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1990년대부터 2000년 초반까지 종말론에 관한 예언과 소문이 난무했다. ‘종말이 도래했으니 회개하라’ ‘1999년 12월 31일이 바로 종말의 날이다. 준비하라’라는 말이 세상을 잡고 흔들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바탕으로 세상의 종말을 외치는 사람이 나타났다.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은 종말을 외치는 사람을 따르며 세상을 술렁였다.

그땐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종말론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결합해 사회 전반에 암세포처럼 퍼졌다. 일을 그만두고 재산을 정리해 종교 집단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기도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두 사람만 모여도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1999년 12월 31일이 가까워질수록 세상 사람들은 종말의 징후를 찾는 데 몰입하고 열광했다. 시험을 망친 수험생은 그냥 확 망해버려라, 라고 말했고 어느 종교 집단에서는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며 신도들을 다그쳤다. 세계는 우리나라를 주목했다. 신의 심판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날 것인지 관심을 두고 뉴스 보도를 했다.

드디어 1999년 12월 31일이 되었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빗나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이 망하는 날도 없었고, 휴거도 일어나지 않았다. 2000년 밀레니엄 베이비는 어김없이 태어났으며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시작됐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인데 사람들은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잔뜩 기대했던 이벤트가 꽝이 되었을 때의 기분. 1900년도 아닌 2000년씩이나 되었는데, 2000년은 1999년과 완전히 달라야 하는데, 1999년 12월 31일의 아침과 2000년의 아침이 같았다. 다시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물이 밀려온다②] 바다가 삼킨 마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2022.11.09. MBC 뉴스데스크 보도화면 갈무리)
[물이 밀려온다②] 바다가 삼킨 마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2022.11.09. MBC 뉴스데스크 보도화면 갈무리)

우리는 여전히 살아서 2024년을 바라보고 있다. 2024년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지만 종말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슈이다. 종말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핫한 이슈이지만 신의 뜻에 따라 종말을 맞을 것이라던 1999년과는 다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신에 의한 종말보다 ‘인간’에 의한 종말을 더 믿게 되었다. 바다와 접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도시가 바닷물에 잠기는 현상은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며 종말의 절차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부산도 불과 몇십 년 후엔 바닷물에 잠길 것이라는 과학적 예언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이 SF라고 믿었던 바로 그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A는 공기정화 시스템이 자동으로 작동하는 방에서 눈을 뜬다. 애완용 로봇 강아지가 재롱떠는 것을 보며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길에 매일 가는 카페에서 로봇이 내려주는 커피를 사고, 고속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출장을 간다. 아침 회의는 열차 안에서 화상으로 이루어지고, 자동제어 시스템으로 완벽하게 제어가 가능한 고층 건물을 시찰한다. 점심은 로봇이 주방장으로 있는 음식점에서 된장찌개를 주문해 먹고, 서울행 고속열차를 탄다. 뒤에 앉은 남자가 기침을 하자 A는 정화필터가 달린 마스크를 쓴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고, 폐에 치명적이라는 뉴스 보도를 들은 뒤라 신경이 쓰인다.

전화벨이 울린다. 아버지의 전화이다. 인공 장기로 삶을 연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수술은 수술 로봇이 진행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A는 통화를 마친 뒤 태블릿으로 뉴스를 확인한다. 인도네시아의 바다 근처 도시엔 이미 바닷물이 들어와 집이 바닷물에 잠긴 채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비는 오지 않고 물은 부족해 당장 마실 물이 없는 사람들은 지하수를 뽑아 쓰고, 여기에 기업이 뛰어들어 대량 생수 사업을 시작하고, 땅은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 물로 채워지지 않아 꺼지고 주저앉기 시작한다. A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난을 빠르게 훑는다. 재난이 종말의 징후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다. A가 세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사이에 열차에 서울에 도착한다. 탑승한 지 3시간도 되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이미지 출처=Pixabay.com

A의 반나절은 불과 몇십 년 전에 우리가 상상했던 SF적 미래였다. 공상과학이라고 생각했던 미래가 지금 우리 앞에 있다. 몇십 년 전에도 우린 미래는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했다. 지구는 멸망할 것이고, 황폐화된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재난과 싸워야 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느 시대 어느 시간에서든 종말은 화두였다. 다만 1999년과 달리 지금은 종말이 인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쩜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행운일지 모른다. 우리가 어떤 꿈을 꾸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이 남아 있으니까.

김은희,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30회 눈높이아동문학대전 아동문학 부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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