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명숙 칼럼] 요즘 유행하는 말 중 하나가 무정부상태다. 오송지하차도 참사, 서현역과 신림동 무차별 분노범죄(이상동기범죄) 등 연일 사건이 발생하는 현실에 대한 자조 섞인 말이다. 재난안전의 의무, 범죄로부터의 생명의 안전 등은 국가의 기본 의무다. 최소한의 역할만 했어도 막았을 것이다. 112 신고가 있었지만 경찰은 지하차도를 통제하지 않았고, 민생치안보다는 시국치안에 경찰력을 대부분 배치하고 있으니 한탄이 절로 나온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니 무정부상태라는 것이다. 최근 호신용 도구를 구매에 열을 올리는 현상 자체가 씁쓸한 일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장갑차를 도심에 배치하거나 경찰 인력을 늘리는 게 아니라 의무경찰제도를 복원하겠다는 식이다. 편의주의적이고 실효성 없는 보여주기식 대책이다. 범죄 예방을 하려면 범죄의 원인을 파악해야 하지만 그러한 노력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경찰의 성별 통계 누락으로 짜인 범죄프레임

흉기 난동과 살인 예고 게시물 등으로 국민 불안감이 커진 7일 오후 서울 강남역 지하쇼핑센터에서 경찰특공대 대원들이 순찰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흉기 난동과 살인 예고 게시물 등으로 국민 불안감이 커진 7일 오후 서울 강남역 지하쇼핑센터에서 경찰특공대 대원들이 순찰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경찰이 서현역 살인사건 이후 온라인에서 번진 살인 예고글을 파악하고 검거에 나섰다. 경찰은 흉악범죄 예고와 관련해 총 354건을 수사했고, 이 중 149명을 붙잡았는데 절반이 10대였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10대와 20대가 많다며 작성자의 연령은 밝히면서도 성별 통계는 내지 않았다. 경찰은 10대들이 장난으로 쓴 것이라 발표했고, 한동훈 법무장관은 장난이라도 처벌받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비슷한 범죄를 벌인 사람들을 성별 연령 등 기초 파악을 하며 분석해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일본에서도 이상동기범죄(묻지마 범죄)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 연령별 통계 등을 냈다. 한국 경찰은 기초 분석인 나이와 성별인데 성별을 누락시켰다. 왜 그런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해 세계일보 기자가 경찰에 묻자 경찰은 “불필요한 논란이 발생할 수 있어 따로 집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경찰이 말한 “불필요한 논란”이란 무엇인가. 살인 예고글을 쓴 사람들 중에 특정 성별이 많다는 뜻일까. 만약 작성자 중 남성이 많고, 내용에 여성에 대한 살인 예고글이 많다면 그것은 범죄의 성격과 밀접하니 대책도 그에 맞춰야 한다. 또한 이상동기범죄는 범죄자들이 사회문화와 제도에 영향을 받는 만큼 이에 대한 공론화와 대책이 필요한 일이다. 경찰이 범죄의 성격을 숨기면 사회나 국가가 대처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므로 이는 심각한 문제다.

나아가 논란이라고 말한 것이 정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까 의식한 것이라면 더 큰 문제다. 정부의 여성혐오 선동이 여성살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지금도 나오고 있다. 현 정부가 여성혐오를 조장시키는 발언을 지속하면서 사람들이 여성을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다면 분명 정부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현재까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혐오’를 부추겼고 혐오를 확산시켜 왔다. 현 정부는 성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여성들의 피해의식으로 치부했다.

이상동기범죄에 혐오범죄도 포함돼

작년부터 정부는 무차별 분노범죄를 ‘묻지마 범죄’라고 부르지 않고 ‘이상동기범죄’로 명명하기로 했다. 묻지마 범죄로 명명하면서 범죄분석과 예방책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동기 범죄(異常動機犯罪)는 뚜렷하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벌이는 폭력적 범죄를 말한다. 대검(찰청)도 “공식적 통계는 없는 상황”이라 통계화가 어렵다며, 질적 사례 분석을 위해 이상범죄의 범행동기를 기존 ‘우발적’ ‘현실 불만’에서 ‘이해당사자 간 대인 갈등’ ‘제3자 대상 분풀이’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감’ ‘사회에 대한 적대감’ 등으로 세분화해 효율적인 수사 착안 사항을 발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상동기범죄에는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한 범죄가 다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지만, 특정 집단을 공격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소수자 혐오범죄가 이상동기범죄에 포함되어 있는 만큼 혐오범죄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에 참가한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2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성폭행 살인 사건 범죄 현장으로 추모 행진을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에 참가한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2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성폭행 살인 사건 범죄 현장으로 추모 행진을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몇몇 보도로 나와 있듯이 살인 예고글에는 성폭력을 하고 여성을 죽이겠다는 내용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한녀들을 죽이겠다'거나 '성폭행을 하고 여성을 죽이겠다'는 식의 살인예고는 혐오범죄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분석하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는 여성, 노인, 장애인 등 소수자 대상의 이상동기범죄, 혐오범죄를 막을 수 없다. 이상동기범죄에서도 특정집단을 혐오가 밑바탕으로 이룬 범죄라면 혐오범죄다. 또한 여성에게는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는 이유로, 또는 가해자가 여성을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 발생한 범죄라면 혐오범죄다.

게다가 신림역 여성 20명 살인 예고 글을 쓴 남성 피의자도 여성혐오성 글을 오랫동안 쓴 사람이다. 무차별 분노범죄의 밑바닥에 여성혐오가 동기로 작동하는 범죄가 포함되었다면 이는 따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

또한 살인 예고글을 10대 청소년들이 많이 쓴 것만 부각시키고 그 이유를 ‘장난으로 했다’는 정도로 접근하는 것도 문제다.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살해하겠다’는 것이 장난일 수 없다. 아니, 그런 장난이 문화로 자리잡았다면 이를 바꿀 대책이 나와야 한다. 여성살해를 장난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문화라면 그 문화를 바꾸어야 하지 않는가. 청소년 문화에 여성혐오가 팽배하다면, 정부는 이를 개선할 방안을 세워야 한다.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엄포가 아니라 성평등 인식을 개선하고 인권의식을 높이기 위한 인권교육과 캠페인이 필요한 것이지, 무장특공대나 장갑차가 필요한 게 아니다.

최근 한 여성이 신림동 동네 산책로에서 살해당한 사건은 여성들을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다. 혐오표현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혐오를 방치하면 그 수위가 올라가 증오범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와 여성살해는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도 혐오정치가 지속되는 현실이 답답하다.

이제라도 경찰은 성별 통계와 여성혐오가 판치는 온라인게시판에서 실제 여성혐오 범죄로 발전한 사례가 있는지까지 분석해야 마땅하다. 경찰이 범죄의 성격과 상황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자들의 노력도 필요하다. 경찰이 보도자료가 누락하고 있는 것, 숨기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적극적인 취재가 필요하다. 경찰의 ‘혐오범죄는 없다’는 가이드라인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에 대해 그랬듯이 경찰이 여성혐오 범죄는 아니라고 미리 선을 긋지 못하도록 해야 사회가 바뀐다. 경찰의 범죄분석에 대한 비판 보도가 필요하다. 나아가 혐오의 정치가 어떻게 소수자 대상 범죄에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 기사도 보고 싶다.

*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1014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미디어스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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