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케이팝의 글로벌 전략 중 하나는 국적의 다원화였다. 이는 케이팝이 아시아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글로벌화 된 2000년대 말 이후부터 외국인 멤버를 발탁하는 것으로 진행됐고, 케이팝 그룹 자체의 글로벌 성격이 정초된 후에는 아시아 각지에서 현지화 그룹이 제작되고 있다. 세계 대중문화의 패권 국가 미국은 다인종 국가인 데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지위가 확고해 이질적 문화를 흡수하고 자국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해 왔다. 반면 한국은 단일한 계통의 언어와 인종으로 구성된 변방 국가다. 해외시장 진출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국의 문화적 정체성과 부분적으로 융합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정체성을 구성하였다.

BTS가 전원 한국인 멤버로 북미에서 스타가 되며 성공했지만, 케이팝 아시아 시장이 형성되는 데 외국인 멤버들이 주요한 역할을 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외국인 멤버는 이성애적 애착 감정의 대상이 되는 보이그룹보다, 남녀를 막론하는 보편적 관심사가 되고 각지 여성 팬들의 동일시도 끌어낼 수 있는 걸그룹에서 더욱 영향력을 발휘했다. 트와이스는 미나, 사나, 모모가 앞장서 일본 시장을 석권했고, 블랙핑크 리사는 동남아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서구에서 셀럽이 됐다. 걸그룹 외국인 멤버들은 출신지역에서 사회적 관심을 모으는 창구가 되는 한편 그룹 내에서 글로벌 팬덤도 가장 큰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생겨난다. 케이팝은 다문화적 정체성들과 융합하며 글로벌 장르가 되었지만, 케이팝이 케이팝으로 남으려면 ‘메이드 인 코리아’의 정체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 명분과 현실의 충돌로 불거지는 것이 케이팝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튀어나오는 논란들이다. 거시적으로 가면 니쥬 같은 전원 외국인 현지화 그룹과 <걸스 플래닛> 같은 한중일 오디션 방송의 정체성이 논란이 되고, 미시적으로는 각 그룹 외국인 멤버들 처우가 쟁점이 된다. 외국인 멤버가 인기가 있어도 각 그룹 메인은 한국인 멤버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그룹이 운영된다. 이것이 케이팝 산업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불문율이다. 외국인 멤버 비중 문제, 개인 프로모션 부족, 무대 의상 논란까지, 회사가 외국인 멤버를 차별한다는 가지각색 논란은 해외 팬덤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됐고 제기되고 있다.

프로젝트 걸그룹 아이즈원 (오프더레코드·스윙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프로젝트 걸그룹 아이즈원 (오프더레코드·스윙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미야와키 사쿠라는 그중에서도 굴곡과 파란이 많은 케이스다. 그는 연습생 시절부터 회사에 소속돼 데뷔한 여타 외국인 아이돌과 달리 일본인 아이돌로 활동하다 한일합작 방송 <프로듀스48>을 통해 한국에서 데뷔했다. <프로듀스48>을 제작한 엠넷과 아이즈원을 맡은 오프더레코드, 스윙 엔터테인먼트가 사쿠라를 대한 방식은 ‘이용’은 하되 ‘활용’은 하지 않는 것이었다. 화제성이 좋고 아시아에 큰 팬덤을 가진 사쿠라를 통해 한일합작이란 포맷을 홍보하고 일본 현지에 진출하는 통로를 마련했지만 실질적 비중은 주지 않았다. ‘한일합작’은 아이즈원의 탄생 배경이지만 그룹 내외부에서 그룹의 정체성이나 주도권을 두고 유무형의 대립과 논란이 첨예했다. 일본인 멤버들이 한국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는 현실은 “일본 활동에서 비중을 받으면 된다”라는 논리로 미봉되었지만, 한국인 멤버들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많은 기회를 받았다. 이처럼 한국 활동과 일본 활동을 분리하는 노선, 외국인 멤버 활용에 스스로 강한 제약을 거는 모습은 종종 외국인 멤버 처우 문제가 불거지는 다른 회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일이고, 해외 시장 확장 가능성이 축소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이브가 르세라핌이란 걸그룹을 런칭하며 사쿠라를 영입한 건 그가 보유한 해외 팬덤과 일본에서 지닌 사회적 화제성 때문일 것이다. 신인 그룹에 ‘경력직’ 아이돌을 넣으며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어떤 ‘기반’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볼 때 사쿠라보다 큰 효과를 줄 수 있는 아이돌은 찾기 힘들다. 르세라핌은 일본에서 기록적인 관심을 받으며 데뷔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팬덤이 형성되지 않은 여타 신인 그룹과 달리, 사쿠라 중국 팬덤이 공동구매한 앨범 수만 장을 더해 신인 그룹 초동판매 기록을 쓸 수 있었다. 해외 트위터를 둘러보면 사쿠라 팬들은 아이즈원 시절의 결핍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한국에 소속사가 없던 사쿠라의 처지에서 비롯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어 사쿠라를 영입한 하이브의 처우는 어떻게 다를지 기대감이 컸다.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걸그룹 르세라핌 멤버 미야와키 사쿠라 Ⓒ연합뉴스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걸그룹 르세라핌 멤버 미야와키 사쿠라 Ⓒ연합뉴스

