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밤 11시면 입맛이 씁쓸했다. 왜 우리는 월요일 밤부터 예능을 보아야 할까?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도 온통 예능뿐이다. ‘도대체 왜 월요일부터?’라는 힐난에 ‘월요병’엔 예능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할 말이 없지만, 드라마와 예능의 범람에 한숨이 쉬어질 뿐이다. 그런데 그런 월요일의 가벼움을 타개해 줄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그렇다. 이게 원래 <MBC 스페셜>의 자리였다. 한 주의 시작, 세상사 좀 진지하게 바라보며 한 주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진심어린 시선들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MBC 스페셜>, 4월 9일 방영분에는 다수의 '이재용'들이 등장했다.

대한민국 VIP 이재용

‘대한민국 이재용’ 편

우리가 아는 이재용은 ‘그 사람’이다. 삼성전자 부회장, 얼마 전 1년 만에 은근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교도소 문을 나서던 그 사람이다. 그가 감옥에서 즐겨 보았다던 드라마 속 재벌가의 자제는 결국 자기 삶의 모토였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 족벌경영 체제를 일소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재벌가를 나왔다. 하지만 '재산이나 지분, 자리 욕심이 없다'던, ‘받은 혜택을 사회와 나눌 수 있는 참된 기업인이 되겠다'던 부회장님은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스물일곱 삼성전자 평사원으로 출발한 그. 그는 아버지로부터 단돈 60억(?)억을 증여받았다. 물론 이 돈에 대해서는 16억 원의 증여세를 당당하게 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워렌 버핏도 울고 갈 이재용의 귀신같은 투자 전략은 단 2년 만에 에스원과 삼성 엔지니어링 주식을 사고팔아 수익률 1300% 563억 원을 남겼다. 심지어 그의 투자 전략을 따르지 못한 세법까지 개정시키며 투자에 투자를 거듭하여 증식된 그의 자산은 2018년 기준 9조원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 사람'이 아닌 ‘이재용’들도 있다. 학창시절 벌을 받기 위해 복도에 서있으면 선생님들이 지나가며 '아니 왜 회장님이 여기 서 계세요?'라 놀렸던 이름. 보험관리사로 명함에 이재용을 새겨 넣으면 한번이라도 더 봐주던 이름. 그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이재용들이 있다. <MBC 스페셜>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재용을 통해 무사히 감옥 밖으로 탈출에 성공한 이재용을 논박한다.

그들에게 아버지가 거저 준 60억은 없었다. 대신 16살부터 식당 알바를 시작해 안 해본 일이 없이 도달한 이십대 중반의 청춘이 있었다. 음악적 재능은 있었지만 음악적 재능을 버텨줄 집안이 없어서,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꿈이 있었다.

이재용들로 이재용을 논박하다

‘대한민국 이재용’ 편

다큐는 우리가 '이혁'으로 알고 있는 전 노라조의 멤버였던 이재용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이재용이었기에, 지난 촛불광장을 뜨겁게 만들었던 데 기꺼이 일조한 이재용에 유독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던 그는, 자신이 지켜본 이재용 재판 과정을 노래로 만들었다.

'시발남아'(時發男娥)'

다 까고 말해 넌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처음과는 다른 말로
또 소설을 쳐 써대지
주어진 시간 정확한
사실만을 모두 얘기해
소설은 그만 쳐 쓰고
뉴스를 얘기해 우리가 원하는
너 제일 잘 알잖아 뭘 잘못한 건지

그 자신도 돈을 벌기 위해 활동했던 노라조에서 나와, 조금은 배고플지라도 하고자 했던 음악의 길에 섰다.

자신의 길에 선 또 다른 이재용도 있다. 서른 중반, 포크레인 시험장에 선 그는 아직 이 기계가 서툴다. 이번까지 하면 열 번째 직업. 이재용이란 이름을 새겨 넣은 보험 외판원부터 자동차 영업 등등 아이 둘의 아버지가 되어서도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한 채 여전히 또 새로운 길에 선 그는 이 일이 마지막 선택이기를 바란다.

