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어른들의 사랑'이라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를까? 이른바 '막장'이란 단어로 축약되는 바람, 불륜, 복수 등등으로 이어지는 '치정' 같은 것들이 아닐까. 그래서 어른들이 주요 시청층인 아침, 주말 드라마에는 이런 요소들이 들어가야 흥행이 이루어진다는 '선입견'이 작용하고,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이 공식에 따라 시청률을 견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 '속물 어른'들에 대한 편견을 축적시키는 데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편견 혹은 선입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4월 24일 종영한 이다. 선정적(?)인 제목과 달리 드라마는 '어른됨'의 '사랑'을 논한다. 그리고 어른이라도, 아니 어른이라서 성숙되고 더 '아름다운' 사
월요일 제자리로 돌아온 은 세월호 4주기를 맞이하여 두 편의 특집을 마련하였다. 그중 하나가 지난 16일 방영한, 끝나지 않은 세월호 학부모들의 이야기 ‘너를 보내고 - 416 합창단의 노래’ 편이었다. 그리고 4월 23일,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현장의 이야기를 또 한 편 다룬다. 바로 그 바다의 목숨을 건 목격자였던 세월호 잠수사들의 이야기, ‘로그북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이다.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 밥을 먹어야 하는 건지 아니 먹어도 되는 건지잠을 자도 되는 건지 모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조건 시신을, 아니 생사를 확인해야 했다. - 잠수사 일기 중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사람들이 건물을 빠져나오기 위해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는
OCN의 장르물 이 자체 최고 시청률로 종영했다(3.926%,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수치상으로만 보면 그간 OCN 장르물 중에서도 그다지 높은 시청률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첫 회 2.54%로 시작했던 데 비하면 호조를 보인 결과물이다. 시청률의 상승세는 물론, 이 시도했던 과학과 무속의 콜라보는 이 한 시리즈로 끝내기엔 아쉽단 생각이 든다. 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 중심에 '신',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놓여 있다. 20년 전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한 종말론자들의 집단 자살극, 그 '원죄'의 현장으로부터 실타래를 풀어간 드라마는 그 집단 자살극을 유도한, 아니 정확하게는 '집단 자살'이라는 미명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익숙한 화법과 전혀 다른 '이방의 언어'는 매혹적이지만, 그래서 종종 '난독'을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론 모호하고 때론 기괴한 언어들이 도달하는 곳이 결국은 인류 보편의 감성과 주제의식이라는 걸 영화 는 일깨워준다. 영화 는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던 추리 소설가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영광의 콩쿠르 상을 안긴 를 원작으로 한다. 오르부아르(au revoir)는 영어의 good bye와 같은 프랑스의 또 보자는 뜻의 인사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제목 '오르부아'에는 보다 처절한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서 '오르부
어쩌면 오늘 당신은 가게에서 따로 돈을 받지 않고 물건을 비닐봉투에 넣어주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을지도 모른다. 공짜로 챙긴 비닐봉투라고. 지난 2013년에 편의점에서 비닐봉투를 놓고 실랑이하다 아르바이트생을 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선 비닐 인심이 후하다. 마트에서 비닐봉투를 사용하지 않고 비닐 포장 유료가 시행됐지만, 그게 얼마나 눈 가리고 아웅인지는 아일랜드의 20배, 핀란드의 100배에 달하는, 1년에 211억장의 비닐봉투를 쓰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2015년 기준 연간 일인당 420개의 비닐을 사용하는 나라, 하지만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비닐의 여정에 대해 우리는 무지했다. 지난해 7월 중국이 갑작스레 폐비닐과 종이 쓰레기 수입 중단을 발표하고, 그
군부독재 시절, 하루아침에 금쪽같은 아이들을 차디찬 감옥으로 빼앗긴 부모들은 아이들을 대신하여 거리에 섰었다. 1974년 민청학년 사건을 계기로 모인 부모들은 1986년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계기로 '민가협'을 결성하고 우리 사회 양심수 문제에 앞장서 왔다. 그렇게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민주화에 앞장선 자식들을 둔 부모들을 아이들과 함께 그 대열에 서게 만든 역사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는데, 이제 또 부모들은 거리로 나선다. 심지어 차가운 거리에서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는 이 부모들의 아이들은 돌아올 수 없다. 은 혹독하게 추웠던 지난겨울, 안산에서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을 방문하여 응원의 노래를 부르는 416 합창단으로부터 시작된다. 2014년 4월
