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은 이전 응답 시리즈와 달리 여러모로 변수가 많아 흥미진진하다. 가장 큰 변수는 여주인공에게, 최초의 살아남은 손위 형제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그녀의 결핍은 도리어 상실이 아닌 풍요에서 비롯되었다.

순하디 순한 덕선을 폭발시킨 스트레스가 바로 가족이다. 대외적으로 완벽한 커리어를 갖췄대도 덕선에게는 그저 폭군일 뿐인 나쁜 언니. 그럼에도 서울대생이라는 타이틀에 촉망받는 엘리트로 평가되는 성보라의 가치.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부모님의 편애. 또한 당시 시대상에 발맞추어 울타리 건너 모두가 내 가족이요 이웃인 덕선에게, 더 이상 차고 넘치는 가족애가 필요치는 않았으리라.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그래서 그녀는 유사 가족의 유대감이 아닌 왕자님의 구원을 찾는다. 유사 가족이 사랑으로 발전했던 이전 시리즈와 달리, 가장 그럴듯한 왕자님 커리어의 선우를 선택한 덕선의 짝사랑은 일종의 판타지다.

흥미로운 것은 살아있는 언니 보라뿐 아니라 여주인공의 판타지인 선우에게조차 변수가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낚시의 제왕이라는 오명을 달고 있지만 의외로 등장인물의 감정을 반전 요소로 이용하지 않았던 응답 제작진은, 동성에게 향한 준희와 빙그레의 감정마저도 그대로 오픈시켰었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그럼에도 선우의 짝사랑 대상만큼은 감춰두었다. 심지어 그가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드라마 속이 아닌 수정된 캐릭터 프로필에서 먼저 밝혀진다.

‘하지만 요즘, 이런 선우에게 엄마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생겨버렸다. ‘짝사랑 그녀’만은 엄마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속만 태우고 있다. 18년 동안 한 골목에서 자라온 그녀이기에 다가가는 게 쉽지가 않다. 지금껏 좋아한단 말 한 번 꺼내보지 못한 채,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88년 겨울, 이제 기나긴 짝사랑을 끝내고 싶다. 방법은... 고백뿐이다.‘

이런 방식은 너무나도 ‘응답하라’답지 않다. 심지어 그토록 남발했던 힌트조차도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선우가 여주인공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에게 또한 짝사랑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가장 짜릿한 난제, 선우의 그녀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응답하라 1988’이 ‘밀회’가 아니기에 18년 동안 한 골목에서 자라온 그녀라는 힌트에 걸맞은 사람은 역시 덕선이뿐이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선우-덕선은 딱히 변태 아닌 누구나 생각해볼 만한 정석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에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너무나 쉬운 코스라서. 유사 가족의 걸림돌이 없는 둘에게 일방통행 아닌 동갑내기 하이틴의 사랑이 뭐가 문제된단 말인가? 한마디로 도리어 사랑의 장애물이 없어 이쪽은 그리 신통치 않아 보인다.

선우가 선택한 그녀가 덕선이라면, 응답하라의 시그니처인 유사가족으로 인한 갈등은 형제보다 가까웠던 친구 사이의 애증에서 비롯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그림이 그려졌던 이전 시리즈와 달리 ‘응답하라 1988’의 덕선, 정환, 선우, 택은 마치 세 사람의 칠봉이 같아 보다 치열해졌으니까.

이제 막 자각한 정환의 마음이 3년씩이나 애태운 선우의 사랑에 걸림돌이 될까? 혹여 그 반대라면? 선우의 고백이 정환의 자각 앞에 영영 입을 다물게 되거나, 서둘러 성적 긴장감으로 포문을 연 정환의 마음이 3년의 짝사랑 앞에 무너지게 될까.

우정이 먼저인 청춘드라마를 찍으며 사랑을 내려놓든, 혈기왕성한 10대의 소년들이 여자아이 하나를 놓고 싸우든, 어느 쪽이든 재밌는 그림이 될 것은 분명하다. 플라토닉한 선우의 3년간의 사랑은 느리고 애절해서 재밌고, 남자와 여자를 느낀 순간부터 단기간에 서둘러 사랑하는 정환의 마음은 보다 본능적이어서 재밌다.