하지만, 현재까지 하이브의 운영 방침은 아이즈원 때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사쿠라는 일본에 개인 소속사를 둔 채로 하이브와 계약을 했다. 며칠 전 발표된 싱가폴 패션 잡지 커버 모델 소식을 빼면, 사쿠라의 외부 활동은 일본에서만 잡히고 있다. 한국 활동은 데뷔 전에 잡힌 유튜브 채널 ‘ODG’ 출연 단 하나다. 데뷔 후 개인 스케줄이 단 한 번도 없는 멤버는 막내 홍은채와 사쿠라밖에 없다. 일본에서 잡힌 스케줄도 하이브가 아닌 일본 회사를 통해 잡힌 것으로 보이며 방송 진행자와 사쿠라 개인의 친분으로 잡힌 스케줄도 있다. 이런 상황은 여러모로 의아한 것이고 다른 멤버들에 비춰 합리화되기 힘들다. 예컨대 ‘경력직’보다 신인들에게 기회를 줘서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라고 보기엔, 같이 아이즈원에서 넘어 온 김채원은 그룹에서 가장 많은 개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전례를 통틀어 봐도 지금껏 오디션 그룹 출신 아이돌이 합류해 데뷔한 그룹에서 ‘경력직’ 아이돌을 이만큼 소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는 없었다.

이렇듯 한국 활동과 일본 활동을 분리하는 노선은 아이즈원 같은 한일합작 프로젝트 그룹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례고, 합리적인 노선이 아니란 건 입증이 된 상태다. 만약 하이브가 아이즈원의 그런 부분까지 벤치마킹을 하는 거라면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무엇보다 그룹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르세라핌은 멤버가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 그룹이다. 주어진 자원을 다 활용을 해야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외국 팬들 역시 한국 활동을 메인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한국 활동에서부터 비중을 주어야 해외 시장에서 파급력이 나온다. 일본에서만 개인 소속사를 통해 스케줄을 잡는다고 효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쿠라는 기회를 받으면 부응했다. 단 한 번의 개인 활동 ‘ODG’에 출연했을 때도 수백만 번에 이르는 뷰를 기록하며 한일 양국 인기 동영상에 들었다.

르세라핌 [쏘스뮤직 제공]
르세라핌 [쏘스뮤직 제공]

르세라핌 멤버들은 모두가 매력이 있고 재능이 있다. 그들은 각자 기회를 받을 자격이 있고 사쿠라 역시 마찬가지다. 무대에서의 표현력, 화보 촬영에서의 표정과 분위기 연출, 명석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 일취월장한 한국어 실력, 선 굵고 화려한 얼굴 등 많은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만한 팬덤과 스타성을 보유한 것이지 아무 이유 없는 인기는 있을 수 없다. 하이브가 사쿠라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문제는 해외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얘기가 나오고 있고, 그들의 요구는 사쿠라를 특별대우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과 동등한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요구다. 이처럼 편중된 운영 방식은 지금껏 그룹에 도움이 된 것도 없고 앞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이브와 쏘스 뮤직은 사쿠라의 화제성과 팬덤을 흡수해 기반으로 삼고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사쿠라 중국 팬들은 르세라핌 컴백을 앞둔 지금 서로를 독려하며 10만 장이 넘는 공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팬들의 요구를 일정 부분 반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건 팬들의 열정과 기대 심리에 의해 돈을 버는 이 산업에서 사업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윤리, 일종의 상도덕이다. 마찬가지로 회사는 아이돌의 성장을 돕는 존재다. 데뷔 이후 줄곧 활동에서 뒤로 물리는 것이 성장을 억제하는 방향이란 건 말할 가치도 없다. 어떤 사유가 있건 간에 지금처럼 최소한의 기회도 주지 않는 태도는 합리화될 수 없다.

하이브는 르세라핌을 단단한 그룹으로 키우기 위해 자체 콘텐츠 제작과 음반 퀄리티에 공을 들이고 있고 호평받아 마땅한 사실이지만, 멤버 운영에 관해서는 지금까지의 방침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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