4월 15일 은 '먹튀 논란'에 시달리는 우주인 이소연에 대한 다큐를 방영했다. 2008년 이래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과 관련된 논란을 비로소 다룬 것이다. 하지만 다큐를 보면 안다. '비로소'가 아니라, '이제야'라는 것을. 이소연이란 개인이 최초의 우주인이 되고, 결국 한국 사회에서 '먹튀'로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우리 사회, 아니 지난 정권들이 해왔던 전시 행정의 또 하나의 실패 사례이자, 그 오욕을 고스란히 한 개인에게 전가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 복기를 논란의 당사자 이소연으로부터 시작한다. 먹튀가 된 우주인 논란이 시작된 건 2014년부터였다. 이소연이 그녀를 우주로 보낸 주무부처였던 한국항공우주 연구원(항우연)을
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획기적이었다. 음식이 질펀하게 한 상 차려지지 않은 '먹방'이라니. 먹방, 인터넷 BJ들이 시청자들을 상대로 음식 먹는 걸 보여주며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이 이토록 무궁무진하게 발전해나갈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BJ들의 먹방은 곧 케이블을 비롯한 TV 먹방 프로그램의 홍수로 이어졌다. 오로지 '먹는 것'에 집중했던 먹방 프로그램의 홍수 가운데 의 등장은 신선했다. 물론 에도 먹방은 등장한다. 출연자들은 프로그램의 대상이 된 음식점에서 그날 주제의 요리를 먹고, 그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의 본질은 시각적 자극이 배제되거나, 극도로 제한된 먹망의 승화에 있다. 출연진 홍신애의, 기꺼이 자신의 몸을
어쩌면 그들도 한때는 자전거 타고 출퇴근을 하고, 여유롭게 직장 생활을 하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앞에서 방긋 속없이 웃음을 띠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저 그 존재만으로 누나와 누나가 아닌 여성들에게 '기쁨'이 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월은 흘러 그들의 몸에 흐르는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은 존재를 '오욕'으로 물들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때는 '산업역군'으로 대접받고 '아버지'라 인정받던 시대는 흘러, 이제 숨만 쉬어도 위협적인 존재로 '치부'되는 시대에 머물게 되었다. 주역이 '민폐'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주역인지도 민폐인지도 모르고, 세상의 무기 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부담스러운 그 이름, 아저씨
매주 월요일 밤 11시면 입맛이 씁쓸했다. 왜 우리는 월요일 밤부터 예능을 보아야 할까?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도 온통 예능뿐이다. ‘도대체 왜 월요일부터?’라는 힐난에 ‘월요병’엔 예능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할 말이 없지만, 드라마와 예능의 범람에 한숨이 쉬어질 뿐이다. 그런데 그런 월요일의 가벼움을 타개해 줄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그렇다. 이게 원래 의 자리였다. 한 주의 시작, 세상사 좀 진지하게 바라보며 한 주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진심어린 시선들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 4월 9일 방영분에는 다수의 '이재용'들이 등장했다. 대한민국 VIP 이재용 우리가 아는 이재용은 ‘그 사람’이다. 삼성전자 부회장, 얼마 전
프랑스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것일까? 2015년에 개봉한 이란 영화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한 관객들 중 여러 명이 결국엔 다음과 같은 자충수에 도달하고 만다. 그래서 도대체 '프랑스 영화'란 것이 무엇이냐고. 미적인 화면, 모호한 줄거리, 거기서 난해한 수학 공식보다 더 어렵게 찾아야 하는 철학적 명제? 아마, 일찍이 뤼미에르 형제 이래 영화라는 문화적 장르를 구축한 프랑스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듯싶다. 하지만 적어도 2018년에 '프랑스'의 영화를 본다는 건, 지금 우리가 여기서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만난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 확실한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 작품이 지난 4월 5일 개봉했다. 바로 브루노 뒤몽 감
대낮에 잘 차려입고 손 꼭 잡고 등산하는 중년의 남녀가 있다면 십중팔구 '바람'이라는 속설이 있다. 이런 어불성설이 난무하는 만큼, 이미 우리 사회에서 바람 혹은 불륜은 사실 보편적이다. 멀리 갈 거 뭐 있겠는가? 바람과 불륜이 없다면 대부분의 아침 드라마가 소재 고갈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보편적'인 현상은 말 그대로 윤리를 벗어난 문제이기에 언제나 '도덕적 논란'의 기준이 되곤 한다. 이런 현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이 소재를 이야기한다는 건 그래서 언제나 조심스러운 줄타기와도 같다. 바로 그런 줄타기를 절묘하게 하려 애쓴 작품이 개봉했다, 바로 을 통해 이십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루었다 평가받았던 이병헌 감독의 신작 이다. '동(動)'하였느냐?
