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새해인데 희망보다는 우려를 말하게 된다. 늘 어려웠지만 여느 때보다도 더 어려운 한 해가 될 거라는 전망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성장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걸 감추지도 않는다. 우크라이나 침공 등 대외조건의 부정적 영향을 핑계로 고물가를 일정 부분 용인하고 공공요금 인상을 강행하기 좋은 시절로 보일 정도다. 북한의 군사 위협 수위 역시 한미일 밀착과 우리 정부의 대북 강경 드라이브를 핑계로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다. 각자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수밖에 없다.

어려운 시절에 맞춰 권력의 태도라도 바뀌면 좋겠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나 조선일보 인터뷰 등을 보면 그것은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실 이전의 필요성 중 하나로 들었던 언론과의 일상적인 소통을 사실상 포기한 걸로 보인다. 일방적으로 신년사를 낭독하고 기자회견은 안 하기로 한 게 그 예다. 정권에 가장 우호적인 매체를 통해서만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앞으로도 ‘통제 가능한 조건’에서만 언론 접촉을 하겠다는 신호다. 이것은 적절치 않다. 전 정권 시기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추가 질문을 받지 않는다고 비난했던 국민의힘이 윤석열 대통령을 설득하길 기대해본다. 

1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2023년 신년사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연합뉴스)
1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2023년 신년사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연합뉴스)

대부분의 언론은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가 ‘3대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3대 개혁 중 연금, 교육 개혁에 대한 메시지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노동 개혁’에선 다르다. 윤석열 대통령의 인식에 따르면 직무급제 성과급제 등을 채택하지 않은 기업은 ‘강성귀족노조’와 불의한 타협을 한 집단이다. 불의는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올해는 기업과 손잡고 노동계와의 대치 전선을 보다 넓히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와 연대가 살아 숨쉬는 나라”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임금체계를 선택할 것인지는 원칙적으로 노사자율이다. 정부가 바람직한 ‘모범답안’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수용할 것인지는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가령 직무급제로의 이행은 필요하지만 노조의 우려도 일정부분 해소돼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사안을 ‘모범답안을 선택하지 않으면 혼내주겠다’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자유를 질식시키는 일이다. ‘노사법치주의’를 말할 게 아니라 설득과 타협, 절충과 합의를 모색할 일이다.

가장 위험해보이는 건 윤석열 대통령이 기득권과의 전쟁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기득권 유지와 지대 추구에 매몰된 나라는 미래가 없다”, “기득권의 집착은 집요하고 기득권과의 타협은 쉽고 편한 길이지만 우리는 결코 작은 바다에 만족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 ‘기득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동아일보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도, 거대 야당도 해당될 수 있다”는 대통령실 핵심관계자의 언급을 전하고 있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대통령실, 검찰, 국민의힘은 ‘기득권’에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에 따라 길이 갈리기 때문이다. 서구의 경우 사회적 약자를 ‘기득권’으로 지목하고 이들의 배제를 요구하고 실행하는 것을 ‘개혁’으로 포장하는 정치를 ‘극우포퓰리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정치에서 자본가와 보수정당 등 전통적 기득권은 (이미 얼마를 쌓아놨든간에!) 정당한 몫을 배분받지 못한 피해자로 둔갑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피해를 구제하는 게 원칙이다. 이를 통해 정치는 다소 도착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기득권의 이익에 충실한 길을 걷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길로 가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으로 읽힐 가능성이 충분하다.

물론 이런 비판이 윤석열 정권과 반대편에 있는 기득권을 정당화시키는 걸로 귀결된다면 그건 안 될 말이다. 기득권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가리지 않고 존재하고, 이들을 변화로 이끌려면 어떤 외력이 작용해야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내년 총선을 대비해야 하는 올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언론사들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치개혁의 필요성에는 절대 다수의 국민들도 공감하고 있는 듯 하다.

문제는 이 정치 ’개혁’ 역시 ‘개혁’이라는 수사(rhetoric)만 취한 제자리걸음 혹은 ‘개악’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의 예를 보자. 1980년대 드러난 일본 정치의 부패는 국민적 정치개혁 요구로 이어졌다. 정치권은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등의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이러한 조치는 정치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총재 1인 독주 등의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 이 결과 정치개혁을 요구했던 일본 국민들은 정치적 무관심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런 일본의 사례가 말하는 것은 각 선거제도끼리의 비교우위 따위가 아니다. 개혁에 대한 요구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춘 형태로 수용해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게 하거나 오히려 자신들에 유리한 조건으로 바꿔버리는 기득권 정치의 속성에 주목해야 한다.

2023년의 정치개혁 논의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미궁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좋은 의도로 추진한 선거법 개정이 기득권 정치에 의해 어떻게 제도적으로 무력화될 수 있는지를 이미 2020년에 경험했다.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할 수 있다. 정치개혁 요구 자체가 원칙과 법치, 세상만사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기치로 내건 새로운 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 논의로 수렴돼버릴 수도 있다. 이런 하나마나한 일을 하느라 정치개혁의 동력이 소진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다.

이런 일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정치개혁은 반드시 그 수혜자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국민들에게 ‘새로운 세력’으로 인식될 수 있는 소수 정당이나 기성 정치에 의해 대변되지 않던 특정 계층이 그 대상이다. 과거 우리 정치에서 이 영역은 진보정치의 차지였다. 그러나 몇 차례의 정치적 사건을 거치며 ‘진보’는 ‘낡은 위선’과 동의어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평가는 일부 부당하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것은 결국 진보정치 그 자신의 책임이다. 정치개혁은, 국민들이 정치개혁을 통해 이익을 보는 세력이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절박한 지지를 보낼 때에야 성공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진보정치 스스로가 거듭나야 한다. 지난 정권의 ‘위성정당’ 사태가 가르쳐준 것은 허깨비 같은 제도 개선보다 이게 더 중요한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거다. 정권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도, 올해는 스스로 새로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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