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윤석열 대통령은 유난히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다. 그가 외치는 ‘자유민주주의’는 이념적으로 ‘반공주의’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냉전 이후 중국, 러시아 등 ‘비자유주의 진영’에 속한 구 공산권 국가와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반-비자유주의(anti-illiberal)’의 속류적 버전으로 해석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것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라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적 지향보다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것은 적법절차(due process)의 중시이다.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독재와 하나의 쌍을 이뤘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일반화된 표현이다. 이제 독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더 이상 이념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핑계이다. 때문에 오늘날은 권위주의가 제도와 절차보다 우위에 놓이느냐가 민주주의 실패 여부의 기준이 되는 거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9월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종섭 국방부 장관.(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9월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종섭 국방부 장관.(연합뉴스)

따라서 앞서 ‘반공주의’ 노선이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정당화 되려면 적법절차의 중시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에서 일어나는 최근의 사건을 보면, 절차가 무시되는 일이 비일비재다. 심지어 보수언론도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게 이른바 채상병 사건의 피의자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호주대사 임명과 사실상의 '도둑 출국'이다. 이종섭 전 장관은 해병대 예비역과 야당의 반대 속에 10일 도망치듯 호주로 떠났는데, 이 과정은 대다수 언론이 지적하듯 이해할 수 없는 대목으로 점철돼 있다.

전직 국방부 장관이 대사로 임명된 사례 자체가 이례적이다. 외교관이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의 특임공관장 임명이 별도로 필요했다. 다른 사례와 비교해 더 많은 검증이 필요했을 거라는 뜻이다. 대통령은 평생 수사를 해온 검사 출신이다. 이런 점에서 이종섭 전 장관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가 돼 있다는 사실이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대통령실은 수사기관의 조치는 사전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했는데, 몰랐다 해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통령이 ‘출국금지 됐어도 상관없다’고 여긴 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는 얘기다.

출국금지 조치가 논란이 되자 공수처는 이종섭 전 장관에 대한 조사를 앞당겨 진행했다. 언론은 이 조사가 명분이 돼 출국금지 조치가 해제될 걸로 전망했다. 실제 법무부는 이종섭 전 장관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법조인들은 이런 사례가 흔치 않다고 말한다. 한겨레 11일 사설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이승현·김대근 연구위원이 2017년 펴낸 ‘현행 출국금지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연구자료를 보면, 2016년 출국금지 이의신청 건수는 236건이었는데 이 중 229건이 기각돼, 기각률이 97%에 이르렀다. 특히 피의자들의 이의신청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부분 행정심판·행정소송을 택했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엔 가족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인도적 사유가 아니면 출금이 해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종섭 전 장관은 황급히 출국하느라 제대로 된 의전을 갖추지도 못했다. 해외 파견 대사는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신임장을 주재국 정부에 제출한 이후에 공식 활동을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종섭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장을 받지 못한 채 출국했다. 일단은 사본을 제출한 뒤 할 수 있는 업무부터 하겠다는 입장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신임장 원본은 없어도 되는 것일까? 조선일보는 9일 사설에 이렇게 썼다. “대통령실은 ‘다시 귀국해 신임장을 받으면 된다’고 하지만, 궁색한 얘기다.” 여기에 교체 대상인 대사가 귀국한 이후 인수인계를 받고 신임 대사가 출국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을 봐도 기이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김완중 전 호주 대사는 11일 귀국길에 오른다는 계획이다.

8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유튜브 방송 갈무리
8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유튜브 방송 갈무리

이러니 보수언론도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의 11일 사설 제목은 <이종섭 ‘대사 임명-약식 조사-출금 해제-전격 출국’ 미스터리>다. “호주 대사 임명부터, 약식조사, 출국금지 해제, 전격 출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한 의혹을 오히려 키우고 있다”는 거다. 조선일보는 앞서 9일 사설에서 여성가족부 장관 사표 수리와 후임 임명 거부를 통한 실질적 무력화의 사례까지 들어 윤석열 정권의 이러한 태도가 고질적인 법치 파괴임을 지적했다. “여가부 폐지가 대통령 대선 공약이긴 해도 정부 부처 폐지는 엄연한 입법 사항이다. 그런 입법 절차가 성가시다고 건너뛰는 건 법치가 아니다. 아무리 수사에 문제가 있다 해도 법적으로 출국 금지된 피의자를 대사로 임명해 출국시키려 한 것도 법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치’는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적법절차’의 문제와 연결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 정권의 정권 운영 방식을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 갈래인 것처럼 묘사하면서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어 집권했다. 그런데 집권 이후엔 오히려 보수언론으로부터도 ‘비자유주의적’이란 취지의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윤석열 정권의 민주주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슈퍼-민주주의?

한겨레는 11일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에 본부를 둔 민주주의다양성 연구소가 낸 보고서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지수가 0.60점을 받아 179개 나라 중 47위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이 지수는 0에 가까울수록 독재국가, 1에 가까울수록 민주국가로 볼 수 있는데 “2019년 0.78점(18위), 2020~2021년 0.79점(17위) 2022년 0.73점(28위)에서 점수와 순위 모두 큰 폭으로 떨어졌다”는 거다. 남의 눈이 정확할 때가 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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