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혼수상태에서 회복했다. 이 회장은 지난 10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그 동안 혼수상태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 삼성은 이승엽 홈런과 엮어 언론에 내보냈다. 삼성라이온스 이승엽 선수는 이날 25일 3점짜리 장외홈런을 쳤는데 캐스터가 “이승엽 장외홈런”이라며 목소리를 높이자 이 회장이 눈을 잠시 떴다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 <한겨레> 2014년 5월26일자 2면 기사. 해당 이미지를 클릭하면 확대해 볼 수 있습니다.

언론은 삼성이 전한 이야기를 충실히 받아썼다. 포털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관련 기사만 수십 건이다. 대다수 언론이 이건희 회장과 이승엽 선수 홈런을 엮어냈다. TV조선은 <이건희 회장, 이승엽 홈런에 눈 번쩍…의식 회복>이라는 리포트에서 “심근경색으로 입원해 2주 넘게 치료를 받고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의식을 찾았습니다. 놀랍게도, 이승엽 선수의 홈런 소식에 눈을 번쩍 떴다고 합니다”라고 전했다.

중앙일보는 26일자 2면에 <“이승엽 홈런” 고함에 눈 뜬 이건희 회장>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MBN 기사 제목은 <“홈런 소리에 눈 떴다”…이건희 회장 혼수상태서 회복>이다. 매경닷컴은 <수면 상태 이건희 회장, 이승엽 홈런 한방에 기적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부산일보 기사 제목은 <이건희 회장, 이승엽 홈런에 눈 떴다>다. 스포츠조선 기사 제목은 <이승엽의 홈런에 이건희 회장이 눈을 뜨게 된 사연>이다.

진보언론도 같았다. 한겨레는 이 소식을 26일자 신문에 2면에 실었다. 기사 제목은 <“혼수상태 이건희 회장 ‘이승엽 홈런’에 눈 번쩍”>(온라인 <“이건희 삼성 회장, 혼수 상태에서 회복”>)이다. 한겨레는 캐스터의 말이 나온 순간 이건희 회장이 ‘눈을 크게 번쩍 떴다가 감았다’는 삼성 구단 관계자 말과 “이런 얘기를 들으니 굉장히 행복하다. 빨리 쾌차하셨으면 좋겠다”는 이승엽 선수의 말을 전했다. 경향닷컴이 누리집에 노출한 기사제목은 <삼성서울병원 “이건희 회장, 이승엽 홈런에 눈 크게 떠”>다.

언론이 이건희 회장 상태에 주목하는 이유는 재계 1위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이 삼성그룹 사보에나 실릴 법한 야구 이야기를 그대로 보도한 것은 과도하다. 이 회장이 병상에 누워 있던 동안 언론이 ‘충성경쟁’을 벌이고 있고, ‘회장님은 일어나야 한다’는 “주술”을 저널리즘인양 포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이승엽 홈런에 이건희 회장의 눈이 번쩍였다는 내용을 어뷰징한 언론사 기사 리스트 (출처=@neoscrum)

한겨레 나들 안영춘 편집장은 <미디어스>와 통화에서 “언론이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출입처 발로 받아 일제히 대서특필했다”며 “저널리즘이 아닌 주술, 무당이 해야 할 소리를 기자와 언론이 아무 스크린 없이 쓴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삼성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영향력에 대해 현장 기자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며 “특히 재벌 오너와 관련한 기사를 아무 스크린과 성찰 없이, 전체 지면과 분리해 쓰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이 광고를 끊으면 일간지조차 망할 수 있는 상황이다. 삼성전자서비스 간접고용노동자 셋이 죽었고, 서울 서초동 삼성 사옥 앞에서는 노동자 500여 명이 무기한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지만 이 소식은 사회면 한 구석으로 밀려난다. 반면 언론은 삼성 내부동향과 이건희 회장의 건강상태와 이재용 부회장의 한마디 한마디를 대서특필한다. 이건희와 ‘포스트 이건희’ 이재용을 향한 충성경쟁이 시작됐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