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하이브는 역사가 짧다. 다른 대형 기획사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SM과 YG, JYP 기존 3대 기획사는 90년대에 설립됐다. 특히 SM은 설립 이후 줄곧 복수의 보이그룹과 걸그룹을 제작하고 운영해 왔다. 하이브의 전신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2000년대에 설립됐고, 보이그룹을 제작한 건 2013년 BTS가 처음이다. 2019년 TXT가 데뷔하기까지 BTS 한 팀만 운영했다. 이후엔 하이브로 사명을 변경하고 산하에 다수 기획사를 두는 멀티 레이블 체제로 바뀌면서 보이그룹 세븐틴과 엔하이픈, 걸그룹 여자친구와 프로미스 나인이 합류했다. 하지만 걸그룹 두 팀은 하이브가 제작하지 않은 것은 물론 세일즈 규모가 큰 그룹이 아니었다. 하이브의 메인 라인업은 원래부터, 그리고 어디까지나 보이그룹이었다.

보이그룹을 응원하는 여성 팬들은 회사에 비판적인 성향이 있다. 아티스트가 케어받는 상태에 민감하고, 회사를 상대로 여론전을 벌이는 '총공'을 감행하는 일이 잦다.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대상, 동행하는 존재는 자신들이 사랑하는 아이돌이며, 회사는 그들에 관해 더 나은 처우를 얻기 위해 견제하고 압박해야 하는 제삼자다. 하이브의 절대적 자산인 BTS의 팬덤이자 케이팝 신에서 가장 거대한 팬덤인 '아미'는 방시혁을 좋아하지 않는다. SNS에서 '방시혁'으로 검색하면 비판과 성토, 감정적 거부감을 토하는 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빅히트 시절부터 회사 운영의 주요 국면에서 아미의 집단행동이 방시혁을 무릎 꿇린 일이 수차례 있었다. 아미에게 BTS는 회사를 넘어 국내외 팬덤의 전례 없는 서포트에 힘입어 성공한 그룹이다. 회사의 후광으로 대리석 깔린 길을 걸은 다른 대형 기획사 아이돌과 달리 BTS는 흙바닥에서 일어나 자신들이 하이브를 일구고 세웠다. 이들은 BTS의 팬일 뿐 하이브의 팬이 아니다.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니까, 하이브엔 그룹을 넘어 회사를 지지하고, 회사 수뇌부 결정에 연대하는 '회사 팬'이라 할 만한 존재가 없거나 적었다. 이건 이 회사의 길지 않은 역사, 폭이 좁은 아이돌 라인업이 지닌 한계다. SM과 JYP는 국내와 해외에 걸쳐 뿌리 깊고 폭넓은 회사 팬을 두고 있다. 이들은 같은 회사 그룹들에게 두루 관심을 가지고, 후배 그룹이 데뷔하면 팬덤으로 내리 물림 되기도 하며, 회사를 위해 우호적 여론을 조직하기도 한다. 기획사의 전통이라 할 만한 오랜 역사와 세대 별로 데뷔한 다양한 아이돌 라인업, 그를 통해 구축된 프로덕션과 매니지먼트 정체성이 회사 팬덤이 자라나는 토지가 됐다.

한편, 회사 팬이 형성되는 데는 ‘걸그룹’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팬덤 기반의 보이그룹보다 걸그룹이 더 많은 사람의 관심사가 된다. 따라서 회사를 알리고 꾸미는 이미지 자본이며, 보이그룹에 비해 팬덤과의 정서적 유착이 느슨하기 때문에 그룹에 품은 관심이 회사로 전이될 여지도 크다. 대형 기획사들이 주식시장에 상장된 후에는 주식 투자를 하는 중장년 남성들이 운명 공동체로서 회사 팬이 된 케이스도 많다. 남초 커뮤니티 역시 가입과 게시물 열람이 폐쇄적인 여초 커뮤니티에 비해 이슈 개방성이 높아 여론 확장성이 더 크다. 이런 특성이 ‘대중성'의 일각을 구성하는 질료가 된다.

SM이 케이팝의 ‘레거시’이자 그 자체로 케이팝의 소우주를 이루는 회사 내 아이돌 계보, 특유의 색깔과 세련미가 물든 프로덕션을 통해 회사 팬덤이 퇴적된 케이스라면, JYP는 걸그룹 사업을 통해 회사 팬이 확장된 케이스다. 원더걸스부터 미스에이, 트와이스, 있지, 엔믹스로 이어지는 ‘걸그룹 명가’의 명성을 확보한 것이다. 반면 YG는 상대적으로 회사 팬이 두텁지 않다. 힙합 가요 레이블로 시작해 아이돌 전문 체제로 바뀐 역사가 길지 않고 지금껏 제작된 아이돌 숫자도 많지 않다. YG의 글로벌 팬덤은 블랙핑크를 통해 본격적으로 확대됐고 이들 역시 YG의 팬이라기보다 블랙핑크 팬에 가까워 보인다.