스물다섯이라고 다를까. 16살부터 온갖 안 해본 일이 없이 돈을 모으던 이재용은 스물 중반 돈이 아닌 자신이 하고픈 걸 하기 위해 공연 예술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현실은 유치원 아이들을 상대로 한 계약직. 꿈은 그의 통장을, 그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 결국 한 달 뒤 그와 그의 동료는 대구의 근거지를 떠난 안성에서 일당이 아까워 고향 가는 돈도 아끼며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이재용’ 편

이 땅을 살아가는 그 '이재용'이 아닌 이재용들에겐 삶의 고비고비마다 '돈'이 발목을 잡는다. 역사학도가 되고 싶지만 가족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다. 좋아하는 연극을 하며 살고 싶지만, 현실은 하루 종일 음식점 주방과 홀을 왔다갔다 하는 알바에, 밤 공연이 끝난 뒤 홀로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건축설계사 시험 준비다. 음악적 재능이 있던 이재용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음대에 갔지만, 학과 친구들이 음악적 재능을 펼칠 준비를 하는 동안 일찌감치 선생님의 길을 걸었다.

이재용 부회장이 길지 않은 생애동안 재산 축적으로 전력질주하며 전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것과 달리, 음악 선생님 이재용은 인기쟁이다. 그가 만든 합창반에는 특권이 없다. 심지어 노래 실력보다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다. 파트도 자기선택이다. 그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음대에 진학했듯이, 선생님이 된 이재용은 그 시절 선생님처럼 가정형편 때문에 꿈을 접으려는 아이들의 꿈 도우미를 자청한다.

다큐는 이재용 부회장과 평범한 이재용의 삶을 교차시킨다. 이재용 부회장이 60억을 받아 대번에 재계 순위에 오르는 동안, 평범한 이재용들은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없는 형편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저 교차하여 보여줬을 뿐인데, 다시금 이재용 부회장이 우리 사회에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똑같은 이름의 대한민국 국민인데, 누군가는 금수저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짓고도 감옥 밖으로 유유자적하게 나오는 이 대한민국에선 같은 이름이라 해서 같은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한민국 이재용’ 편

그 이재용이 삼성이라는 왕국에서 자신의 부를 축적해가는 동안 이제 60이 된, 한때 삼성중공업의 노동자였던 이재용은 여전히 직장으로 돌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삼성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제 이재용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무노조 정책을 이어오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말하는, '그가 받은 혜택을 사회와 나누겠단' 그 말에 노조의 자리는 없다.

노조만이 아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으로 뇌종양을 앓아 시력, 언어능력, 운동 능력을 잃은 채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시위에 참가하는 전직 노동자도 있다. 삼성이니까 당연히 산재를 인정해 줄 거라는 희망은 무참히 짓밟혔다. 동료들은 세상을 떠났다. 재판을 이어가는 한혜경 씨에게 삼성은 10억을 주며 회유했다. 그러나 한혜경 씨는 말한다. 차마 죽어간 사람들이 떠올라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강남역 8번 출구 앞 초라한 비닐 천막, 그곳엔 한혜경 씨처럼 삼성에서 직업병을 얻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제 그들이 거리로 나선 지 900일이 됐다.

평범한 이재용들과 삼성의 왕좌를 차지한 이재용, 이들의 대비를 통해 다큐는 묻는다. 여전히 유전무죄의 대한민국, 과연 이재용은 죄가 없는 것이냐고. 그리고 그가 전 정권과 그 배후, 심지어 그 딸을 위해 퍼부은 돈들과, 산재조차 인정되지 않은 재판 때문에 거리로 나선 노동자들을 교차시키며 이재용과 삼성의 길을 묻는다. 물론 이재용에 초점을 맞춘 다큐에서 삼성이라는 조직의 구조에 대한 조명은 아쉽다. 하지만, 이재용으로 상징되는 삼성과 평범한 사람들의 대비는 그 어느 때보다 극명했다. 그렇게 비로소 <MBC 스페셜>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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