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영포티’는 신조어라기보다 일상어가 됐다. 이 단어는 뉴스 창에서 꾸준히 떠돈다.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생각되는 유저나 노숙해 보이는 커뮤니티 성향을 “영포티 아무개 유저” 혹은 “영포티 아무개 사이트”라고 부르곤 한다. 이때의 영포티는 “자기가 젊다고 착각하는 아저씨”라는 뜻의 빈정거림이겠다. 40대 미만 젊은 세대와 40대 이상 늙은 세대가 동거하고 있거나 후자가 주류가 된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의 세대 갈등이 엿보이는 현상이다.

내가 이 단어를 처음 본 건 201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영포티를 다룬 한 기사에 의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걸 소비할 줄 알고, 과감하게 꿈에 도전할 줄 아느냐 여부”가 영포티의 조건이라고 쓰여있다(한국사회 변화의 열쇠 ‘영포티(Young Forty)’, 한국일보). 원래의 영포티는 ‘새로운 40대’의 소비 성향에 초점을 맞춘 신조어였다. 그때 40대였던 70년대생 중 이제는 50대가 된 이들도 있으니, 영포티와 함께 ‘영 피프티’라는 단어도 등장해서 쓰이고 있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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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생들이 과거의 40대들과 구분되는 세대 집단인 건 사실이다. 그들은 사회의 새로운 메인스트림이 된 삶의 양식을 일상화한 첫 세대다. 90년대는 국내 차원에서는 민주화 항쟁이 종결되고, 국제적으로는 공산국가 블록이 붕괴하며 ‘이념의 종언’이 언도된 시대다. 핵가족화와 해외 문화 개방, 대중문화 자율화, 컴퓨터 기기 보급 등이 저들이 성장한 나날의 배경화면이다. 소비 성향과 개인주의, 상업문화 친화력, 퍼스널 컴퓨터와 인터넷에 기반을 두어 스마트 매체를 아우르는 미디어 리터러시의 맹아가 그렇게 퍼졌다.

현재의 40대는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에서 5060보다 2030과 가깝고, 전체 세대의 성향을 반으로 가르는 절취선이다. 90년대에는 이런 사회문화의 단절적 변화가 '신세대'란 이름으로 인격화됐었다. '영포티'는 오래된 이름 '신세대', '엑스세대'의 귀환이다. 다만 70년대생들에게 이제 와서 '젊음'의 수식어가 헌사된 데는 그 이상의 내막이 있다.

‘젊은 40대’라는 형용모순의 타이틀은 인구 변화와 재편 때문에 제작된 것이다. 지난 일이십 년 간 문자 그대로의 젊은 세대 10·20대 인구는 급감했다. 전체 세대 중 가장 인구가 많은 집단이 50대고, 그다음이 40대다. 60살, 70살까지 살던 팔구십 년대와 달리, 기대 수명이 83세까지 늘어나면서 40대가 연령적 중위집단으로 변한 것도 사실이다. 90년대, 혹은 00년대까지 소비 시장의 주역이었던 2030의 자리를 4050으로 대치하는 데 따른 사회적 이름이 기획되고 선사된 것이다. 젊다는 것은 아직도 미래가 멀다는 뜻이다. 흘러간 과거를 슬퍼하거나 닥쳐올 늙음을 근심하기보다 현재를 즐겨도 좋다는 거다. 70년대생들은 최신 라이프스타일에 적응할 수 있는 특질을 지녔다. 이들에게 소비 주체로서의 자존감을 불어넣으며 시장의 주인공으로 호명하는 흐름이 바로 '영포티'다.

이 흐름은 꽤 오래전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2010년대 초반 신드롬을 일으킨 90년대 복고는 ‘영포티’들이 청춘을 보낸 시절을 미디어에 현현시키는 기획이었다. 그 후 보급된 유행어 '아재'는 일견 젊은이들이 보는 중장년 남성의 모습을 풍자하며 세대 차이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실은 중년 남성들에게 젊은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구실로 인터셉트당했다. 구닥다리라고 구박당하는 ‘친근한’ 이미지 말이다. 급기야 저 말이 ‘아재 파탈’로 진화하며 본색을 드러낸 판이다. '영포티'는 '아재'를 엘레강스하게 조탁한 버전이며, 저출산-고령화와 함께 진행된 70년대생 '회춘' 프로젝트의 슬로건이다. 여기엔 그만큼의 이데올로기와 폐단이 있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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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티’란 호명에서 40대 여성들은 소외돼 있다. 가령 사십 대 초반 남성을 뜻하는 '사초남'이란 단어가 등장했던 것은 ‘영포티’의 주인공이 직장 중간 관리자급으로, 경제력을 보유한 40대 남성임을 암시한다. 대중문화에서도 그렇다. 언젠가부터 멜로드라마에서는 연상연하 커플이 이전보다 빈번해졌고 나이 격차도 커졌는데, 나이 든 남성과 어린 여성이 '마음'을 나누는 <나의 아저씨> 같은 연애담이 히트했었다. 이런 연상연하 로맨스는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하지 못하는 중장년 남성들이 자신의 남근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상패로 젊은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영포티’의 ‘젊음’이란 접두사를 남성들이 구가하는 것에는 전통적 젠더 권력은 물론, 여성들이 30대를 거치며 경력 단절을 겪고 ‘경제력=구매력’이 약해진다는 배경이 있다. 여성들은 40대에 이르러 자식들의 입시 교육에 투입되고, 자신이 성적 매력을 상실했다고 규정당한다. 아내와 엄마라는 정체성에 포획당하면서 스스로를 위한 독립적 활동을 하기 힘들고 사회적 주체로 인정받기도 힘들다. ‘아재 파탈’이 ‘영포티’로 진화하는 동안, 이 사회는 중장년 여성들에게 '맘충'이란 이름을 선물했을 따름이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비혼주의 성향은 결혼과 출산, 육아에 따른 사회적 객체화에 예속되기를 거부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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