SM, YG, JYP엔터테인먼트 로고 이미지
SM, YG, JYP엔터테인먼트 로고 이미지

현재 하이브는 회사 팬을 양성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섰다. 그럴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갖춰진 상태다. 아이돌 라인업이 대폭 늘어났고, 오랫동안 손대지 않았던 걸그룹 다수를 운영하고 있고 또 새로 제작할 계획이다. 하이브란 이름 역시 국내외에서 케이팝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최근 소속 아티스트들 간의 댄스 챌린지 등 콜라보가 활발하고, 예능 방송 ‘십오야’에 하이브 그룹이 단체 출연해 야유회를 한 것도 그런 맥락 안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회사를 성장시킨 사업방식, BTS를 통해 대규모 매출을 확보하고 그 돈으로 공세적 인수합병을 전개하는 멀티 레이블 체제가 거기 적합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서로 다른 회사를 통해 제작돼 서로 뿌리가 다른 그룹과 팬덤이 산하에 있는 느슨한 연결 방식은 3대 기획사 같은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일으키지 못한다. SM이 창업주와 소속 가수들이 ‘선생님’이란 경칭을 통해 끈끈한 관계를 잇는 대가족 공동체 모델을 보여주고 팬덤 역시 패밀리십에 따라 연결됐다면, 하이브는 이해득실을 통해 가수와 회사를 의족처럼 붙이고 잘라내는 철저한 사업 공동체 모델이다. 하이브의 주력 라인업인 보이그룹의 팬덤은 코어 성향이 강력한 만큼 그 그룹 하나에 애착감정이 고착되는 경향이 있고, 특히나 동 시기 활동하는 다른 보이그룹과는 팬덤이 교환되지 않는다. 하이브 아이돌을 아우를 수 있는 회사의 정체성 같은 것도 없다. 이렇게 ‘족보’가 없는 상태 때문에 작년 신인 걸그룹이 동시에 데뷔할 때는 누가 방시혁의 서자니 적자니 논쟁이 벌어지는 웃을 수 없는 몰골의 해프닝까지 있었다.

그룹 뉴진스 [어도어 제공]
그룹 뉴진스 [어도어 제공]
그룹 르세라핌 [쏘스뮤직 제공]
그룹 르세라핌 [쏘스뮤직 제공]

이런 상황의 열쇠는 ‘걸그룹’이다. 하이브가 어도어 레이블과 쏘스뮤직에서 뉴진스, 르세라핌을 론칭한 목적은 물론 걸그룹 시장에 진출해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지만, 그 이상의 사업적 이득이 있다. 걸그룹은 보이그룹 간의 관계와 달리 보이그룹 팬덤이 유입할 수 있는 대상이고, 현재 걸그룹 팬덤의 특징은 보이그룹 팬덤 출신의 여성 팬덤이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신인 걸그룹을 구심점으로 기존 하이브 그룹 팬덤이 교환될 수 있다는 뜻이고, 군 복무로 인한 보이그룹 활동 공백기 동안 팬덤의 소비지출을 다른 그룹으로 돌려 보전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뉴진스와 르세라핌에 유입하는 남자 팬들이 회사의 팬덤이 될 수가 있고, 그동안 보이그룹 신 내부에 머물렀던 팬덤 파이를 그 바깥의 커뮤니티로 확장할 수 있다. 이런 전망이 하이브가 원천 제작하거나 방시혁이 직접 손을 대서 인수합병 레이블에 비해 정체성의 구심력이 있는 빅히트, 쏘스뮤직, 어도어 소속 아이돌을 중심으로 실현돼 회사 팬이 구축될 수 있다.

하이브 걸그룹 프로젝트의 거시적 목표 혹은 효과 중 하나는 저 회사 팬과 남초 민심, 회사의 의사결정을 지지하는 우군을 얻는 것이란 인상이 든다. 실제로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뉴진스와 르세라핌 데뷔 이후 하이브와 방시혁을 칭송하고 비호하는 유저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 보인다. 애플과 삼성도 회사의 팬덤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특수한 케이스다. 소비자와의 ‘정서적 유착’이 사업의 핵심 매개이며 자산인 케이팝이기에 회사 팬은 일반적인 화두이며 갖춰야 할 경쟁력이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그룹을 제작하고 운영하는 하이브의 사업방식과, 소속 가수를 대체할 수 있는 부품으로 대한 행적은 그룹 팬덤 사이에 공동체 의식보다는 경쟁의식과 균열의 씨앗을 심고 있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