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헌장실천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언론윤리 TALK>은 취재보도 활동에서 발생하는 윤리 문제를 주제로 언론인에게 드리는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 학계와 시민사회, 언론계에서 언론윤리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온 필진이 돌아가며 격주로 집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에서 발행하는 [언론인권통신]에 게재합니다. 동의를 구해 미디어스에 싣습니다.   

지나친 경쟁과 죄수의 딜레마

[미디어스=김민정 칼럼]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의 저자 제랄드 브로네르는 미디어 간의 과열 경쟁 상황이 죄수의 딜레마를 낳는다고 설명합니다. 죄수의 딜레마는 같이 범죄를 저지른 A와 B가 따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둘 다 침묵하면 두 사람 모두 6개월 형을, 둘 다 자백하면 둘 다 5년 형을, 한쪽만 자백하면 자백한 쪽은 출옥하고 다른 쪽은 10년 형을 받는 허구의 상황을 가정한 게임이론입니다. 두 사람에겐 최상의 선택지(6개월 형)가 존재하지만, 경쟁 관계에 있고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함으로써 일종의 집단적 비합리성(5년 형)에 이르게 됩니다.

브로네르는 기자와 언론사가, 참인지 거짓인지 불확실한 정보 혹은 보도 가치가 미미한 루머를 기사로 다루게 되는 이유는 경쟁이 과열되면서 특정 기자나 언론사가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을 때 져야 할 위험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보도하지 않고 기다리다가는 경쟁사에게 특종을 뺏길 가능성이 있고, 또 인터넷에서 특정 정보가 사실 여부나 보도 가치와 상관없이 소위 '조회수 대박'을 터뜨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중하게 침묵을 지킨 언론을 기억해 주거나 칭찬해 줄 사람도 거의 없죠. 결국,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빠진 기자와 언론사는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정보, 가십성 루머라 해도 우선 쓰고 보게 되는 거고, 이는 저널리즘의 신뢰도 저하, 공론장의 황폐화라는 집단적 비합리성을 낳습니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죄수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사례로 브로네르가 든 것은 프랑스 대통령 부부 불륜설입니다. 프랑스 정통 미디어 간에는 정치인의 사생활은 다루지 않는다는 묵시적 합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2010년 당시 영부인이었던 브루니가 사르코지 대통령과 결별하고 가수 비올레에게 가면 사르코지 대통령은 환경부 장관에게로 갈 것이라는 소문을 파리의 여러 언론사 편집국이 보도하지 않았던 이유죠. 하지만 유명한 기자가 트윗에서 이 소문을 언급하고 며칠 후 유력 주간지의 인터넷 블로그에서 이 소문을 다루면서 묵시적 합의는 깨지게 됩니다. 거의 모든 프랑스 일간지, 라디오, TV가 대통령 부부의 불화설을 보도했고 세계 여러 언론 역시 국제 뉴스로 소개했습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대통령 부부의 불륜 의혹을 신뢰받는 기자와 유력 주간지가 공개적으로 거론하자 빗장이 풀려버린 거죠. 추후 불륜설은 완전한 허구로 밝혀졌습니다.

조회수 경쟁과 혐오유발보도, 죄수의 딜레마 벗어나기

최근 청년 두 사람의 극단적 선택으로 온라인 언어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높아졌습니다. 혐오의 정서에 편승하여 조회수를 올리는 언론 보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함께 나옵니다. 이미 2019년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국민인식조사에서 절반가량(49.1%)의 응답자는 '언론이 혐오표현을 유발하는 부정적 역할을 한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사이버렉카, 유사 언론을 비판하는 기사를 지면에 내보내면서도 자사의 온라인 전용 기사에서 똑같은 행동을 하는 언론사들도 많습니다. 한국 언론의 디지털 혁신의 방향이 이것이라면 참으로 참담한 일입니다.

정치인, 유명인의 SNS를 주시하고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흥밋거리가 될 만한 말을 찾아내고
‘어그로를 끄는’ 유튜버가 제기하는 '논란'을 기사화하면서,
‘내가 이러려고 기자가 되었나’라는
자괴감을 느끼는 기자들도 많을 겁니다.

저는 혐오유발 기사를 쓰고 싶어서 쓰는 기자는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 유명인의 SNS를 주시하고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흥밋거리가 될 만한 말을 찾아내고 '어그로를 끄는’ 유튜버가 제기하는 '논란'을 기사화하면서, '내가 이러려고 기자가 되었나'라는 자괴감을 느끼는 기자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보도 가치가 있는 정보인지, 내 기사가 혐오를 자양분으로 관심을 끌며 세력을 확장하거나 돈벌이를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키우는 확성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를 찬찬히 따져보고 기사를 쓰지 않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조회수를 최우선 가치로 놓고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는 매우 위태로운 것입니다. 한국 언론 역시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이제, 한국 언론은 무작정 기사를 쓰면서 공멸할 것인지 아니면 보도할 것과 보도하지 않을 것을 구별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하고 저널리즘의 가치를 복원하며 사회에 기여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차별과 편견의 금지는 세계적 추세

저는 2020년 가을, 겨울에 <언론윤리헌장> 제정위원회1)에 참여했습니다. 제정위원회 활동 초기에 언론윤리 관련 기존 연구를 살펴보면서 국내와 해외의 차이도 알게 됐습니다. 북미와 유럽 언론단체들의 언론윤리 규정들을 검토한 연구는2) 해외언론윤리규정들에서 '사회적 약자 보호’, '인권 보호’, '인류애’ 등의 포괄적 대원칙이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또 다른 연구도3) 유사한 경향을 보여줍니다.

언론사들의 언론윤리 규범에 명시된 '언론이 지켜야 할 추상적 가치'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후 얼마나 많은 언론사들이 해당 가치 항목을 채택하고 있는지에 따라 항목별 순위를 매겨보니, '차별과 편견의 금지, 사회적 약자 보호’의 가치가 한국에서는 11위인 반면 미국에서는 3위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에서 1위를 차지한 '정치·경제·사회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및 독립'은 미국에서는 7위였구요.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가장 우위에 내세우는 것은 오랜 권위주의 시기 동안 언론 자유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한국 언론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는 걸 겁니다.

하지만 국제기준4)으로 봐도, 기자들이 체감하는 기준5)으로 봐도 언론자유도는 현저히 상승했습니다. 이제 한국 언론은 '사회적 책임' (한국 9위, 미국 2위)과 '차별과 편견의 금지, 사회적 약자 보호(한국 11위, 미국 3위)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언론윤리헌장> 제3항 "인권을 존중하고 피해를 최소화한다”와 제7항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별에 반대한다"의 취지와 의미를 무겁게 되새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1) 총 13명(현직 언론인 7명, 헌장 제정에 뜻을 모은 각 단체 소속 참여자 3명, 언론학 교수 2명, 변호사 1명)이 현장 제정 작업에 참여했고, 한국언론진흥재단 저널리즘지원팀도 실무 지원 등으로 수고해 주셨습니다.
2) 배정근, 유승현, 오현경 (2019), <언론윤리규정 개선을 위한 연구>, 한국언론진흥재단.
3) 윤석민 (2020), <미디어 거버넌스>, 나남.
4) 가령, '국경없는 기자회'가 측정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은 3년 연속 아시아 1위를 차지했습니다.
5)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실시한 <한국의 언론인 2021> 조사결과에 따르면 2021년에 한국 기자들이 체감하는 언론 자유도는 조사가 시작된 2007년 이후 최고치로 5점 만점에 3.44점입니다. 한편, 기자들이 평가한 언론의 신뢰도는 2.9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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