비서실장의 지시사항을 적어놓은 메모에는 ‘요즘 국정운영을 둘러싼 언론환경이 우호적이지 않음. 특히 부정확한 보도, 악의적 보도, 허위 왜곡보도로 정부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청와대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며 비판하는 일이 만연함’라는 내용과 ‘반드시 정정보도, 언론중재위 제소, 고소, 고발·손해배상 등 이에 상응하는 불이익이 가도록 해야 유사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히 대응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돼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이 2일 공개한 전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 중 '시사저널, 일요신문'에 대한 지시가 나온 부분.

또 7월15일자 메모에는 ‘시사저널, 일요신문 – 끝까지 밝혀내야, 피할 수 없다는 본때를 보여야,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 정부·홍보수석실 조직적·유기적으로 대응’이란 대목이 등장한다. 7월17일에는 ‘만만회 고발, 트위터글 6건 사이버수사대 내사 지휘’라고 씌어 있다.

이러한 문구가 쓰여진 당시는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이 ‘만만회’가 비선실세라고 폭로하며 파문이 일던 중이었다. 논란이 확대되자 김 전 비서살장은 관련 내용을 보도해온 ‘시사저널·일요신문’을 특정하며 조치를 지시했고, 만만회 의혹이 SNS에서 확산되자 특정 트위터 글에 대해 ‘사이버수사대 내사’까지 주문한 것이다. 청와대가 언론의 자유를 넘어 표현의 자유까지 침해했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 언론의 자유까지 침해한 청와대

이뿐만 아니라 김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김 전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외국 언론까지 강력 대응하도록 지시한 내용도 등장한다.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은 2014년 8월3일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누구와 만났을까>란 칼럼에서 박 대통령과 정윤회씨가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만났다는 소문을 인용했다. 이에 자유청년연합 등은 가토 다쓰야 전 지국장을 박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8월7일자 메모에는 ‘산케이 잊으면 안된다 – 응징해줘야 List 만들어 보고, 추적해 처단’이라고 적혀있다. 또 8월9일에는 ‘국가 원수의 경호안전상 대통령의 동선을 공개할 수 없음’이란 내용이 담겨있다. 실제로 청와대는 ‘대통령 동선공개 불가 사유’로 들며 메모에 적힌 방법 그대로 재판에 대응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이 2일 공개한 전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 중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관련 부분.

8월10일자 메모에는 ‘산케이 – 외교문제X, 특정기자의 범죄행위에 대한 대응(法), 언론자유 이름으로 국가원수 모독 용납 될 수 없다’란 내용도 있다. 산케이 신문 보도 문제가 외교문제까지 번져선 안 되며, 일개 기자의 대통령 명예훼손에 따른 것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지시사항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대통령은 공인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명예훼손을 주장하기 어렵다. 검찰은 박 대통령을 공인 박근혜와 사인 박근혜로 분류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사인 박근혜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8월20일자 메모에는 ‘산케이, ①위법성 ②언론의 자유 ③조선(?)’이란 대목이 등장한다. 김 전 비서실장이 산케이 신문 칼럼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명예훼손의 위법성을 강조하며 언론의 자유 차원을 넘는 내용이었다고 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대목은 가토 전 지국장이 자신의 칼럼에서 조선일보 글을 인용한 것에 대한 대응 방법을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 중이었던 것으로도 해석된다. 실제 해당 칼럼을 작성한 조선일보 기자는 재판 증인으로 채택됐으나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고, 법적 처벌도 받지 않았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이 2일 공개한 전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 중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관련 부분.

10월3일자 메모에는 ‘산케이 처리’라고만 적혀있다. 검찰은 같은해 10월2일 가토 전 지국장에 대한 3차 소환조사를 마치고 10월8일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이후 가토 전 지국장은 10월1일자로 도쿄본부로 발령이 났다.

10월5일자 메모에는 ‘산케이 처리 후 후속대비’란 부분이 적혀있다. 또, ‘이슈화 예상, 위안부 문제 고지 선점, 일 정부 반전 기도 예상’, ‘언론사회 반발-국내외 기소 일관된 논리로 설명’, ‘일본 및 주변국 및 언론단체 설명’, ‘법과 원칙<언론자유. 이 이슈 외의 다른 이슈와 묶어서 보도 예상’, ‘불가피성 설명, 주요 공관에 설명, 언론단체 설명’ 등의 내용도 기록돼 있다. 이는 청와대가 외신 언론 자유 침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관련 이슈에 대한 외신의 보도나 언론시민단체 등의 비판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언론노조 김환균 위원장은 김 전 수석의 비망록에 대해 "핵심은 (박근혜 정부가) 언론을 어떻게 통제하려 했느냐에 집중 돼 있다"며 "(비망록에 적힌)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문구를 들여다 볼 때마다 나치의 괴벨스가 생각났다"고 밝혔다. 그는 "(박근혜 정부는) 정부를 비판하는 의견에 대해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적개심을 가졌다.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체제 반국가 사범인 것처럼 적개심을 가지라고 지시했다"며 "이것이 박근혜 정부의 실상"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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