몇 년 전 어린이 위인전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공교롭게도 내가 맡아서 하던 인물이 이번에 으로 돌아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다. 당시 어린이 위인전으로는 획기적인 시리즈로 기획된 그 작업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나폴레옹, 이이 등 고전적 위인을 대체할 새 시대의 위인이었다.당시 위인전 작업은 그의 영문판 평전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졌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까지, 그중에서도 그를 세상에 알리게 된 를 만든 과정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납량특집용 상어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있었다.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뻔한 피칠갑의 섬머 스릴러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며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군주의 시대 군주에 대한 거짓말은 '역모'로 취급되어 대역죄로 다스려졌다고 역사학자 전우용은 증언한다. 그렇다면 나라의 주인이 군주에서 국민으로 바뀐 민주주의 사회, 국민에 대한 거짓말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기군망상죄', 즉 대역죄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 70년은 안타깝게도 권력이 국민들을 기만한 역사였다. 우리의 권력자들은 끊임없이 '거짓'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해왔다.그런데 왜 지금 '거짓'에 주목해야 하는 걸까? 4월 1일 은 새로운 권력의 시대, 그럼에도 여전히 쉬이 처단되기 힘든 권력의 거짓말을 짚고 넘어감으로써 현재 진행 중인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세월호의 진실, 그 빙
3월 29일 개봉한 재패니메이션 는 2017년 우리가 조우할 수 있는 일본 문화의 결정체, 혹은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이 희한한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일본 문단의 기대주라 칭해지는 모리미 토미히코라는 작가의 동명 소설이 전제된다. 2003년 으로 15회 일본 판타지 노벨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모리미 토미히코는, 2006년 영화와 동명의 소설인 로 20회 야마고토슈고로 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나오키 상 후보에 오르는 등, 그해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일본 문단의 기대주로 각광받고 있다. 모리미 토미히코의 매직 리얼리즘 는 청춘 판타지물이다. 짝사랑하는 후배 여학생
올해로 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이 되었다. 다행히 새 정부 들어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조명이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건 물론, 그 어느 때보다도 전 국민적 관심을 받는 희생자 추념식이 될 예정이어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에 부끄럽지 않은 70주년이 될 듯하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이 비극의 역사는 오래도록 우리의 역사 속 행간에 드러나지지 못한 채 숨죽여 왔었다. 그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상흔도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한 희생자와 그 가족들, 그들의 아픔에 대해 우리의 역사는 외면해 왔었다. 방송이라고 다를까. 을 통한 유시민 작가의 회고, 70주년 기념식 사회를 맡은 이효리가 최근 자신의 예능 에서 언급을 통해 새삼스레 조명 받고 있지만, 예능은 물론
'즐거운 나의 집'이 행복한 가정의 로망이던 시절,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이른바 세계 명작 50권 한 질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세계의 명작에서 추려낸, 겨우 50권의 작품 중에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작품이 무려 두세 권 들어 있기가 십상이었다. 바로 , , 등이다. 이제는 중년 혹은 노년에 들어서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제목의 작품이다.작품의 배경과 서사는 달라도 주제는 일관된 편이다. 어려움에 빠진 소년, 혹은 소녀가 주변의 학대에도 자신의 심성과 의지를 굽히지 않고 지내다 결국은 '해피엔딩'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소년 세드릭이 완고한 영국 귀족 할아버지와 홀로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소녀
의 김원석 감독과 의 박해영 작가의 만남으로 화제가 되었던 . 하지만 캐스팅이 발표되자 남자 주인공이 아저씨인 이선균과, 여자 주인공이 젊은 세대 아이유라는 점에서 에 이어 또 한번 아저씨-젊은 여자 커플의 등장이 아니나며 논란이 되었다. 설상가상 첫 회 여주인공 이지안(아이유 분)에게 사채를 받으러 온 이광일(장기용 분)의 무차별 폭행에 이어, 그런 이광일의 폭행에 이지안의 '너 나 좋아하지?'란 대응이 '왜곡된 성의식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논란을 불 지피며 일부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까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2회를 마친 는 아저씨와 젊은 여성의 관계에 대한 이런 세간의 의식에 오히려 반문을 하는 듯하다. 극중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 미스 마플, 그리고 코난, 김전일, 몽크까지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살인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살인을 몰고 다니는'이라는 수식어가 이들 앞에 붙기도 할까. 이제 거기에 한 사람을 더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의 유설옥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가 배방동에 살 땐 배방동에서 자꾸만 사건이 터지더니, 이제 경찰고시 준비를 위해 노량진으로 근거지를 옮긴 그곳에서 '살인 사건'이 터져 공부를 해야 하는 그녀의 발길을 잡는다. 심지어 한 술 더 떠서 이번에는 기필코 붙으리라, 단호한 결심을 하고 떠난 기숙학원에서까지 사람이 죽어 나가니, 살인을 부르는 내공에 있어서는 저 앞서의 탐정들에 밀리지 않는다. 조금
결혼을 하면 사랑하는 이와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사는 기쁨도 잠시, 피 말리는 전쟁이 시작되기 십상이다. 보통 그걸 '신혼 초의 주도권 싸움'이라고 속되게 칭하기도 한다. ‘사랑해서 함께 사는데, 웬 주도권?’이라지만, 벌써 두 사람이 모인 이 단체는 사회적 단위가 되어 내부의 '권력'이 형성되고, 당연하게도 서열의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평등하다는 오늘날의 부부 관계는 더더욱 그 '서열'의 문제에 있어 정해진 위계가 없기에 혈투가 불가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남존여비'라 알고 있는 조선시대에는 사회적으로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분야와 책임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어, 외려 오늘날 '평등 사회'에서 불 지펴지는 혈투의 가능성이 사전에 '조정'되어 있다고 한다. 여성이 ‘안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