하지만 ‘18년 동안 한 골목에서 자라온 그녀’는 덕선이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는다. 더군다나 여주인공의 손위 형제를 향한 집착. 자각하고 보니 ‘너 말고 네 언니’ 스토리는 보라가 끼어들어야 가능해진다. 뜻밖에 보다 응답하라 세계관에 가까운 것은 선우-덕선이 아닌 선우-보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현재씬에는 거의 의미를 두지 않지만, 초콜릿으로 너스레를 떠는 이미연의 반응이 치열한 10대의 사랑싸움을 거쳤다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싶다.)

▲ tvN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7’의 윤태웅은 성시원을 사랑한다는 착각으로 그녀의 죽은 언니를 못 잊어했다.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가 섣불리 나정을 선택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나정의 죽은 오빠를 대신한 유사 형제 노릇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응답하라1988'의 성보라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성덕선은 부모의 사랑을 언니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잠재된 결핍과 열등감이 첫사랑마저 빼앗긴 아픔에 심화되지 않을까.

"저 오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오빠를 많이 좋아하는데 가슴이 뛰거나 설레지는 않아요. 미안해요. 오빠." (응답하라 1997 시원의 대사)

각자의 입에서 나온 ‘보라 누나’와 ‘우리 선우’. 제작진이 던져준 힌트는 너무나도 미약한 불씨와 같다. 하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요소라 밟아 꺼뜨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껏 좋아한단 말 한 번 꺼내보지 못한 채,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소년이 입을 다문 기간이 3년이다. 생각해보면 소년이 감내하기에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아득한 시간이다. 때문에 내 관심은 온통 덕선의 남편이 누구인가가 아닌, 선우의 짝사랑 상대와 진행 과정이 되어버렸다.

3년씩이나 마음을 감춰두고 끙끙댔을 그의 사랑의 열병이. 그가 3년 전 그녀에게 반하게 된 첫 순간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진 것이다. 무려 3년씩이나 응축된 마음이다. 응답하라 월드의 틀을 깨면서까지 철저하게 감추어둔 그의 사랑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호기심과 동시에 의외성 없어 멀리했던 선우라는 캐릭터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
그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는 벌게진 선우의 얼굴과 꿈꾸듯 몽롱한 눈빛으로 표출되었다. 골목길 그녀가 부쩍 귀여워진 것 같지 않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술에 취한 듯 그녀에게 취한 듯 몽환적인 얼굴로 “어...조금?”이라고 답했던 선우.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아닌, 선우의 긍정과 함께 재생된 이문세의 소녀는 곧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마음의 소리였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돼요.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순 없어요. 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가사를 돌이켜보면 사뭇 눈물이 날정도로 애절한 마음이다. 내 곁에만 머물러줘요. 떠나면 안 돼요라니. 제작진은 선우의 사랑에 ‘소녀’라는 타이틀을 헌사하면서 그가 얼마나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는가를 전했다.

사실 내가 보고 싶은 건 선우의 사랑이 아닌 그 마음을 연기할 고경표의 연기력인지도 모르겠다. 취한 얼굴로 몽롱해졌지만 슬픈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어.”라고 대답하곤 서둘러 정신을 수습해 친구에게 바톤을 넘기던 선우. 그가 “어.”라고 대답했던 것이 덕선을 향한 것인지, 덕선이 걸친 보라 누나의 옷처럼 덕선에게 겹친 그녀의 형제에 대한 것인지. 어찌됐든 3년씩이나 응축된 선우의 감정을 표현했던 고경표의 표현력은 4회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연기였다.

이쯤해서 응답하라 제작진이 굉장히 영리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 봐도 남편일 듯한 정환이 있음에도 고경표의 인지도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때문에 선우는 굳이 전형적인 여주인공의 남편감이 되지 않는다 해도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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