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김준완 교수는 친구 동생 익순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실을 찾는다. 그런데 병실의 익순은 자신을 걱정하는 오빠를 위해 티슈로 비둘기를 만들어 성대모사까지 하며 날리고, 그 모습이 이성적인 인간 김준완으로 하여금 첫눈에 반하도록 만든다. 배우 곽선영은 티슈로 비둘기를 만들어 날려야 하는 개그스런 장면과 그럼에도 사랑스러워야 하는, 그 어려운 미션을 거뜬히 해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1 내내 시청자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은 커플이 탄생한 순간이다.
마찬가지다. 십여 년 만에 만난 대학동창 수진은 출생의 비밀을 지닌 듯한 아이를 데리고 남편 앞에 나타났던 재화에게 어이없어하며 말한다. “니가 예전부터 좀 엉뚱했잖아”. 사귀던 자신을 두고 그것도 자기 절친과 바람이 나서 결혼까지 해버린 남자를 '더는 참고 싶지 않다'며 십여 년 만에 찾아가 복수하려는 여자. 그런데 그 여자가 미친년 같기보다는, 연민과 응원하도록 만들기가 어디 쉬운가. 그 어려운 걸 재화 역을 맡은 곽선영 배우는 해낸다.
12월 17일 방영된 <KBS 드라마스페셜 2021> ‘보통의 재화’ 편은 배우 곽선영의 포텐을 터트리며 ‘억울하다 못해 마음의 병을 가지게 된 재화’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재수 없는 여자, 재화
산통 끝에 제왕절개로 태어난 재화는 사는 게 참 여의치 않다. 말 그대로 재수가 없다. 모처럼 운동하겠다고 나섰는데 산책 나온 견공이 그녀의 신발에 쉬를 하는 식이다. 모든 게 그렇다. 직업은 텔레마케터, 감정 노동의 나날은 늘 욕받이 같은 처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쭈욱 늘어선 긴 줄 뒤에 선 그녀가 갑자기 쓰러진다.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다. 이 시대의 병인 공황장애이다.
정신과 상담을 하게 된 재화. 타성에 젖은 의사 최병모(최대훈 분)는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약 처방에 연연한다. 그런데 그 앞에서 재화가 묻는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보통의 재화’는 정신과 상담실에서 이루어진 재화의 ‘공황장애 이유 찾기’ 상담을 줄기로 그녀의 삶을 그린다.
공황장애에 딱히 이유가 없다며 약을 먹으라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그 이유 찾기에 골몰하던 그녀는 결국 대학시절 실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제 더는 참지 않겠다고 선언한 재화는 예의 해프닝을 만든다.
드라마는 이제 보편적 현상이 되어가는 우리 시대의 병, 공황장애에 걸린 재화를 통해 서른 중반 여성의 삶을 복기한다. 재화는 첫 상담에서 말한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건 '참는 것'이라고. 왜 참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나만 참으면 되니까. 내가 한번 꾹 참고 넘어가면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라고 말한다. 텔레마케터 상담에서 고객의 욕설을 한번 꾹 참듯이 말이다.
재화는 오래도록 참아왔다. 거슬러 대학시절 자신을 보기 좋게 배신한 남친과 절친부터,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현관문을 탕탕 두들기며 온 치킨 배달에까지. 그래서 이제 더는 참지 않겠다고 한다.
전 연인을 찾아가 한 방 먹이듯 그렇게 재화는 자기 삶에서 꾹 눌러왔던 감정들을 조금씩 드러내 보인다. 십여 년이 지나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친구에게 따귀를 한 방 먹인다. 어느덧 재화의 ‘친구 아닌 친구’가 되어버린, 재화의 딸 노릇을 해준 희정(김나연 분) 친구들과도 한 판 걸지게 붙는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어떻게 만들까?
많이 좋아졌다며 웃지만 재화는 여전히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늘 약 타령을 하던 의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다. 바로 '가족'이다.
가족이란 말이 나오자 도망쳤던 재화. 의사의 말처럼 '대상 관계'인 가족은 재화의 묵은 상흔이다. 그 상흔 속에는 재화의 깊은 후회가 있다.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어린 재화는 그걸 엄마한테 말했고, 그로 인해 엄마가 오래도록 고통받았다는 후회가 재화의 트라우마가 됐다. 그래서 그 트라우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참으면 된다고 자꾸 그녀를 억누르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 모임에서 묵은 감정을 풀어놓게 된 재화. 그래서 재화는 치유됐을까? 더는 참지 않겠다며 그간 자기 안에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을 꺼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엘리베이터는 '난공불락'이다. 그래서 재화는 약 먹기를 자처한다. 이제는 먹기 좋게 가루약을 타온 그녀가 약봉지를 앞에 두었을 때 의사가 전화를 한다.
상담 과정은 재화 스스로 자신의 아픔을 살펴보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매너리즘에 빠졌던 정신과 의사 최병모가 직업적 소명을 깨닫는 시간이다. 전화를 한 의사는 재화에게 말한다. 아빠의 외도처럼,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은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려 애썼을 뿐이라고. 그런 당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운동화에 쉬를 한 견주가 사과도 없이 지나쳤듯 자기중심적인 사람들 때문에 당신이 상처 입은 거라고. 당신은 열심히 살며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느라 애써오는 동안 지쳤을 뿐이라고. 그러니, 힘들면 이젠 좀 자신도 돌보면서 살아가라고.
상처 입은 주인공이 더는 참지 않고 나서는 해법은 드라마에서 새롭지 않은 방식이다. 그런데 <보통의 재화>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야수처럼 변해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면서도 주인공은 “왜 그럴까요?”라는 질문은 놓치지 않는다. 자신이 아픈 이유, 고통스러운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배려심 없는 타인은 물론, 그런 타인을 배려하느라 애썼던 자신 모두에게서 찾는다.
거기엔 열심히 애쓰며 살아온 한 개인이 있음을 알고 다독인다. 그렇다.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제멋대로 하려는 게 아니다. 어울려 살아보려 애쓰는데 그런 과정에서 나를 돌보지 못하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매번 문 앞에 놔달라고 하는데도 문을 두드리던 치킨 배달부에게 쪽지를 붙여 자신이 하고픈 말을 다 풀어냈던 재화. 거기서 끝이었을까? 아니다. 다시 온 치킨 배달부는 그녀의 부탁대로 조심스레 문 앞에 치킨을 두고 간다. 그때 재화가 문을 연다. 감사하다며 드링크 한 병을 내민다. 엄마에게 속엣말을 토해놓던 재화가 결국 엄마의 말대로 돈을 부치고 아빠 옷을 사서 보낸 것처럼 말이다. 아웅다웅하던 희정을 위해 싸워주고 함께 밥을 먹듯이.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재화'식의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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