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관리자다. 원청이 ‘센터장’에게 영업건수를 할당하면 팀원에게 나눠주고, 정 안 되면 ‘자뻑’(자기 돈으로 상품 가입)을 시키는 팀장이다. “밤 9시에 팀원이 전화를 걸어 ‘팀장님, 저 사무실로 들어가도 돼요?’ 하고 물어보면 본의 아니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자기 일(하루 20~30건 설치·AS)을 하고, 영업까지 한다. 퇴근이 늦어지면 누군가 단톡방(단체채팅방)에 ‘오늘은 제가 자뻑할게요’라고 올린다. 이렇게 되면 퇴근한다. 케이블기사는 하루하루 이렇게 산다.”

티브로드의 케이블방송을 설치, AS, 철거하는 이영진씨는 서울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팀장이었다. 이씨는 “개 같이 일해” 팀장을 달았고, 그의 팀은 영업이든 설치든 뭐든 원청 티브로드와 하도급업체를 만족시켰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티브로드 하도급업체들을 돌며 ‘자뻑 영업’을 했다. 한 손에 노동조합 가입서를 들고 “센터별로 한 사람씩이라도 가입시키자”는 마음으로 전국을 돌았다. 지금 그는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비정규직티브로드지부 수석부지부장이다.

▲ ‘민주노총 서울본부 더불어사는 희망연대노동조합 케이블방송비정규직 티브로드지부’ 이영진 수석부지부장

이씨와 팀원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두 달 넘게 노숙 중이다. 티브로드의 간접고용노동자 수백 명은 지금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앞 거리에 있다. 올해 하도급업체들은 노사교섭에서 지난해보다 낮은 안을 제시했고, 이중 전주센터는 아예 폐업됐다. 지난 6월 합법파업 일주일 만에 업체들은 직장을 폐쇄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7월1일 노숙을 시작했다. 하도급업체 문제는 원청이 좌지우지하지만 티브로드는 ‘불개입’ 원칙이다. 장기간 농성에 조합원들의 투쟁조끼는 해지고 있다.

노숙 64일차인 1일 만난 이영진 부지부장은 “조합원들은 이제 ‘여기서 무너지면 예전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티브로드 기사들은 지난해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까지 할당된 영업건수를 물어오지 못하면 퇴근을 못하고 반성문을 썼다. 토요일도 밤 8~9시가 넘어 퇴근하기 일쑤였다. 이영진 부지부장은 “지금이라도 센터로 돌아가도 받아주겠지만 300여 명이 대출받고 노가다를 뛰며 이곳에 있는 이유는 예전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밑바닥 니빠(니퍼)부터 시작해서 정말 열심히 해서 팀장이 됐다. 따지고 보면 탄압하는 주체였다.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팀원들에게 자뻑을 시켰다. 사람이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더라. 하루는 팀원이 이렇게 얘기하더라. ‘팀원들도 팀장님도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짜장면 배달하는 게 낫겠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니빠 줘서 가르친 애들부터 나까지 모두 죽겠더라. 나쁜 짓인 걸 알면서 시키고 관리하는 스트레스를 못 참겠더라. 정말 바꾸고 싶었다.”

▲ 티브로드 간접고용노동자들의 노숙농성이 2일로 65일째다.

이영진 부지부장은 “티브로드가 큐릭스를 인수할 때 나는 다시 정규직이 되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며 “티브로드는 오히려 현장을 더 쥐어짰다”고 말했다. 그는 “조합원들은 우리가 직접 바꾼 티브로드를 평생직장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끝까지 싸우겠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노동조합은 39일 동안 싸웠고, 결국 원청은 하도급업체 노사교섭 자리에 ‘배석’했다. 그리고 국회 등이 참여한 ‘사회적 합의’로 만들었다. 고용승계도 약속받고 적정노동도 합의했다.

합의는 뒤집어졌다. 전주센터는 폐업됐고, 조합원들은 해고됐다. 노동조합은 파업을 시작했지만 원청은 하도급업체에 파업비용을 부담시켰다. 협력사협의회는 파업 일주일도 안 돼 공격적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사실상 원청이 유도한 셈이다. 주무부처와 행정부의 압박에도 티브로드는 ‘하도급업체 노사교섭 결과를 본 뒤 지원할 것이 있다면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티브로드의 전략은 간접고용 노동조합을 막기 위한 재계의 공동대응’이라고 말하고 있다.

파업 장기화로 조합원들의 생계는 어려워지고 있다. 사장이 1~2년마다 바뀌는 간접고용비정규직인 탓에 신용대출은 꿈도 못 꾼다. 이영진 부지부장은 “이번에 투쟁을 하면서 전임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은행에 서류를 넣어봤지만 결국 안 됐다”며 “희망채권이 잘 팔리지 않아서 다들 멘탈붕괴에 빠졌는데 조합원들이 투쟁기금을 가져왔다. 월급 150만 원 받는 조합원은 만기가 내년인 적금을 깼고, 한 조합원은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지도부에 ‘몰래’ 건넸다”고 전했다.

▲ 씨앤앰과 티브로드 간접고용노동자들은 빨간 바탕에 흰색으로 글자가 적힌 몸자보를 입는다. 노숙농성이 길어지면서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진 몸자보가 늘고 있다. (사진=미디어스)

사실 티브로드를 떠나면 된다. 방송·통신업계는 아직 이직이 쉽다. 그런데 두 달 넘게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영진 부지부장은 “우리는 기술이 있어서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때려치우면 된다. IPTV든 어디든 만 원이라도 더 주는 업체로 옮기면 된다”면서 “그런데 우리가 왜 적금 깨고 주택담보대출 받고 주말에 막노동을 하면서까지 버티는지 아나. 왜 끝까지 가자고 하는 줄 아나. 우리는 다시 개처럼 살 수 없고, 우리가 무너지면 노동판이 무너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난해 만들어진 신생노조이지만 무시무시한 원청 자본을 상대로 이겨봤다. 지난해 우리가 이겼기 때문에 삼성전자서비스 LG유플러스 SK브로드밴드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싸울 수 있었다. 그 동안 케이블·통신 부분에서 노동조합은 꿈도 못 꿨다. 우리가 노동의 판을 바꿨다. 국회에서 들리는 이야기로는 재계에서 티브로드를 압박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너희가 노조에 져서 판이 바뀌고 있다, 이번에는 절대 나서지 마라’고. 이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이영진 부지부장은 “우리를 ‘독종’으로 만든 것은 티브로드”라며 “여기서 일하다 다른 데로 가기도 하지만 다른 데서 여기로 넘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을 만큼 티브로드는 악질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다”고 전했다. 티브로드 간접고용노동자들은 이제 주6일 하루 12시간 노동, 아슬아슬한 작업환경, 업체가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고용불안, 자뻑을 이제 더는 견디지 못한다. 이영진 부지부장은 조합원들에게 “끝까지 가자”고 말했다.

▲ 지난달 28일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앞 농성장에서 열린 문화제에 참석한 티브로드 간접고용노동자가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사진=미디어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